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200회기 맞은 경기노회 세 가지 이야기 < 기획/해설 < 기사본문



한국 장로교회의 어제와 오늘 이끌어온 주역의 깊은 족적


경기노회(노회장:정명호 목사)는 올 봄 제200회 정기회를 맞이했다. 이를 기념해 4월 11일 혜성교회 언더우드기념관에서 기념예배 및 역사세미나를 개최했고, 올 가을에는 경기노회사를 발간할 계획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노회로 경기노회가 보낸 지난 112년 세월의 수많은 이야기들 중 세 가지 이야기를 다루어본다.    <편집자 주>


조국의 자주독립 위해 앞장서다


1911년 12월 4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경기노회의 전신인 경기충청노회가 조직되고, 그로부터 8년째 되는 해인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다. 3·1운동의 준비는 경기노회 소속 승동교회에서 이루어졌고, 바로 이웃한 탑골공원에서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 전도사의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만세함성이 시작됐다.


이후 전국으로 확산된 만세운동을 이끈 지도자들 중에는 경기노회 출신들이 적지 않았다. 동경에서 벌어진 2·8독립선언에서 활약한 김상덕과 김마리아, 민족대표 33인 혹은 48인으로 손꼽히는 이갑성 함태영 등이 바로 그들이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설립하여 경기노회와 깊은 유대를 가지고 있던 경신학교 및 정신여학교 학생들의 투쟁도 눈부셨다. 이밖에 안창호 서병호 김규식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경기노회와 관련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3·1운동 당시 경기노회 소속 승동교회 차상진 목사를 주축으로 한 교회 지도자들이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아 총독부에 전달한 ‘12인의 장서’.
3·1운동 당시 경기노회 소속 승동교회 차상진 목사를 주축으로 한 교회 지도자들이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아 총독부에 전달한 ‘12인의 장서’.


서울의 봉기는 3월 1일 당일로 그치지 않았다. 나흘 후인 3월 5일에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남대문에서 2차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인력거 위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행렬을 이끌던 승동교회 청년면려회장이자 연희전문학교 학생인 김원벽은 일제에 체포되어 큰 고초를 치렀다.


그로부터 또 아흐레가 지난 3월 14일, 이번에는 승동교회 차상진 목사가 선봉에 나섰다. 차 목사는 직접 총독부를 찾아가 ‘12인 등의 장서’라는 이름의 성명서를 전달했다.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 자리에서 즉각 체포된 차 목사는 8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같은 시간 종로 보신각에서는 안동교회 김백원 목사 등이 그 내용을 낭독하는 집회를 갖기도 했다.


이후에도 안동교회 유성준 장로와 남대문교회 이갑성 선생 등이 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서는 등 경기노회 인사들의 애국활동은 계속됐다.


경기노회사 집필을 맡은 총신대학교 이영식 교수는 ‘사회와 민족을 섬긴 노회’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경기노회 출신 인물들의 이와 같은 활약상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 시대 상황에서 교회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사회와 민족에 대한 책임을 감당했다고 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같은 학교 김효남 교수도 “초기 경기노회가 이 민족과 사회에서 감당했던 귀한 역할과 사역은 오늘날의 경기노회에 속한 모든 회원과 교회들에게 자부심을 불어넣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감당해야 할 사역의 중요한 지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밝혔다.


총회와 총신 이끈 지도자 대거 배출


경충노회가 제13회 총회의 허락을 받고 경기노회와 충청노회로 분립한 것은 1924년의 일이다. 이후 경기노회는 1932년 경성노회와 다시 분립했고, 일제에 의해 잠시 해체되었다가 해방 후 재건됐다. 계속해서 강원노회(1954년) 한남노회(1958년) 수도노회와 서울노회(1972) 북경기노회(1993) 등이 분립하며 현재의 모습이 됐지만, 경기노회는 언제나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의 구심점 역할을 감당해왔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바로 수많은 경기노회 출신 총회장들이다. 경기노회는 1912년 초대 총회장을 시작으로 무려 12명의 총회장을 배출했다. 제1회 총회장 호레이스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 선교사에 이어 제12회 함태영 목사(1923년), 제18회 차재명 목사(1929년), 제24회 정인과 목사(1935년)가 총회장 직을 수행했다.


