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중학교 졸업식 다음날 점심 무렵, 18세 전주옥은 3살 터울의 오빠와 함께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드렸다. 졸업장까지 받았으니 이젠 서울로 ‘유학’을 떠날 때가 온 것이다.
부모님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꼭 무사히 한국까지 잘 도착해야 한다. 걱정 말아. 너희는 중앙당 간부 자식도 못 가는 서울 유학을 가는 거야.”
남매는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원래 압록강을 넘기로 한 시간은 밤 9시였다. 하지만 저녁에 작별 인사를 하고 나오려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아 오후에 집을 나온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걸어가는 남매를 보고 물었다.
“너희 어디 가니?”
“함흥 고모네 집에 가요.”
오후에 동네를 돌아다니던 남매는 8시가 지나자 슬슬 압록강변으로 접근했다. 나서 자란 고향마을인지라 어둠 속에서도 지형은 훤했다.
그날은 2013년 3월 18일. 계절상 봄이지만, 양강도에선 이때까지 압록강 얼음이 녹지 않는다. 하지만 낮에 얼음 위가 녹았다가 밤에 다시 살짝 얼기 때문에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목까지 물에 빠진다. 부석부석 살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어둠 속에선 크게 들렸다.
강을 건너기 전 오빠가 주옥에게 자기 가방을 넘겨주었다.
‘아니, 지금이 제일 위험한 순간인데, 오빠가 왜 자기 짐을 내게 넘겨주지?’
원망이 살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찰나 오빠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주옥아, 네가 먼저 건너가. 내가 뒤따라서 갈게.”
“아니, 여기까지 왔으면 같이 가야지. 내가 왜 먼저 가.”
“혹시 소리를 듣고 경비대가 추격해 오면 내가 뒤에서 유인할 거야. 걱정 말고 먼저 가.”
“안 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지. 난 그렇게 못해.”
“아니야, 주옥아. 난 너만 살아서 간다 해도 하나도 후회가 없어. 빨리 가.”
둘은 압록강을 건너기도 전에 5분 넘게 실랑이를 벌였다. 속삭이며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 가장 비장한 표정들이었다. 결국 둘은 함께 강을 건넜다. 다행히 추격은 없었다. 압록강을 건너 부모님이 가방에 넣어준 휴대전화를 꺼내 마중 나오기로 한 중국 브로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4시간째 브로커가 나타나지 않았다.
강을 건널 때 젖은 발부터 꽁꽁 얼기 시작했다. 마침내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지만 몸이 너무 얼어 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이렇게 얼어 죽는구나’하는 순간 차량 불빛이 나타났다.
● 완벽한 장마당 세대
전주옥 씨는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1995년 양강도 김정숙군에서 태어났다. 혜산 바로 아래에 붙어있는 김정숙군은 과거 신파군으로 불렸다. 대한민국 이북5도 행정구역 기준으로 삼수군 신파면 일대에 해당된다. 북한은 김일성의 아내이자, 김정일의 모친인 김정숙이 해방 전에 이곳에서 지하공작을 했다고 해서 1981년 신파의 지명을 김정숙군으로 고쳤다.
이 지역은 과거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먹고 보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척박한 지역이다. 추운 데다 경작지도 적어 이곳에 유배를 간 사람들은 살아나오지 못한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이곳은 김일성 시대에도 대표적인 유배지로 활용됐다.
전 씨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과거 외교관으로 평양에서 살았지만 외할아버지의 남동생이 월남한 사실이 밝혀져 이곳으로 쫓겨났다. 아무리 북한 체제를 위해 목숨 걸고 큰 공을 세워도 출신성분이 걸리는 순간 반동계급이 되는 것이다.
평양에서 추방을 당한 외교관의 딸과, 신파 토박이의 아들이 결혼해 전 씨를 낳았다. 전 씨 부친의 조상은 먼 옛날 신파에 최초로 정착한 다섯 집 중 한 집이었다고 한다.
전 씨는 태어난 순간부터 완벽한 ‘장마당 세대’였다. 장마당 세대는 태어난 이후 국가에서 배급을 받아본 적이 없는, 부모가 장마당에서 장사를 통해 먹여 키운 세대를 말한다.
고난의 행군은 북한에서 수많은 아사자를 초래한 비극이었지만, 김정숙군은 비극의 시절이 잉태한 장마당 시대에 가장 혜택을 본 지역이 됐다. 먹고 살기 위해 너도나도 밀수에 나서면서 사람 못 살 유배지였던 김정숙군은 밀수의 중심지가 됐다.
