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시대에는 50년마다 모든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귀속시키고, 모든 종들은 자유인으로 풀어줘 고향 땅으로 돌아가게 하는 ‘희년’(Jubilee) 제도가 존재했다. 필연적으로 희년에 자유를 찾은 자들은 노예로 살던 땅에 남든지 혹은 다른 곳으로 떠날지를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사랑하는 이들과 자유롭게 살았던 기억에 이끌려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순례를 시작하게 된다. 물과 식량, 잠시 머물 숙소 등 무엇 하나 넉넉하지 않은 고되고 외로운 여정 속에서 광야와 바다, 험준한 산 등을 지나면서도 발걸음을 끝내 멈출 수 없는 것은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양지희 작가는 20대와 30대 시절 유럽과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각지를 여행하며 자신이 평생에 걸쳐 탐구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티베트 고산지역에서 우연히 물통을 들고 실개천에서 물을 긷고 돌아가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 예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만난 여인을 떠올렸다.
양지희 작가는 “저 여인도 마르지 않는 샘물을 마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그 여인이 그림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면서 희년이라는 주제가 마음속에 찾아왔고, 그 여인이 희년이 선포된 후 본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통해 성화되고 죄인의 습성들을 버리는 과정을 그리게 됐다”며, “우리도 삶이라는 과정을 지나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과정에 있기에 ‘희년’ 시리즈를 통해 여인이 성화돼 가는 과정을 그림으로서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담고자 했다”고 밝혔다.
처음 노예로 살던 곳을 벗어난 여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은 척박한 광야에 도달하는데, ‘부활한 성도’를 상징하는 하늘에 회오리처럼 떠있는 물고기 떼를 바라보며 하나님과 공동체의 응원을 받으며 물통 하나만 매고 발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표현된다.(<울리는 소리>, <광야에서>)
이어지는 시리즈에서 여인은 아름답지만 여전히 혼자이며 마실 수 있는 물조차 없는 바다에 다다른다. 자연을 통해 느끼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는 동시에, 순례의 길을 멈추게 하는 내 안의 작은 문제들을 내려놓고 다시 나아가기 위해 무릎을 굽히고 신발 끈을 다시 묶는 모습을 그렸다.(<고요의 한 가운데> <나를 바꿉니다>)
그 다음에 도달하는 험준한 산에서 심연 안으로 깊게 빨려 들어갔다가(<소리에 향하다>, <소리를 만나다>), 외로운 여정 속에 동행자를 만나는 순간이 온다. 그러나 바랐던 것처럼 나보다 강하고 지혜롭고 부유한 동행자보다는 자신보다 약하고 작은 동행자를 만나는 경험 속에서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며 하늘의 별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약속(Jubilee, walk in the abyss)> 시리즈)
이후 여인은 동행자는 아니지만 따로 또 같이 걷는 여행자들과 함께 하는 여정을 그리는 한편, 지금 현재의 양극화 사회(<주울 이삭이 남아있지 않습니다>)와 돌보지 않는 인간의 이기심이나 난파선처럼 과거의 영광으로만 남은 역사(<난파선, 사그라질 문명이여)> 등을 보여줌으로서 보는 이들이 스스로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과 작품을 연결해 자신의 삶과 신앙을 성찰할 수 있도록 했다.
양 작가가 그린 이러한 풍경들은 ‘기억상실중(記憶像實):암묵의 풍경’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누구라도 머릿속 기억을 떠올려보면 실제의 사건과 장면이 시간이 지나면서 특정 부분은 잊혀 존재하지 않게 되거나 흐릿하게, 어떤 부분은 실제보다 훨씬 강렬하게 부각되거나 왜곡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양 작가는 “기억이 잃어버리는 과정이 ‘기억상실(記憶喪失)중’이라고 한다면, 기억의 실재를 눈앞에 맺히도록 찾아가는 노력 또한 다른 한자를 사용해 ‘기억상실중’이라고 표현했다”며, 이를 사진과 회화가 접목된 매체 혼성으로 표현했다고 밝혔다. 직접 찍은 사진과 인터넷에서 차용한 사진들을 포토몽타쥬로 합성하고 이를 붓으로 점을 찍고 두드리고 다시 찍고 여러 차례 덧칠하는 작업 등 회화로 옮기고, 회화로 만든 작품을 다시 사진으로 재촬영하거나 디지털 프린트로 인쇄하는 매체 혼성 작업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양지희 작가는 “이번 초대전 제목인 ‘접경’(接經)의 풍경(諷經)은 성경을 접한다는 의미, 하나님을 만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를 향하고 있고, 무엇을 증명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작품들에 담았다”며, 앞으로 이어진 희년 시리즈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지켜봐줄 것을 부탁했다.
양지희 작가는 초대전 ‘접경의 풍경’(The Landscape of Encounter)을 5월 26일까지 광명 나바갤러리에서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