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나비] 2022년 고난주간 묵상문 : 목회/신학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십자가 일몰 겸손 헌신 실루엣 사람의 무릎을 꿇 고 무릎 기도 믿음 종교 교회

▲ⓒ픽사베이


예수 그리스도는 코로나로 고통당하는 지구촌과 우리 사회의 고통, 침공과 학살을 당한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난 속에 함께하신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신자는 예수님을 따라서 사회와 세계의 고난에 참여하고 저들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자와 피난처가 되자.

고난주간은 기독교에서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기독교에 있어서 중요한 경건과 근신과 자숙의 기간이다. 2천년 전 유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예수님께서 민중의 선동자요 로마 체제의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로마당국에 의하여 체포되어 유대법정에서 종교적인 심문을 당하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하여 사형 선고를 받아 성금요일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었다.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오늘날 기독교인의 고난 주간의 명상과 기도 속에서 우리 가운데 말씀과 성령의 임재로써 현재화 한다. 그분은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이제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 고난주간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되돌아 보면서 자신들이 저지른 죄와 허물을 성찰하고 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예수님의 고난을 회상하며 우리 인간을 향한 기대를 묵상하는 2022년 고난주간에 우리 사회에서는 오미크론 스텔스에 의하여 지난 4월 5일 기준으로 하루 확진자 수가 28만 명, 중환자 수가 1,121명, 이 중 209명이 목숨을 잃었다. 4월 9일 기준 코로나 사망 96%가 60세이상 고령층이며, 전연령층의 확진비율도 23%로 계속 증가하고 있다. 기존 오미크론 변이와 스텔스 오미크론이 조합된 오미크론 신규 변이 XE 감염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동유럽에서는 침략자 러시아 군대에 의하여 고난당하는 우크라이나 부차(Bucha) 등 키이우 주변도시에서 4백여 명 무고한 시민들이 러시아군에 의하여 집단 학살된 끔찍한 사실이 지난 4월 초 이래 잇달아 보도되고 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학살 소식에 경악하며 그 유족들을 위로하며 기도하는 고난주간이 되어야 하겠다.

샬롬나비는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성경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고난을 회상하며 그 의미를 묵상하면서 다음 자기 성찰과 묵상문을 올린다.

4복음서를 읽으며 이천년 전 그 때 유대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회상하게 된다.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사로잡히심, 밤새껏 끌려 다니시면서 심문을 당하고 결국에는 십자가형을 선고 받으심, 십자가에 못 박히심 등. 성경이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내용이다. 2800년전 구약 이사야 선지서를 읽으며 예수님께서 당하실 고난이 예언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1.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위한 고난, 그의 십자가 달리심과 죽으심은 대속의 죽음이었다

신약 사도 서신서를 읽으며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영적 의미를 알게 된다. 예수님의 고난은 자기의 허물이나 죄악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다. 그 고난은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다. 그 고난은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시려는 희생이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b). 그 고난은 우리 죄를 담당하신 것이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a). 고난의 절정인 죽음은 우리가 죽을 죽음을 대신 죽어주신 대속의 죽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 12).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히 9:28).

2. 예수 그리스도는 코로나로 고통당하는 우리 사회의 고통, 전쟁과 학살을 당한 우크라이나 고난 속에 함께하신다.

2020년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이 지난 2년 4개월 동안 우리 인류사회를 고통 속에 몰아넣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연히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과학기술문화로 교만해진 우리 인류를 향하여 주시는 사랑의 경고다. 우리 인류가 문명의 오만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게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환경을 파괴하고 남용하여 야생 동물에 기생하는 박테리아와 세균들이 야생 서식지 파괴로 인하여 인간이 저들의 지역을 침범함으로써 인수공통전염병이 창궐하게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되돌아 보아야 한다. 고난 주간을 맞아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 겪으신 고난을 회상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바라시는 주님의 기대 또한 기억해야 하겠다.

3.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모범이다.