전국에서 중국으로 넘기려고 몰려온 밀수품들은 경계가 삼엄한 혜산을 에돌아 김정숙군으로 왔다. 김정숙군은 장진강과 압록강이 합류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발원해 자강도 랑림군으로 거쳐 흘러오는 261㎞ 길이의 장진강을 통해 북한 중부 내륙에서 나는 각종 농수산물이 뗏목에 실려 김정숙군으로 몰려왔다.
전 씨의 부친은 뗏목을 운영하는 유벌사업소 검척원이었다. 뗏목이 내려오면 목재 부피를 재서 보고하는 일이었는데, 밀수품을 나르려면 검척원이 눈감아주어야 할 일이 많았다. 유벌공들은 뗏목에 잣이나 약초, 버섯 따위를 마대에 잔뜩 싣고 왔다. 가끔 검열단이 들이닥치면 밧줄에 마대를 묶어 뗏목 밑에 숨겼다.
유벌공은 과거 천하고 위험한 직업이었지만, 밀수가 보편화되면서 갑자기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됐다. 전 씨의 부친도 이렇게 돈을 벌어 집안을 먹여 살렸고, 집에 LG TV를 놓을 정도로 돈도 벌었다.
● 소년단원 밀수꾼
밀수의 중심지에 살다 보니 전 씨도 학교에 입학한 8살 때부터 밀수에 가담하게 됐다. 매일 아침 단정한 교복에 빨간 넥타이를 휘날리며 학교에 갔지만, 가방 안에는 늘 밀수품이 차 있었다. 어떤 때는 잣이, 어떤 때는 폐철이나 동 또는 약초가 담겨 있었다.
장마당 옆 밀수품을 수집하는 집에 먼저 가서 가방 안의 짐을 넘겨주고 학교에 등교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하교 때도 장마당에 들러 뭔가를 나르고 집에 갔다.
전 씨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살았다. 그게 부모를 돕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학생들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밀수에 가담했다. 그렇지 않으면 먹고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 번은 학교에서 공개재판이 열려 다들 모이라고 해서 가보니 평소 말수가 없고, 어질다고 평가받던 물리 선생님이 심판대에 올라왔다. 알고 보니 물리 선생님의 부인이 학생들을 시켜 밀수품을 걷었는데, 그중에 케이블 동선이 포함돼 있었다. 북한에선 동으로 된 전화선을 밀수하는 행위는 매우 엄중하게 처벌한다.
밀수 장본인인 부인은 8년, 선생님은 남편이 모를 리가 없다는 이유로 2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것도 매우 관대하게 처벌받은 것이라고 다들 수군거렸다.
지명에 김정일 모친의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이 지역에 특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김정숙의 사적지를 보존한다면서 읍내 곳곳에 테마파크처럼 일제강점기 때 낡은 집들을 그대로 보존해 수리도 못 하게 했다.
밀수를 통해 돈을 번 사람들은 통제와 규제가 엄격한 시내와 약간 거리가 있는 변두리에 큰 집을 짓고 살았다. 돈 많은 부잣집의 특징은 담장이 너무 높아 밖에서 안을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가까이에 다가갔을 때 군견의 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전 씨도 한 번 ‘돈주’라고 불리는 부잣집 친구의 집에 들어가 봤다. 주요 가전제품은 모두 한국산이었다. TV는 로고를 떼버린 LG 제품이었는데, 전기가 없어 그냥 장식품이었다. 부잣집은 휘발유로 가동되는 발전기를 갖고 있었지만, 조명이나 노트북이나 볼 정도이지 TV를 볼 정도의 전기는 생산하지 못했다. 냉장고 역시 로고를 뗀 한국산이었지만 책장으로 쓰고 있었다. 친구는 “전기가 없어서 그렇지 냉장고는 잘 가동되는 새것”이라고 자랑했다. 한국산 쿠쿠 밥솥도 있었지만, 이 역시도 장식품에 불과했다. 삼성이나 LG 노트북만이 부잣집에서 유일하게 많이 쓰는 전자제품이었다. 노트북을 이용하면 발전기 전기로도 충전이 가능해 한국 드라마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보위부가 공급한 한국 드라마
전 씨는 인민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군마다 하나씩 존재하던 1중학교에 입학했다. 1중학교는 군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수재들을 뽑아 공부시키는 학교인데, 대학에 가려면 1중학교를 다녀야 했다. 일반 중학교에는 대학시험 자격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워낙 공부를 잘했던 전 씨는 인민학교 때부터 1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분단위원장과 사로청위원장을 도맡았다.
