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낮 12시40분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대학교 교직원 A씨에게 문자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자신을 부총장이라 소개한 이는 “외국 학생을 추가로 유치하고 싶다”며 학과에 중국인 유학생과 조교를 소개해달라고 요청했다.
처음 보는 교수 연락에 A씨는 미심쩍었지만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실제 현직 부총장 이름과 같았다. ’회의 중이니 카톡으로 연락달라‘는 전화 속 점잖은 목소리에 A씨는 중국인 유학생과 조교들의 연락처를 넘겼다.
’부총장‘은 중국인 조교 B씨에게 메시지를 보내 “중국 계좌로 위안화 송금을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다”며 5만 위안(약 931만원)을 환전해달라고 요청했다. “수중에 200위안(약 3만7000원)밖에 없다”며 거절하자 “석박사 과정생에게 알아봐달라”고 재차 부탁했다.
수상함을 느낀 A씨와 B씨가 실제 부총장에게 해당 사실을 알리고 확인해보니, 이들이 받은 메시지는 ’메신저 피싱‘(스미싱)이었다. 범인이 교수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캡처해 자신의 카카오톡에 걸고 교수를 사칭해 돈을 요구한 것이었다. A씨 학교에서만 두 번째 피해 사례였다. 범행을 들킨 범인은 순식간에 이름을 바꾸고 사라졌다.
◇교묘해진 보이스피싱…“접종 전 검사 받으세요”
보이스피싱 범죄 수법이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최근 대학가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교수를 사칭한 스미싱부터 취준생이나 자영업자를 노린 맞춤형 사기, 백신 예약·재난지원금 지급 등 코로나19 상황을 악용한 사기 등도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직장인 윤진이씨(33·가명)도 최근 ’[질병관리청] 신체검사 진단서‘란 문자 메시지를 받고 링크를 눌렀다가 졸지에 금융사기 피해자가 됐다. ’아차‘하고 화면을 닫았지만 이미 휴대전화 콘텐츠이용료 60만원이 결제된 뒤였다.
윤씨는 “보이스피싱은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코로나19 이후 정부에서 보내는 문자가 늘어났고, 마침 백신 접종 전날이어서 깜빡 속았다”며 “다행히 돈을 돌려받았지만 환불 처리를 기다리는 2주 동안 밤잠을 설쳐야 했다”고 털어놨다.
몇 년 전만 해도 보이스피싱 범죄 방식은 비교적 어설퍼 쉽게 들통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빼돌린 피해자 정보를 이용해 맞춤형으로 접근하고, 070에서 010으로 번호를 바꿔주는 변작기 탓에 피해 사실을 알아채기 어려워졌다.
보이스피싱으로 인한 피해는 경찰의 예방·검거 노력에도 쉽사리 줄어들지 않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20년 보이스피싱 범죄건수는 3만1681건, 피해액은 약 7000억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피해액 기준으로 최근 5년간 5배 증가한 것이다.
모든 연령대에서 피해가 늘어나는 가운데 특히 20대 젊은층의 피해 증가율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 20대 피해자는 2018년 27건에서 2020년 321건으로 12배가량 증가했다.
20대는 피해뿐 아니라 범죄 유혹에도 많이 노출돼있다. 최근엔 보이스피싱 조직이 중소기업처럼 채용을 전문화하고 있어 택배·경리 아르바이트로 속아 범죄에 가담하는 대학생들도 늘고 있다. 지난해 ’경찰학연구‘에 발표된 ’보이스피싱 전달책의 가담경로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전달책은 10~20대가 77%를 차지했고, 절반 이상(50.6%)이 초범이었다.
이는 금융권의 보이스피싱 예방 제도가 강화돼 계좌이체를 통한 범죄(계좌이체형)가 어려워지자 피해자를 직접 만나 돈을 받아오는 ’대면편취형‘으로 범행 수법이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계좌이체형은 2018년 3만973건에서 지난해 1만822건으로 급감한 반면, 대면편취형은 같은 기간 2547건에서 1만5111건으로 6배 가량 늘었다.
◇경찰 보이스피싱과의 전쟁 선포…검거 TF 구성
이에 경찰은 보이스피싱 특별전담조직(TF)을 구성하고, 해외에 전담 주재관 ’코리안데스크‘를 추가로 파견하는 등 집중 수사에 나섰다. 보이스피싱 사례·수법을 종합·분석·연구하는 컨트롤타워 ’보이스피싱 종합대응 시스템‘도 가동 중이다.
적극적인 대책의 결과 피해금 환급률도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2016~2019년 20%를 맴돌던 보이스피싱 피해 환급률도 48.5%를 나타냈다.
또한 특별단속기간(2021년 2~6월, 8~10월) 동안 조직원 1만4980명을 검거했는데 이는 전년 동기(1만1872명) 대비 26.2% 증가한 수치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관계자는 “특별자수 기간과 범행 수단 단속 등 새로 도입한 제도가 현장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큰 틀의 정책기조를 유지해 차단을 지속하는 한편, 연초 고도화·지능화하고 있는 범행 수법을 새로 분석해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방청에 전문 인력 배치…주요 5개국에 ’코리안데스크‘
실제 보이스피싱을 전문으로 하는 팀장급 인사를 지방청장으로 발령, 수사대를 강화해 의미있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부산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가 무등록 휴대폰 판매점을 운영하며 베트남·태국 등 외국인의 위조여권을 이용해 선불 유심 5000개를 개통한 뒤 보이스피싱 조직 등에 판매한 106명을 적발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울산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도 지적장애인·노숙자·신용불량자에게 돈을 주고 명의를 빌려, 유령법인 200개를 설립하고 유령법인 명의로 대포폰 5000대를 개통한 뒤 보이스피싱 조직에 공급한 피의자 11명을 검거했다.
