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월, KDI 국제정책대학원에서 첫 베트남 출신 교수가 탄생했습니다. 주인공은 팜 트린 교수(31)입니다.
‘동남아시아 국가 출신의 교수님’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러라는 법은 없습니다. 인구 1억 명, 평균 연령 32.5세의 베트남은 이미 성장 잠재력이 큰 국가로 평가받고 있고요. 학구열이 높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베트남의 한 시골 마을 출신이 미국 코넬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서 교수로 임용되는 과정 중에는 때때로 불편함과 좌절을 감내해야 하는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주 〈브렉퍼스트〉팀은 팜 교수의 성장 스토리를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손빨래하며 유학 생활한 10대 소녀
팜 교수의 ‘유학’ 생활은 중학생 때 시작됐습니다. 베트남 중남부 지역인 람동(Lam Dong)성의 농업 지역 ‘바오람(Bao Lam)’에서 나고 자란 그는 14세 무렵 부모님을 떠나 고향에서 20㎞ 떨어진 ‘바오록(Bao Loc)’으로 이동했습니다.
같은 성(省) 내 지역이었지만, 바오람과 바오록의 환경은 천지 차이였습니다. 그의 고향 바오람은 차와 커피를 재배하는 시골. 학교 선생님이 전학을 온 팜 교수에 대해 학생들에게 소개할 때 ‘산골에서 왔다’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반면 바오록은 차 재배 외에도 관광과 소규모 제조업 등의 산업을 영위하는, 지역경제 규모가 더 큰 도시였고요. 그만큼 교육 여건도 달랐습니다. 바오록은 교육의 질이 높고 장학금 등 더 많은 교육적 혜택을 얻을 수 있었고요.
바오록에서 그는 외가 식구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바오록에서 고향까지의 거리는 서울의 동서 간 거리(약 36㎞)의 절반 수준이었지만, 대중교통이 열악해 체감 거리는 훨씬 길었습니다. 그나마 고향집에 갈 수 있는 때는 많게는 일주일에 한 번. 어머니가 운영하는 가게에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러 아버지가 도시로 나올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스쿠터 정도 크기의 오토바이에 짐을 잔뜩 실으면, 그 사이에 팜 교수가 끼어 앉아 집으로 향했죠.
평소 끼니는 이모와 외할머니가 챙겨줬지만, 이외 일상은 스스로 챙겨야 했습니다. 세탁기가 없어 빨래도 손수 하고요. 그럼에도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녀가 기꺼이 이산가족을 자처하며 유학생활을 한 것은 ‘더 나은 교육을 받겠다’는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베트남 북부 농촌지역 출신인 제 부모님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학교를 중퇴하셨다고 해요. 그래도 아버지는 40세에 학교로 다시 돌아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입학해 40대 중반에 회계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으셨는데, 어머니는 중학교 때 학업을 중단한 뒤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셨죠. 그 아쉬움 때문인지 부모님이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시고 자식들에게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셨어요.”
다음 ‘유학’은 호찌민에 위치한 베트남호찌민국립대(VNU-HCM)였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교재비와 장학금, 생활비를 지원해 줬고, 호찌민 외곽에 자리 잡고 있어 기본적으로 생활비와 기숙사 비용도 저렴했다고 합니다. 다양한 과목을 영어강의로 들을 수 있는 기회도 열려있었습니다. 8인실 기숙사 방에서 생활하며 팜 교수는 미래를 그려나갔습니다.
그가 학문을 업(業)으로 삼겠다고 생각한 것은 대학교 2학년 무렵입니다. 세계적 개발경제학자로 2019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아브히지트 바네르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교수가 쓴 책 ‘Poor Economics(한국어판 제목은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가 큰 전환점이 됐습니다.
“이 책에서 다룬 문제들에 깊이 공감하게 되면서, 저도 비슷한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다만 베트남 교육 시스템이 비판적인 사고를 하기보다는 암기를 중시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대학원은 해외로 진학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학부 때 영어 공부와 대학원 진학 준비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어요.”