1중학교에 가니 학생들은 공부를 잘해서 온 소위 ‘자연수재’와 힘을 써서 들어온 고위 간부들의 자녀인 ‘인공수재’ 두 부류로 갈라졌다. 1중학교를 다녀야 대학에 갈 수 있으니 고위 간부들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녀를 이 학교에 진학시켰다.
문제는 학교에 입학해도 머리가 나쁘면 공부를 따라가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루는 같은 반, 군 보위부 최고위직 간부의 딸인 ‘인공수재’ 여학생이 말을 걸었다.
“주옥아, 너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 엄마가 너 데려오면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주겠대.”
집에 갔더니 그녀의 엄마가 안색이 환해지며 반갑게 맞이했다.
“네가 그 공부 잘한다는 주옥이구나.”
맛있는 음식들이 진짜로 한 상 가득 올라왔다. 밥을 먹을 때 엄마가 말했다.
“우리 딸 수학 참 어려워하는데 온 김에 몇 문제만 풀어주면 정말 고맙겠어.”
나중에 알았지만, 딸의 수학 점수가 나오지 않자 엄마는 공부 잘하는 주옥이랑 친해져서 공부를 같이하라고 닦달했던 것이다.
둘을 방에 공부하라고 들여보낸 뒤 엄마는 어디론가 외출했다. 엄마가 사라지자 친구가 말했다.
“수학은 무슨. 우리 영화나 볼까?”
친구가 집안의 한 장롱을 열었을 때 주옥은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장롱 안에는 온갖 한국 영화 CD가 꽉 차 있었다. 친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거 다 단속돼 압수한 거야. 우리가 봐야 저 CD가 집에서 나가. 걱정 마. 우리 집은 단속 올 일 없으니까.”
그날 주옥은 처음으로 한국 영화를 봤다. 너무 재미가 있었다. 돌아가기 전 주옥이 “하나만 좀 빌려볼 수 있을까”라고 묻자 친구가 고민하더니 “그럼 내일 무조건 갖다 놔. 없어진 거 알면 아버지한테 혼나”라며 승인했다.
그날부터 주옥은 뻔질나게 그 집으로 드나들었다. 친구의 엄마가 너무 좋아 입이 벌어진 것은 당연지사. 주옥의 가족은 매일 밤 창문에 담요를 두껍게 치고, 딸이 갖고 오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 CD를 보느라 밤을 샜다.
그런 생활은 그가 탈북할 때까지 이어졌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본 드라마는 ‘찬란한 유산’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들어오는 드라마는 항상 마지막 회가 없다. 드라마 유통업자들의 상술 때문이었다. 마지막 회는 꼭 다른 CD에 담겼는데, 마지막 회를 보려고 그 CD를 사면 뒷부분에는 또 다른 드라마 첫 회가 있었다. 결국 결말을 보기 위해 계속 CD를 사야 하는 것이었다.
주옥이 나중에 한국에 도착한 뒤 하나원을 졸업해 집과 첫 통화를 할 때였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딸의 전화에 아버지의 첫 말이 “어, 잘 도착한 건 이미 들었어. 그런데 주옥아. 찬란한 유산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니”였다.
전 씨도 하나원을 졸업하자마자 그 드라마를 찾아서 봤다.
“아버지, 한효주랑 이승기랑 키스를 했어.”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좀 자세하게 설명해봐.”
한국에 도착한 딸과 북한 아버지의 첫 통화는 그랬다. 그렇게 한국 드라마에 빠져 누구보다 한국에 오고 싶어 했던 아버지는 전 씨가 한국에 온 이듬해인 2014년 병으로 사망했다. 서울에 도착한 뒤 부모를 모셔 온다던 남매의 꿈은 3년 뒤 어머니만 서울로 오는 것으로 끝났다. 나이 50세에 한국에 온 어머니는 새로운 삶을 만끽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거의 환갑을 앞두고 있는데, 요즘 엄마는 ‘빠순이’ 삶을 즐기고 있어요.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에 빠지지 않고 피켓을 들고 찾아가 응원하고 있거든요.”