해외 수사기관과도 적극 협력할 방침이다. 경찰은 이를 위해 필리핀·중국·태국·베트남·캄보디아 등 5개국에 ’코리안데스크‘를 파견해 운영하고 있다. 해외 도피 사범의 73%는 해당 5개국에 몰려있다.
코리안데스크는 필리핀 한인을 상대로 한 강력범죄를 해결하고자 2012년 설치된 수사기관으로, 작년 기준 7명의 경찰관이 필리핀에 파견돼 있다.
지난해에는 중국·태국·베트남·캄보디아에 각 1명씩 보이스피싱 범죄를 전담하는 ’코리안데스크‘를 파견해 해외 특별 신고·자수 기간을 운영했다.
이 기간 필리핀에서 1세대 보이스피싱 조직 ’김미영 팀장‘ 조직원 8명을 검거하고 2명이 자수하는 등 성과를 거뒀다. 오랜 해외 도피 생활로 지친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이 귀국을 원해 자수하거나 조직을 신고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수본 관계자는 “현지 사건·사고를 처리하고 교민 보호업무를 해야하는 경찰 주재관과 달리, 보이스피싱 범죄에 집중할 수 있는 코리안데스크는 국외 도피사범을 현지 기관과 협업해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많다”며 “인사혁신처, 행정안전부, 기획재정부 등 예산 부서에서 지원을 늘려 코리안데스크가 확대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 경찰은 5억원이 넘는 보이스피싱 사건은 국수본에 보고를 의무화하고, 보이스피싱 사건이 접수되면 담당 수사관이 형사사법정보시스템(KICS·킥스)으로 피해신고서를 작성해 해당 내용을 보고해야 하는 지침도 새로 마련했다.
국수본 관계자는 “중요 사건 보고를 철저히 하라는 취지”라며 “본청에서 데이터를 통합 관리해 중요한 보이스피싱 사건을 더 꼼꼼히 살피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정부와 의회, 금융기관에서도 보이스피싱 범죄 근절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 중이다.
정부는 금융사에 보이스피싱 배상책임을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금융위원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관계 부처는 피해자의 고의·중과실이 없는 경우 원칙적으로 금융사가 배상 책임을 지도록 통신사기피해환급법 개정할 계획이다. 또 일정 규모 이상의 금융회사는 의무적으로 이상 금융거래를 탐지하는 시스템(FDS)을 구축해야 한다.
금융당국이 보이스피싱에 대한 배상 책임을 은행권에 부과하는 방안을 추진하자 은행에서도 자체적으로 여러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KB국민은행은 ’AI 기반 보이스피싱 차세대 모니터링 시스템‘을 구축해 시행 중이고, 우리은행은 작년 7월 악성 애플리케이션에 의한 전화 가로채기 방지 시스템을 도입했다.
신한은행은 ’안티 피싱 플랫폼‘을 고도화했다. 하나은행의 경우 악성앱이 설치된 고객의 이체와 출금을 즉시 정지시킨 후 알림을 발송하거나 직접 연락해 사기 피해를 예방하고 있다.
의회에선 보이스피싱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이 법이 통과되면 최대 1억원이었던 처벌 수위가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으로 크게 높아지게 된다. 부당 취득한 수익에 대해서도 최소 2배 이상 벌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주범은 해외에…국가간 수사공조로 소탕해야”
전문가들은 국제 수사기관과 공조를 주문했다.
임종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범죄 수익을 암호 화폐로 바꾸는 경우가 많아 추적이 어렵고, 변작기로 번호를 바꿀 수 있어 여러모로 범죄환경이 좋아진 상태”라고 진단했다.
임 교수는 “조직의 근거지는 주로 중국 등지에 몰려 있는데, 국내 활동 중인 말단 조직원들만 검거해서는 문제 해결에 한계가 있다”며 “중국 등 해외 수사기관과 공조해 주범을 잡아야 보이스피싱 범죄를 근절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기술적으로 보이스피싱을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금융기관과 협조해 대포통장 거래를 차단하고, 평소에도 국가 간 보이스피싱 수사 관련 정보를 교류하는 협력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범인 검거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피해자 예방 교육에 힘 써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관계 당국에서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보이스피싱 위험성 예방·교육·홍보 활동을 하고, 피해보상과 관련한 법제도 도입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도 “보이스피싱 수법을 계속 홍보해 시민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고, 개인정보를 요구해도 응하지 않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또 대포통장과 대포폰을 단속해서 인프라를 제거해야 한다. 무엇보다 피해자가 속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경찰은 하반기 신설된 특별 TF를 기반으로 ’보이스피싱 범죄와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일 에정이다.
김창룡 경찰청장은 앞서 국정감사에서 “사이버범죄가 급증하는 가운데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등이 서민경제를 침해하고 있다”며 “법을 어기면 반드시 처벌된다는 인식을 사회 전반에 확산해 국민들이 억울하게 눈물 흘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서울=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