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윳빛’ 갈라디아, 터키 수도 앙카라를 향해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찾아서 140] 제3차 전도여행(27) 갈라디아(1)

갈라디아 왕국, B.C. 64년 로마로
비잔티움 제국 통치도 오래 받아
1923년 케말 터키 공화국 수립 후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앙카라로
바울, 기독교인들 위해 방문 짐작
갈라디아 중심지 앙카라도 방문?


▲율리아누스 황제 기념탑.

▲율리아누스 황제 기념탑.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사도행전 18장 23절)”.

‘백색’ 또는 ‘우윳빛’이라는 의미를 가진 갈라디아(Galatia)는 튀르키예 중북부 지명인 동시에 큰 부족의 이름이다. 기원전 4세기 남부 프랑스에 거주하던 켈트(Celts)족 일부가 동쪽으로 이동해 오늘날 터키(튀르키예)의 아나톨리아 고원 중북부 지역에 정착해 유럽 밖에 가장 큰 켈트족의 정착지를 만들었다.

아나톨리아에 온 켈트족의 후손들은 갈릭(Gallic) 부족을 만들어 기원전 280년경부터 기원전 64년까지 현지에 갈라디아 왕국을 만들었다. 당시 갈라디안 시대(Galatian period)에 갈라디아의 중심지는 앙크라(Ancyra)로서 갈라디안 민족을 구성하는 3개 부족 가운데 하나인 텍토삭(Tektosag) 부족이 거주하였다.

로마에 점령된 갈라디아는 기원전 25년에는 로마의 속주(屬州)가 되었다. 앙크라는 속주의 수도로서 아나톨리아 고원의 중심이었다. 그 후 앙크라는 앙카라(Ankara)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앙카라는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도 오랜 기간 받았으므로 오늘날 앙카라 시내의 중심에는 로마 시대의 유적이 많다.


▲앙카라 시내 기독교인 묘지 비석들. 비석에 새겨진 얼굴의 눈은 모두 긁어서 없어졌다.

▲앙카라 시내 기독교인 묘지 비석들. 비석에 새겨진 얼굴의 눈은 모두 긁어서 없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프랑스·미국 등 연합국이 승리하자 독일과 오스트리아 편에 섰던 튀르키예(오스만 제국)는 패전국이 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뒤를 이어 1923년에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때 초대 대통령인 아타튀르크 케말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옮겼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앙카라는 성과 그 주변에 로마 시대의 유적이 많고 현재도 계속 발굴 중이다. 시내 한가운데 솟아 있는 언덕 위에는 로마 시대에 만든 성벽이 아직도 그대로 있다.

이른 아침에 이곳을 올라가다가 언덕을 오르는 계단 위에서 값싼 양말 한 무더기씩을 양손에 쥐고 내려오는 남자들 여러 명과 마주쳤다. 이들 가운데는 수도 시설이 제대로 없던 1960년대, 우리가 서울에서 어린 시절 보던 물지게 모양의 기구 양쪽 끝에 큰 양말 뭉치를 걸고 내려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이들은 시내 도로에서 양말을 풀어놓고 팔면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행상임을 알 수 있었다. 이 모양을 보고 필자는 의아심이 생겼으나 잠시 뒤 언덕 꼭대기에 올라가서 보니 그 의아심이 풀렸다.


▲앙카라 성.

▲앙카라 성.


언덕 꼭대기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속에 빈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아침 일찍부터 양말을 한 무더기씩 들고 시내에 팔러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애처롭게 보여 좀 사주고 싶었으나, 여행 중 짐이 늘어날 것 같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시내에는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Julianus)의 앙카라 방문을 기념해 서기 362년에 세운 기념탑이 있는데, 2001년 앙카라 시에서 다시 복원을 하였다. 시내 한가운데는 1930년대 말 앙카라 기차역 공사를 위해 땅을 파던 중 우연히 발견한 비잔티움 시대의 공동묘지가 있다.

이곳에 있는 묘비에 새겨진 기독교인 얼굴의 눈도 모두 부서지거나 긁혀서 없어져 버렸다. 이슬람교인들이 악마의 눈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곳에도 기독교인들이 있어,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 때 이 근처를 지났으므로 이곳을 방문하였던 것 같다.

사도행전 18장 23절을 보면 바울이 갈라디아의 중심지인 앙카라도 방문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때를 서기 49년경으로 보고 있다.


▲아타튀르크 케말의 기마상. 앙카라 시내.

▲아타튀르크 케말의 기마상. 앙카라 시내.


즉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을 끝내고 안디옥에 돌아 온 이후인 서기 49년경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에 썼다고 하나, 연도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권주혁 장로

세계 145개국 방문
성지 연구가, 국제 정치학 박사
‘권박사 지구촌 TV’ 유튜브 운영
영국 왕실 대영제국 훈장(OBE) 수훈
저서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찾아서>, <사도 베드로의 발자취를 찾아서>, <여기가 이스라엘이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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