경기노회 소속 원두우 목사가 초대 총회장으로 선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
경기노회 소속 원두우 목사가 초대 총회장으로 선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


1950년대에는 무려 4명의 총회장이 경기노회에서 나왔다. 제36회 권연호 목사(1951년), 제40회 한경직 목사(1955년), 제41회 이대영 목사(1956년), 제42회 전필순 목사(1957년) 등이 그 주인공이다. 그 후에도 제55회 김창인 목사(1970년), 제70회 박명수 목사(1985년)가 총회 수장 역할을 감당했다. 이기풍 목사나 이영수 목사처럼 경기노회를 거쳐 간 인물들까지 합치면 전체 숫자는 더욱 늘어난다.


이들은 각자의 시기에 교단 수장으로서만 아니라 한국교회 나아가 대한민국 전체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훌륭히 역할을 수행하며 경기노회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러나 경기노회를 빛낸 존재가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교단 신학의 요람인 총회신학교의 발전에 공헌한 인물들도 빼놓을 수 없다.


1972년 총회신학교 제2대 학장으로 취임한 김희보 목사는 총신이 정규대학으로 자리 잡고 발전해나갈 수 있도록 리더십을 발휘했고, 1989년 총신 재단이사장에 선출된 승동교회 김인득 장로는 자신의 사재를 학교에 기부하며 총신 사당캠퍼스와 양지캠퍼스 조성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안양대학교 이은선 교수는 ‘경기노회의 총회 지도자들과 총신 지도자들’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거두들에 대해 상세히 소개한 바 있다.


이은선 교수는 200회기를 맞은 경기노회가 “노회역사를 정리하며 재도약을 할 때 미래를 제대로 설계하고 총회를 이끌어갈 역량을 육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시 총회를 이끌어갈 지도자, 총신의 발전에 기여할 인재들이 경기노회를 통해 배출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여기에 담겨있다.


교단분열 격동기의 한 가운데 서다


1938년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이어 선교사들이 철수하고 평양신학교가 폐교하는 암흑기 속에서, 김대현 장로 등 경기노회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어 1940년 4월 19일 승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를 개교한다.


하지만 해방을 즈음하여 조선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 파동에 휩싸이고, 1947년에는 이에 반발하는 51인 신앙동지회의 진정서 사건이 발생한다. 결국 이 사태는 한국의 장로교회가 예장과 기장, 개혁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으로 분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경기노회 총대 사건과 WCC 파문으로 크게 요동친 제44회 총회의 모습.
경기노회 총대 사건과 WCC 파문으로 크게 요동친 제44회 총회의 모습.


당시 경기노회는 자유주의 신학의 핵심인물이자 소속 노회원이던 김재준 교수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다. 비록 처음에는 김재준 교수에 대한 면직지시를 결의한 제37회 총회의 결정에 반발하는 모양새를 취했으나, 결국 1953년 제62회 정기회에서 김 교수의 제명을 의결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수호하는 입장에 선다.


이 같은 양상은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문제로 총회가 크게 갈등한 1960년에 재연된다.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린 제44회 총회에 경기노회 총대명단이 이중으로 제출되는 사건이 발생하며, 노회는 다시 태풍의 중심에 선다.


경기노회 제72회 정기회에서 WCC 가입을 반대하는 인사들이 총회총대 다수로 선출되었던 결과가, 개표 오류 시비 속에서 임시회에 다시 실시된 선거를 통해 거꾸로 뒤집어지며 걷잡을 수 없는 격랑을 야기했다.


그해 총회는 투표까지 거치며 최종적으로 경기노회 정기회가 아닌 임시회의 결과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은 사태를 진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반목을 야기하고 말았다. 계속된 논란 속에서 총회는 WCC 가입을 반대하는 승동 측과, WCC 가입을 찬성하는 연동 측으로 나뉘었고 결국 예장합동과 예장통합으로 교단이 분열하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그 당시 경기노회원 대다수가 개혁주의 신학 편에 서고자 했던 의도는 정기회 투표로 분명히 드러났지만, 한편으로 이 결과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 아쉬움도 크다는 게 역사의 평가이다. 


광신대학교 김호욱 교수는 ‘예장의 개혁주의 신학 수호를 위한 경기노회의 역할’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한 바 있다. 김 교수는 “경기노회는 그 당시 ‘장로교의 뿌리와도 같은’ 노회였으며, ‘한국교회의 커다란 물줄기’ 같은 매우 중요한 노회였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앞으로도 “개혁주의 신학 수호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사명감을 깊이 인식해 주기”를 경기노회에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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