향년 100세를 일기로 타계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한반도와도 깊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특히 퇴임 후인1994년 방북을 통해 미국과 북한 간의 잠재적 전쟁 위기를 막는 역할을 했다고 전직 미 관리들은 평가했습니다. 김영교 기자가 보도합니다.
조셉 디트라니 전 북핵 6자회담 미국 차석대표는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이상주의자였다”고 평가하며 “그는 올바른 일을 하고자 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디트라니 전 차석대표] “He was an idealist. He wanted to do good. He felt he could make a difference, as he did in 1994.”
“올바른 일을 하고자 한 이상주의자”
디트라니 전 차석대표는 30일 VOA와의 전화 통화에서 카터 전 대통령은 “1994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북한 주석을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제39대 미국 대통령으로재임했던 카터 전 대통령은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1차 북핵 위기’가 고조되자 이듬해 6월 직접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북한은 핵무기 개발 의지를 시사하면서 IAEA 사찰단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했고, 미국은 이에 유엔 제재를 추진했습니다. 일각에서는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선제적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1994년 6월 아내인 로잘린 여사와 한국에서 비무장지대를 넘어 북한을 방문한 카터 전 대통령은 이틀 간 김일성 주석과 평양에서 회담을 진행했습니다.
회담 끝에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 재개를 대가로 핵프로그램을 동결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이돌파구는 40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과 북한 간의 대화로 이어졌습니다.
“잠재적 전쟁 막아”
게리 세이모어 전 백악관 대량살상무기 조정관은 카터 전 대통령이 “잠재적 전쟁을 막는 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세이모어 전 조정관] “I think he played a role in preventing a possible war. I don’t know whether President Clinton would have ordered a military strike, but in any event, yes, I think Carter played a role in making it possible to come up to avoid a conflict and then create the basis for the negotiations that produce the Agreed Framework.”
세이모어 전 조정관은 30일 VOA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같이 밝히며 “클린턴 당시 대통령이 군사 공격을 실제로 명령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카터전 대통령이 갈등을 피하고 ‘제네바 기본합의’를 만들어내는 협상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대니얼 러셀 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30일 VOA에 보낸 이메일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전쟁 직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면서 “우리는 벼랑 끝에 서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러셀 전 차관보] “It is not hyperbole to say that it felt like the brink of war. We were right at the edge of the cliff.”
북한은 제재가 “전쟁 행위”로 간주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핵환산금지조약(NPT) 탈퇴 절차를 시작했다는 겁니다.
러셀 전 차관보는 결국 카터 전 대통령이 김 주석으로부터 핵 프로그램의 완전하고 검증된 동결을 약속받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들에게 필요한 접근 권한을 부여받기로 하면서 “즉각적인 위기는 피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러셀 전 차관보] “The immediate crisis was averted. We had been really close to a war, and Jimmy Carter saved us from that.”
세이모어 전 조정관은 카터 전 대통령의 임무는 “궁극적으로 성공적이었지만, 즉각적인 분쟁 해결의 일환으로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어떠한 제약도 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클린턴 행정부로서는 불만이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녹취: 세이모어 전 조정관] “At the time, his mission was ultimately successful, but the administration was unhappy because Carter didn’t try to get any constraint on North Korea’s nuclear program as part of a resolution of that immediate conflict.”
1994년 10월 21일 체결된 제네바 기본합의에는 북한의 핵 포기, IAEA의 사찰 허용과 미국의 북한에 경수로 2기 건설 및 연간 중유 50만 톤 공급이 담겼습니다.
하지만 2003년 합의는 파기됐고 북한은 이후 핵 개발을 쭉 이어왔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94년 이후에도 2010년과 2011년 두 차례 더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2010년 8월 카터 전 대통령은 민간 인도주의 임무차원으로 방북해 북한에 7개월 동안 수감됐던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곰즈 씨를 석방하는데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밖에 카터 전 대통령은 2011년 4월 ‘디 엘더스’(The Elders) 소속 전직 국가수반 3명과 함께 다시 북한을 방문했지만 김정일 위원장과는 면담하지못했습니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설전”
한편 대통령 선거 운동 시절부터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카터 전 대통령은 1979년 방한당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놓고 박정희 당시 한국 대통령과 설전을 벌인 것으로 양국 외교 문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밀해제된 백악관 정상회담 문서에 따르면,박 전 대통령은 회담에서 무려 40분 간 쉬지 않고 주한미군 철수 추진이 북한의 군사력 증강을 야기했다고 비판했고, 카터 전 대통령은 한국의 국방비 증액과 한국 내 인권 개선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디트라니 전 차석대사는 당시 “우리는 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있었다”면서 “한반도에서 전쟁이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녹취: 디트라니 전 차석대표] “We were normalizing relations with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There was a sense that war was not going to break out on the Korean peninsula. But, I think we all, I mean we being those people who follow developments on the on the Korean peninsula felt that was not the right decision.”
하지만 “한반도의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것이 올바른 결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디트라니 전 차석대사는 덧붙였습니다.
세이모어 전 조정관은 당시 한국의 인권 상황도 카터 전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추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세이모어 전 조정관] “One of the big thingsCarter campaigned on was human rights. And at the time, South Korea was ruled by a military government, and so, he wanted to reduce relations with countries that didn’t that were not democracies.”
세이모어 전 조정관은 “카터 전 대통령의 선거운동주요 공약 중 하나는 인권 관련이었다”면서 “당시 한국은 군사정부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민주주의가 아닌 국가와의 관계를 줄이고 싶어했다”고설명했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추진은 미국 의회와 군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무산됐습니다.
“북한과 관여해야 한다고 굳게 믿어”
카터센터의 야웨이 리우 중국 담당 선임고문은 30일 VOA와의 전화 통화에서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 문제에 적극 개입하고자 한 것과 관련해 “그는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미국 정부가 북한과 관여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리우 선임 고문] “He was the one who firmly believed in order to denuclearize the Korean Peninsula, the US government should engage DPRK. President Carter was interested in waging peace everywhere, wherever there is conflict. He didn’t believe there was the necessary need for Americans to station so many troops in so many places.”
리우 선임고문은 또 “카터 전 대통령은 분쟁이 있는 모든 곳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면서 “그는 미국인들이 그렇게 많은 군대를 여러 곳에 배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외교부는 30일 성명을 통해 카터 전 대통령의 타계 소식에 카터 전 대통령은 “특히 한반도 평화 증진에도 큰 관심을 갖고 적극 활동했다”며 애도를 표명했습니다.
앞서 카터 전 대통령은 29일 조지아주 자택에서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가장 장수한 인물로, 장례식은 오는 9일 워싱턴 DC에서 국장으로 치러집니다.
VOA 뉴스 김영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