● 서울로 떠나는 ‘탈북 유학’
김정숙군에선 많은 사람들이 전 씨 가족처럼 몰래 한국 드라마를 봤다. 그가 학교에 다니던 2010년 무렵 학교에서 가장 유행했던 말은 ‘니가 가라 하와이’였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니 김정숙군 사람들은 타 지역 사람들보다 정보가 빨랐다. 김정은 집권 후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한라산 줄기가 최고지”라고 말하고 다녔다. 한라산 줄기는 가족 중에 한국에 간 사람이 있어 돈을 보내오는 집을 의미했다. 한라산 줄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우리 원수님이야 말로 한라산 줄기 원조가 아닌가”라는 말도 했다. 김정은의 모친인 고용희가 제주도 출신 집안의 재일교포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전 씨도 어쩌다 보니 한라산 줄기가 됐다. 외삼촌 가족이 탈북해 서울에 왔던 것이다. 전 씨 남매가 한국으로 오는 데는 외삼촌의 역할도 컸다.
부모가 외교관 생활을 하다가 김정숙군 임산사업소 간부로 사실상 추방돼 오자 외삼촌은 체제에 대한 반감을 갖고 컸다. 혜산농림대학을 졸업한 외삼촌 역시 수재로 소문났지만 부모 탓에 크게 승진하지 못했다. 외삼촌은 1980년대에 몰래 라디오를 조립해 한국 극동방송을 매일 빠짐없이 들었다. 탈북 출연자들을 통해 혹시 한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없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다가 대규모 탈북의 시대가 열리자 먼저 탈북한 뒤 2년 뒤 가족까지 한국으로 데리고 갔다.
한국에 온 뒤 외삼촌은 전 씨 부모에게 “똑똑한 자식을 희망이 없는 곳에서 키우지 말고 남쪽에 보내라”고 독촉했다.
김정숙군에서 전 씨 남매는 유명했다. 공부를 잘해 오빠와 누이동생 모두가 1중학교에 간 집이 흔치 않았다. 오빠는 제17차 전국학과경연대회에서 2등을 한 수재였다. 전 씨의 오빠는 1중학교를 졸업한 뒤 물리전문학교에 진학해 동생이 졸업할 때까지 기다렸다. 전 씨 역시 학교에서 학생 간부를 도맡아 했으니 마을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런 남매를 보면서 부모들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김정숙군은 북한에서도 가장 외진 곳 중의 하나였는데,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간부집 자식들처럼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잘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출신성분이 걸린 남편 때문에 함께 추방을 온 외교관 출신의 외할머니도 거들었다.
“나는 우리 손자들이 비행기 타고 다니는 게 소원이다. 그런데 그건 불가능하겠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런 환경이다 보니 전 씨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서울에 보내 공부를 시켜야겠다는 마음을 일찍이 굳혔다. 그래서 전 씨도 1중학교를 졸업하기 몇 년 전부터 “네가 졸업하기만 하면 오빠랑 서울에 보내서 더 좋은 교육을 받게 할 거야. 우리는 그 뒤에 따라갈게”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
중학교 졸업식 다음날 탈북은 오래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그래서 부모들도 작별 인사를 나눌 때 담담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이 태국에 도착할 때까지 부모들은 한숨도 자지 못했을 것이다.
탈북 시점을 졸업식 다음날로 정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얼음이 두꺼운 겨울은 밀수 시즌이라 압록강 경비가 너무 살벌했다. 잘못하면 총에 맞을 수도 있었다. 얼음이 없을 때엔 물살이 너무 세서 수영을 잘하지 못하면 익사할 위험도 컸다. 졸업식이 열린 3월 말에는 얼음이 얇아져 밀수도 거의 이뤄지지 않는데, 이때는 경비대 경비도 가장 느슨해진다. 이런 날이 1년에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에 전 씨 남매는 졸업장을 받자마자 길을 떠났던 것이다.
● “비행기 탄 줄도 몰랐어요”
외삼촌이 한국으로 오는 길을 잘 준비한 덕분에 남매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불과 일주일 만에 태국까지 도착했다.
