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칼럼]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인가, 소유자인가?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투 DB

◈우리를 소유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심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때론 ‘당신의 소유로 삼기 위함’이라고 했다가 때론 ‘우리를 사랑한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를 보며 어떤 사람들은 ‘과연 어떤 것이 정답인가’라고 헷갈려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둘 다 이다’가 정답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삼기 위해 구원하셨다 고 명시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본래 ‘하나님의 창조’를 입어 ‘하나님의 소유’였던 인간이 ‘죄로 타락’하여 하나님이 소유가 될 수 없게 되자,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redemption, 구원)’하여 다시 그들을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을 임명’할 때(출 19:22)나 성전 제사에 쓰이는 ‘그릇(히 9:21-22)’을 성전 안으로 유입할 때 피를 뿌려 정결 의식을 행하는 규례에서도 나타났다. 그들을 피로 구속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다.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출 19:22)”.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1-22)”.

그러나 이어서 말하겠지만,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욕(所有慾)’역시 잔인한 독재자나 폭군의 ‘비인격적인 점유욕(占有慾)’이 아닌 ‘사랑의 발로(發露)’인 ‘애욕(愛慾)의 표현’이다.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를 구원하심

하나님은 ‘우리를 소유하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더러, ‘우리를 사랑함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에 대한 그의 구원의 동기를 ‘사랑’에 두셨다. 이에 대한 성경의 근거는 부지기수이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느니라(사 63: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그러나 이는 앞서 말한 ‘우리를 소유하기 위해 우리를 구원했다’는 말씀과 서로 배치되지 않는다. 나아가 ‘소유’와 ‘사랑’도 배치되지 않는다. ‘소유욕’은 ‘사랑’에서 발로되기 때문이다. 만일 ‘사랑’에 ‘소유욕’이 배제된다면 ‘사랑’이 구현될 수 없다. 남녀 간의 사랑도 ‘소유욕’이 없다면 그것이 성립될 수 없다.

‘형이상학적인 비현실적 사랑관’에 빠진 일부 철학자들이나 문학가들은 너무 ‘이타적인 사랑관’에 매몰되어 ‘소유’는 ‘사랑’이 아닌 ‘이기심의 발로’라고 생각하며 ‘소유’를 배척한다. 예컨대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닌 주는 것’이고, ‘사랑은 상대방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상대방에게 내어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랑’은 ‘소유욕’을 인정한다. ‘아가서(the Song of Solomon,雅歌書)’에서 그린 ‘성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혹은 ‘그리스도에 대한 성도의 사랑’에도 ‘서로에 대해 소유하고 소유 당함’을 인정하고 표현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아 2:16)”.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아 6:3)”.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진일보하여, ‘독점욕’까지 당연시한다. 성경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신 4:24)’을 말씀한 것이 그것이다. 이 ‘하나님의 질투’는 ‘그의 백성에 대한 독점욕’에서 비롯됐다. 만일 ‘독점욕’이 없다면 ‘질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출 20:3)”는 십계명 말씀 역시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독점욕’의 표현이다. 또 성경이 ‘세상을 사랑하는 성도들’을 ‘간음하는 여자’빗대고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약 4:4)’이라고 한 것 역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만 사랑하길 바라는 ‘하나님의 독점욕의 표현’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신 4:24)”는 말씀은 ‘하나님의 질투가 불처럼 강렬하다’는 말이기도 하며, 질투를 일으키는 대상에 대해 ‘불같이 진노하신다’는 뜻이다. 이는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독점욕이 얼마나 강한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 할 때 그들을 향해 나타낸 질투를 통해 증명됐다.

◈사랑 안에서 스스로 종이 됨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의해 움직이는 자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해 움직이는 자들이다. 곧, 그는 ‘하나님이 하라고 명령’하시니 억지로 하거나 ‘하지 않으면 벌받을까봐’ 두려워서 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읍하여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가 항상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의 동기이다. 사도 ‘바울의 신앙’ 역시 그러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자신뿐 아니라, 그가 성도들에게 봉사와 헌신(연보)을 권면할 때도 ‘자원하는 심령’을 강조했다.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고후 8:16-17)”.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고후 8:2-4)”.

우리를 사랑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하나님’은 우리도 당신을 향해 억지가 아닌 ‘사랑’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을 기뻐하심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오늘 주제 중 하나인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 역시 그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닌, 그의 사랑에 매여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시길 하나님은 기대하신다. 일찍이 구약시대에도 ‘자원하는 종의 규례(출 21:1-6)’를 통해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했고, 신약에선 ‘자유자로서의 종의 개념’을 통해 그렇게 하셨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 7:22)”. ‘복음 안에서 율법의 매임’에서 자유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위해 스스로 종이 된다는 뜻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학술고문,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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