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엄마와 소피야, 둘이서 가야 해. 알겠지?”
“아빠…. 안녕.”
우크라이나인인 예프레모바 소피야 양(15)은 올 3월 1일 몰도바 국경에서 아버지와 생이별했다. 소피야 양은 러시아 침공을 피해 어머니, 아버지와 차를 타고 고향인 남부 항구도시 미콜라이우에서 국경까지 약 300km를 달려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국경을 함께 넘는 대신 집에 혼자 남은 할머니를 돌봐야 한다고 했다. ‘어서 가라’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짓던 아버지는 지금 포탄과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우크라이나에 있다. 고려인인 소피야 양과 어머니는 한국으로 피란했다. 소피야 양은 지금 경기 안산시 선일중 다문화 예비학교에 다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00일(3일)을 앞두고 전쟁이 뒤바꾼 소피야의 삶을 일기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2월 24일, 그날: 폭발음으로 시작된 전쟁
오전 5시 20분쯤이었다. 엄마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 잠에서 깼다. 엄마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뭔가 ‘펑펑’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얼마 뒤 휴대전화가 울렸다. “폭탄 소리를 들었다”는 친구들의 메시지였다. TV를 켜자 전쟁 뉴스가 흘러나왔다.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엄마에게 “이렇게 죽어야 하냐”고 물었다. 그날 학교 수업은 온라인으로 진행됐지만 아무도 집중하지 못했다. 주말에 같이 햄버거를 먹기로 한 친구들이 모인 온라인 메신저 대화방은 순식간에 전쟁 뉴스 링크로 채워졌다. 한 친구가 “우리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2월 28일, 5일째: “얼른 짐 싸!”
“우크라이나를 탈출해야 해. 얼른 짐 싸.”
엄마 말씀을 듣고 등교 가방에 옷과 화장품을 담았다. 아침 9시에 아빠 차를 타고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몰도바로 향했다. 출발한 지 한참 뒤, 집에 곰돌이 인형을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5살 때부터 밤마다 끌어안고 잤던 인형이었다. 눈물이 찔끔 났다.
3시간이면 도착하는 몰도바지만, 12시간이 지나서도 여전히 우크라이나였다. 경찰관은 수시로 차를 세워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도로에는 피난을 떠난 차들이 긴 줄을 이뤘다. 오후 7시가 지나서는 도로 통행 자체가 금지됐다. 급히 잡은 낯선 호텔에서 하루를 묵었다. 집에 두고 온 곰돌이 인형이 생각났다. 눈물을 꾹 참았다.
사흘 전 폭탄을 피해 아파트 지하 벙커에서 만났던 친구 블라다가 떠올랐다.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작별인사라도 했을 텐데…. 마음에 걸렸다.
●3월 1일, 6일째: “아빠 안녕”…7개국 거친 피란길
꼬박 하루를 걸려 넘은 몰도바 국경에서 아빠와 헤어졌다. 아빠는 할머니가 계신 우크라이나에 남겠다고 했다. 평소라면 가족과 절대 떨어지지 않을 아빠였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엄마와 나를 향해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3월 24일. 29일째: 낯선 한국에
6개국을 거치며 1만5300km를 여행한 끝에 한국에 도착했다. 집을 떠난 지 거의 한 달 만이었다.
몰도바에서 엄마는 외할머니와 외삼촌이 사는 한국으로 갈 거라고 했다. 운 좋게 만난 엄마 직장 동료 차를 얻어 타고 계속 서쪽으로 달렸다. 차를 많이 타 심하게 멀미가 났다. 루마니아,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지나 대모(代母)가 사는 포르투갈에서 18일 머문 뒤 다시 프랑스를 거쳤다. 엄마는 “이렇게 세계 여행의 꿈이 이뤄질 줄 몰랐다”고 농담하며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동안 살이 많이 빠졌다. 우크라이나에 두고 온 가족과 친구들 걱정에 입맛이 없었다. 가져온 바지가 헐렁했다. 공항에 마중 나온 외삼촌 얼굴을 보자 ‘드디어 도착했구나’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 안전하다’는 기분도 들었다. 7개국을 거친 긴 여정의 끝이었다.
외삼촌이 사는 안산시로 이동했다. 이곳은 평화로웠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 말고는 큰소리가 없었다. 몸은 편안했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고향 생각이 자꾸 났다. 다들 무사할지 계속 걱정됐다. 안산시로 가는 내내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4월 5일. 41일째: 첫 등교
오늘은 한국에서의 첫 등교날이었다. 안산시 선일중학교로 향했다. ‘친구들이 나랑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에 어제 잠도 못 잤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친구들에게 “등교하기 무섭다”고 메시지도 보냈다.
한국어 수업에서 나란투야를 만났다. 러시아에서 온 친구였다. 처음 만났는데도 말이 잘 통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한국에 왔지만 친구가 밉지는 않았다. 전쟁은 높은 사람들이 일으킨 거지, 나란투야가 일으킨 게 아니니까. 친구가 생기니 마음이 든든하다.
●5월 6일, 72일째: ‘절친’은 러시아인
요즘 우리 학교에서는 친한 친구끼리 우정의 표시로 슬리퍼를 한 짝씩 바꿔 신는 게 유행이다. 2주 전에는 나란투야와 분홍색 슬리퍼를 바꿔 신었다.
●6월 1일, 98일째: 보고 싶은 아빠
우크라이나의 친구가 폐허가 된 미콜라이우 사진을 보내왔다. 끔찍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미콜라이우 유치원이 있는 주거지에 러시아군 포탄이 떨어져 최소 1명이 죽고, 6명이 다쳤다”고 했다.
전쟁 다음 날 아파트 지하 벙커에서 만났던 친구 블라다는 오스트리아로 갔다. 며칠 전 군인이신 블라다의 아버지가 전쟁으로 인해 건물이 무너져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우크라이나에 계신 아빠와는 매일 밤 연락을 주고받는다. 아빠가 많이 보고 싶다. 전쟁이 조금 수그러들면 아빠도 한국으로 오신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새벽에 아빠에게 이런 문자가 왔다. “토끼(아빠가 나를 부르는 애칭)야 사랑한다. 엄마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 뽀뽀를 보낸다. 잘 자.” 보자마자 답장을 보냈다. “나도 사랑해요.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아빠.”
안산=전혜진 기자 sunris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