전 씨는 나흘 동안 네 개의 계절을 모두 경험하는 신기한 경험도 했다. 떠날 때는 겨울옷을 입고 떠났는데, 하루 동안 차를 타고 달리니 개나리가 보이고 사람들이 봄옷을 입고 있었다. 전 씨는 외투를 벗어버렸다. 다시 하루를 달리니 이번엔 짧은 여름옷 차림이었다. 그래서 옷을 다시 한 꺼풀 벗었다. 동남아에 오니 이번엔 처음 경험하는 무더위가 찾아왔다.
전 씨는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폭이 좁은 나룻배를 타고 태국에 도착해 첫발을 내디디던 때를 꼽았다. 그 첫발의 촉감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외삼촌을 통해 메콩강만 건너면 절대 잡혀갈 일이 없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태국 땅에 도착했을 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환희를 느꼈습니다. ‘이제는 죽음의 굴레에서 해방됐다. 나는 겨우 18살이니 미래가 창창하다. 2400만 북한 동포들이 그토록 염원하지만, 극소수만 성공한 그 탈북을 나는 드디어 해냈구나.’ 이런 생각들이 머리에서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황홀함이나 가슴 벅차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행복함을 느꼈습니다.”
전 씨에게 있어 태국에 도착한 것은 탈북에 성공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외할머니의 소원인 비행기도 드디어 타봤다. 그런데 그때는 큰 감흥이 들지 않았다.
“비행기 타는 줄도 몰랐어요. 밤에 외국 공항에서 이리저리 안내하는 대로 정신없이 끌려다니다가 어디로 들어가더니 앉으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게 비행기 좌석인 줄 몰랐어요. 하늘에 뜨니까 이게 말로만 듣던 비행기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밤이라 밖은 내다보이지 않아서 비행기 타는 게 그렇게 좋은 건가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전 씨 남매처럼 탈북해 일주일 만에 태국까지 온 경우는 대단히 빠른,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매우 운이 좋은 경우에 속한다.
이들의 운은 하나원을 나올 때도 이어졌다. 한국에 온 탈북민들은 대다수가 서울에 집을 배정받길 원하지만, 서울에 나온 임대주택 숫자는 늘 부족해 제비뽑기로 결정한다. 전 씨가 하나원을 졸업할 때도 서울에 할당된 주택은 딱 2개였는데, 오빠가 수십 대 일의 경쟁 속에서 그 어려운 미션을 성공한 것이다.
이런 경험들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 씨는 한국에 와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됐다.
“외삼촌이 극동방송을 수십 년 몰래 듣다 보니 탈북하기 전에 이미 비밀교인이 돼 있었어요. 우리가 탈북할 때도 외삼촌은 ‘압록강에선 내가 지켜주지 못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고 와라’고 했어요. 그래서인가 압록강 넘을 때부터 ‘하나님 무사히 살려 주세요’ 이러면서 내내 왔습니다. 태국에 도착했을 때도 ‘하나님, 감사합니다’고 했고요. 그래서인지 한국에 와서 교회에 가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더라고요.”
● 한동대에서 이룬 유학의 꿈
드라마로 보던 서울과 직접 와서 보는 서울은 어떤 차이일까.
전 씨는 “보이는 것은 똑같은데, 삶은 완전히 달랐다”고 말했다. 자신들은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애기에 불과했다.
한국에 도착한 뒤 이들의 첫 미션은 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우선 한국에 도착했을 때 21세인 오빠부터 진학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아무리 북한에서 이름을 알린 수재라고 해도 한국에서 대학에 붙기는 쉽지 않았다.
수학이나 물리학은 자신이 있었지만 영어나 국어를 따라갈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오빠는 한양대에 입학해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회사를 다니다가 지금은 전업 투자자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북한에서 전국대회 2등을 한 수재가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 찾은 길은 투자자인 셈이다.
“그게 맞는 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정말 열심히 공부하면서 하는 것 같고, 돈도 버는 것 같아요. 자기 인생이니 자기가 책임져야죠.”
오빠를 대학에 입학시키고 나서 전 씨는 자신이 갈 대학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대학에 지원서를 내기 전 컴퓨터 학원이나 영어학원을 다니며 대학 과정을 따라갈 준비도 했다. 서울대가 좋다는 것은 알았지만,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공부하는 것이 뭔가 의미가 있고 가치관에도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한 대학이 한동대였고, 2016년에 국제관계학과에 입학하는 데 성공했다.