하지만 해외 국가의 비싼 학비와 물가를 고려하면 대학원 합격증을 받는 것만으로는 유학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전액 장학금’을 목표로 삼고, ‘전액 장학금을 받지 못할 바엔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졌던 이유입니다.
자격지심에 ‘가면증후군’ 겪기도
팜 교수는 2015년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새로운 유학 생활의 시작. 대학교 3학년 때 KDI 국제정책대학원의 석사 과정 전액 장학금을 받게 되면서 이곳에서 석사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양질의 프로그램이 제공되고 학생의 절반 가량이 외국학생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KDI국제정책대학원에서 그가 매진한 학문은 공공정책학. 개발과 환경 관점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팜 교수에게 한국은 인생 처음 베트남을 떠나 살게 된 나라였습니다. 대중교통, 언어, 길찾기 등 일상생활 속 모든 것이 새롭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나마 같은 아시아 문화권 국가였기에 비슷함도 많이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 유학 생활은 미국이었습니다.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코넬대로 진학했습니다. 10대 때부터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생활하는 데에 이골이 난 그였지만 미국 생활은 쉽지 않았다고요. 첫 학기에 ‘가면증후군(imposter syndrome·자신의 성공이 운으로 얻어졌다고 생각해 불안해하는 심리)’을 겪었었다고 합니다.
“저는 새로운 교육 문화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부나 대학원을 졸업한 인재들인 거에요. 그들의 부모는 높은 교육 수준을 갖췄고, 대학 교수거나 고위 관료였고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자격지심이 커졌고, 제가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계속 의심하게 됐어요.”
혼자 이겨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첫 학기에 기대했던 것보다 낮은 성적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학교 조교나 교수님,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저는 원래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인데 그룹 토론에 활발하게 참여하기 위해 노력했고요. 교수님들과 멘토들도 따뜻하고 인내심 있게 질문에 대답을 해주시더라고요. 조교를 하면서 자유롭게 질문하고 답하는 미국의 대학 문화에도 익숙해졌어요.”
“내 연구로 베트남 농민 삶에 이바지”
코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미국에 남거나 고향인 베트남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한국행을 택했습니다. 연구 환경이 잘 조성돼있으면서도 고국인 베트남과도 가깝다는 것이 그의 선택에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미국에서 6년을 지냈는데, 저를 든든하게 지원해 줄 수 있는 네트워크는 없다는 게 아쉬웠어요. 한국은 베트남에서 멀지 않고, 그러면서도 제가 연구 프로젝트를 계속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어요. 물론 부모님과 가까운 곳에서 살아야할 필요성도 느꼈고요.”
팜 교수의 고향 친구들과 비교하면 그는 매우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친구 중 학자의 길을 걷는 사람은 팜 교수 뿐입니다.
“고향 친구들 상당수는 18살쯤에 결혼해서 지역에 정착하고, 차나 커피를 재배하는 농장에서 일하거나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요. 특히 여성인 친구들은 부모님이 사시는 곳 근처에 정착해서 살아야 하는 경우도 많고요. 저희 부모님은 자녀 교육을 위해 많은 희생을 하셨고, 제가 다른 나라에서 사는 것에 대해서도 유연하게 생각하세요. 그 덕분에 지금 자리에 올 수 있었어요.”
그의 꿈은 ‘개발경제학과 환경경제학 분야에 지속적으로 기여하는 것’이라고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고 싶다’는 겁니다. 고3 때는 의사를 꿈꾸기도 했지만, 공부를 하다 보니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됐다고 합니다.
“제 고향에서는 농업이 주요 생계 수단인데요. 농업은 기후에 크게 영향을 받고, 극단적인 기상 상황에 매우 취약해요. 과도한 강수량이나 가뭄은 지역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죠. 내 가족이자 내 이웃인 농민들이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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