코로나 19의 현실은 코로나 이전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말았다. 지극히 평범하던 일상이 다시는 회복될 것 같지 않은 현실이다. 목숨을 위협 받는 이런 현실도 주님 없이 맞으면 나 홀로 살아남기에 온통 주력할 것이다. 하지만 주님 모신 성도의 삶은 고통의 현장 속에서도 처한 주변 현실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낯선 위기 앞에서 주님 모신 성도의 참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예수님의 고난과 관련된 사복음서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우리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주님께 여쭙게 된다. “왜 무엇 때문에 저 같은 자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는지요?”라고. 그런 질문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이미 성경에 기록해두셨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4b). 그렇다. 우리로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심이다.

또 다른 구절에서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10)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임 당하신 것은 ‘당하신’ 것이기보다 오히려 ‘향하여 나아가신’ 것이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요 10:17, 18)

이런 유의 말씀은 계속된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전 5:15). 그렇다. 이유 없는 고난이 아니다.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다. 분명한 의도와 목적이 있는 고난이요 죽음이다. 삶의 관심이 바뀌는 것이다. 본성적으로 자기를 위하는 자가 주를 위하는 자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생활이다.

4. 환경 위기 속에서의 환경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우리의 삶을 성찰하자.

창조세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인류의 책임은 작지 않다. 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각자 혹은 각 기업 그리고 각국이 가지는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환경오염은 더욱 심각해지고 그에 다른 심각한 기후의 이상 변화를 겪고 있다. 이런 현실을 주님 없이 맞으면 자칫 나만 생각하는 삶이 되기 십상이다. 종교와는 무관하게 합리적인 차원에서 전 지구 차원의 환경을 의식하며 사는 모습은 귀하게 여겨진다. 창조의 주님을 모신 신자가 창조세계에 대한 배려 없이 전 지구 차원의 환경에 대한 관심과 의식 없이 산다면 그것은 아쉬운 모습이다. 주님 모신 성도의 삶은 당연히 나와 동시에 이웃과 주변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5. 우크라이나 전쟁 속에서 참혹한 침략을 당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고통에 구제와 묵상으로 참여하고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

러시아 푸틴의 제국주의 망상으로 인한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 소식은 우리로 하여금 70여년 전 소련과 중공에 의해 사주(使嗾)되어 북한 공산군이 기습 침범하여 일어난 한국전쟁을 생각하게 한다.

한국전쟁으로 6백만 인명이 희생되었고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수백만의 피난민, 과부, 고아들 생겼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군대의 무차별 폭격과 총격에 의하여 키이우 주변도시 부차(Bucha), 마카리우(Makariv) 등지에서 수많은 민간인 집단 학살 시신들이 나오고 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 군대가 저지른 학살 참상은 지옥 그 자체다. 푸틴이 오도하는 러시아 국가의 종말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한 독재자의 부당한 욕망이 상대 나라와 자신의 국가 모두 파멸로 내모는 모습이다. 이러한 만행으로 러시아는 국제사회에서 비난 받아 유엔 인권국에서 퇴출되었다. 러시아 푸틴 정권이 광기에서 벗어나 우크라이나에서 퇴각하여 전쟁이 종식되고 동구(東歐)에 평화가 회복되기를 기원한다. 전쟁범죄자는 응징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고 악이 징벌로 다스려지기를 기원한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시면서 우리 성도들에게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고난받는 자를 위로하라 말씀하셨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4-15). 우리는 우크라이나 국민과 함께 울고 저들의 고난에 동참하여 저들에게 구제물자를 보내며 그들을 위로하며 저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겠다.

6. 오늘날 한국교회와 신자는 주님을 따라서 사회와 세계의 고난에 참여하고 저들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와 피난처가 되자.

이전에 주님 없이 살던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제는 이웃의 짐을 함께 지고 타자(他者)를 향하여 사는 새로운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바울 사도께서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교훈서신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이 고난주간, 한국교회와 신자들은 이 세상에 주님이 남겨놓으신 고통의 짐을 지는 세상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한국교회와 신자들은 더욱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고난받는 이웃들의 어려움에 동참해야 하겠다. 우리의 의롭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을 내려다 본 교만과 오만 철저히 회개하고 자신의 탐욕과 자기애를 십자가에 못박는 삶이 있어야 하겠다. 고통 속에 있는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고 저들에게 필요한 물자와 사랑의 위로를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다.

2022년 4월 11일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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