입학은 했지만 과정을 따라가긴 너무 벅찼다. 특히 한동대는 영어 수업이 많아 따라가기 힘들었다. 북한 1중학교에선 영어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영어로 전공과목을 이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전 씨는 죽기 살기로 영어에 매달렸다. 첫 학기 성적은 예상했던 것보다 만족스럽게 나왔다. 전 씨는 대학에 입학하는 다른 탈북민 학생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첫 학기는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다고 했다.
첫 학기 성적이 좋으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고, 장학금을 받으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 다음 학기도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첫 학기 성적이 나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없고, 그러면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알바를 하다 보니 공부와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선순환, 악순환의 고리가 1학기에 만들어진다는 이론이다.
그는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대학 기간 각종 공모전이나 대회에도 빠지지 않고 나가 상금도 많이 받았다. 이렇게 받은 상금을 모았다가 방학이면 영어를 배우러 외국에 나갔다. 그는 국제관계학뿐만 아니라 사회복지까지 복수 전공을 택해 모두 좋은 점수를 받았다. 한 학기도 쉬지 않고 공부에 몰두한 끝에 2020년에 학사 과정을 끝냈다.
● 전주옥의 해피엔딩
전 씨는 재작년 결혼해 지난해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최근 웹툰 회사 대표가 됐다.
한국에 유학 오는 심정으로 탈북해 웹툰 회사를 차린 까닭은 뭘까.
“2019년에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걸 보고 어떤 분이 연락을 해오셨어요. 며느리 삼고 싶다고요. 그래서 소개팅 삼아 나갔는데, 남자가 마음에 들었어요. 그가 지금의 남편이고요. 남편의 직업이 웹툰 작가랍니다.”
웹툰 작가 남편을 만나자 전 씨는 욕심이 생겼다. 평소 전 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해 돈을 벌며 사는 평범한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북한에서 신음하는 동포를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고, 그것이 자신이 한국에 온 사명이기도 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웹툰이라는 세계를 접하면서 이것이 또 자신에게 불현듯 찾아온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북한 인권이란 이슈는 나이 든 사람들에게만 통하는 올드한 느낌이 있어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웹툰을 많이 보잖아요. 그러니까 웹툰을 통해 북한 실상을 알리는 게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그림은 국경이 없잖아요. 한국 웹툰은 미국에서도 인기가 많습니다. 최근 한류가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고, K-컬처라는 말도 나오는데, 이 분위기를 타고 북한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아직 그의 회사는 정식 작품을 내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시나리오는 완성돼 가고 있다. 전 씨는 첫 작품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날 한 탈북민 대안학교에서 낯이 익은 얼굴을 만났다. 분명 같은 동네에서 살던 인민학교 동창생인 듯싶어 말을 걸려는 찰나 귀신을 본 것처럼 얼이 나가 있던 상대방이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래서 쫓아가 물어봤더니 “어떻게 죽은 사람이 여기에 와 있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사연은 이랬다. 그와 오빠가 한국에 간 뒤 몇 달쯤 지나 보위부가 슬슬 집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자식 둘이 몇 달째 사라진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부모는 결국 이들이 함흥에서 집에 돌아오다가 장마를 만나 물에 휩쓸려 죽은 것으로 이들을 사망 처리했다. 마을에선 그렇게 화제를 몰고 다니던 남매가 죽었다고 난리가 났다.
한국에 먼저 왔던 동창은 어느 날 고향집에 통화를 하다가 “야, 너랑 인민학교 같이 다녔던 주옥이 있지. 걔가 오빠랑 함흥에서 돌아오다가 홍수에 휩쓸려 죽었대”라는 말을 들었다. 너무 슬펐던 동창생은 교회에 가서 “목사님, 주옥이라는 예쁘고 똑똑한 친구가 있었는데 물에 빠져 죽었대요. 명복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했다. 그랬던 주옥이 살아서 나타났으니 그가 넋을 잃은 것이다.
전 씨의 첫 웹툰 작품은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아이들이 빠져 떠내려가고 있소”라는 고함소리가 터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전 씨의 고민은 북한 관련 웹툰이 과연 젊은 세대에게 얼마나 먹힐지 여부다. 아무리 의미 있는 작품이라도 조회수가 오르지 않으면 회사는 생존하기 어렵다.
“아마 내년쯤 물에 빠진 북한 아이들이 떠내려가는 웹툰을 우연히 접하게 된다면, 끝까지 봐주시고 북한에 사는 사람들의 삶도 서울에 유학 온 전주옥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게 빌어주세요.”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