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호 박사의 ‘이중창’ 169] 침묵하면, 신앙의 자유 무너질 것
압수수색은 정당한 절차일 뿐?
공권력의 교회 향한 ‘경고장’
종교 자유, 교회 안에서만 허용?
세계로교회 압수수색 침묵하다
더 큰 고통, 과거 외면 회개해야
합법 탈 쓴 편파 수사가 탄압
압수수색은 신앙을 겨누는 경고탄이다.
이제 교회가 침묵하면, 신앙의 자유가 무너진다.
신앙의 명예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종교 탄압이란 말은 거룩한 고난 앞에서 써야지, 압수수색 영장 앞에서 남용할 단어가 아닙니다.”
이 얼마나 정제된 언어 같지만, 얼마나 현실을 외면한 이상주의인가.
물론 모든 수사가 종교 탄압일 수는 없다.
정당한 법적 절차와 공익적 수사의 필요성은 누구보다 교회가 인정해야 하며,
공적 영향력을 가진 종교 지도자라면 더욱 투명해야 한다는 점에도 동의한다.
다만 지금 이 사안은 그 방식과 방향, 시기와 맥락에서 깊은 우려를 낳는다.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에 대한 ‘구명 로비’ 의혹을 수사 중인 해병 특검은 7월 18일, 서울 마포구의 극동방송 본사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압수수색했다.
그 대상에는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가 포함됐다. 두 사람은 보수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며, 과거 정권과의 교류로 인해 정치적 상징성까지 덧입혀진 인물들이다.
지금 극동방송과 여의도순복음교회를 향한 압수수색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공권력이 종교를 향해 공식적으로 경고장을 날린 사건이다.
교회의 강단이, 예배당이, 목회자의 서재가 형광 조끼를 입은 국가 권력에 의해 열리고 있는 이 상황을 단지 ‘수사 절차’로 축소한다면, 그는 종교의 자유를 ‘교회 안 예배만 허락된 자유’로 오해하는 사람일 것이다.
앞서 부산 세계로교회와 파주 운정참존교회도 이미 압수수색을 받은 바 있다.
그리고 그때, 교계는 침묵했다. 그 현장을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며 조용히 넘어가지 않았는가.
이제라도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때의 방관과 무관심이 오늘날 더 큰 고통으로 돌아온 것은 아닌지,
침묵했던 죄, 외면했던 책임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수사 흐름은 해병 특검이 보수 성향 대형교회들을 연속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비칠 수 있으며, 단순히 개인의 혐의 여부를 넘어 특정 정치적 스펙트럼에 속한 종교권 전체에 대한 압박의 흐름으로 해석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문제는 이 사건이 특정 정치 세력과 연계된 종교인들만을 대상으로 수사 선상에 올려놓음으로써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의심과 동시에, 종교계 전체에 대한 무언의 경고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1. 합법의 탈을 쓴 편파적 수사, 그것이 탄압이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압수수색은 법원의 영장을 통해 집행된 것이니 정당하다”고.
맞는 말이다. 법적 절차의 존재는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 원칙이다.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의혹에 휩싸인 다른 정치인들과 단체들은 왜 수사받지 않는가?
왜 유독, 윤석열 전 대통령과 가까운 일부 보수 기독교 인사들만 선별적으로 도마 위에 오르는가?
정치적 선택이 개입된 수사라면, 그것은 형식이 아무리 합법이라 해도 내용은 탄압이다.
더구나 종교 지도자의 명예는 단 한 번의 압수수색으로도 회복 불능이 되며,
교회는 그 자체로 ‘공적 신뢰’의 균열을 겪는다.
물론 특검은 “단서가 있었기 때문에 수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도 국민 앞에서 도덕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수사의 형평성과 비례성, 그리고 사회적 효과까지 감안했을 때, 이러한 방식은 결과적으로 종교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메시지로 작동한다.
2. ‘정치 참여’는 교회의 본질이 아니다? 그렇다면 침묵이 교회의 본질인가
교회는 본질적으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이지만, 동시에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외치는 예언자적 존재였다.
어두운 시대마다 교회는 침묵하지 않았고, 불의 앞에 무릎 꿇지 않았다.
정치적 목소리를 낸 교회는 많았지만, 정치 권력에 아첨한 자가 아니라, 권력을 견제하는 영적 양심으로서의 교회가 교회사에 살아남았다.
물론 교회는 특정 정당이나 이념에 예속돼서는 안 되며,
종교가 정치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원칙도 존중돼야 한다.
하지만 종교가 시대의 정의와 진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중립이 아니라 무책임한 회피다.
오늘날의 압수수색은 단지 법 집행이 아니다.
‘너희는 조용히 있으라’는 무언의 메시지다.
신앙의 이름으로 사회적 발언권을 행사하려는 교회를 견제하려는 상징적 행동이다.
3. 신앙은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공동체의 자유다
오늘은 목회자의 서재가 압수수색 당하지만,
내일은 설교문이 ‘정치적 선동’이라는 이유로 검열당하고,
모레는 ‘정권 비판’이 들어간 설교가 허가받지 못하는 날이 올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종교의 자유가 제도적으로만 보장된다고 안심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자유는 선언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탄압은 더 이상 총칼로 오지 않는다.
법의 이름, 정의의 탈, 절차의 모양으로 다가온다.
형광조끼를 입은 수사관이 예배당에 들어서는 순간,
이는 물리적 탄압이 아니라 상징적 굴욕으로 작용하며, 종교 공동체의 정체성을 흔든다.
조사가 끝? 이미 명예 회복 불능
사법보다 날카로운 여론 재판
형평·비례성 안 맞아, 신뢰 붕괴
‘조용히 있으라’무언의 메시지
내일 설교 검열, 모레 설교 금지
예배 넘어, 신앙 자체 위협당해
4. 신앙은 무죄를 입증하는 싸움이 아니라, 명예를 지키는 싸움이다
목회자가 무고하다면, 조사받고 끝나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압수수색’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이미 목회자의 명예는 타격을 입고, 교회는 대중의 의심과 조롱 속에 내던져진다.
정당한 수사와 편향된 낙인은 구별되어야 한다.
무죄가 입증되더라도, 이미 대중은 결론을 내려버린 뒤다.
이것이 바로 사법의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여론 재판’의 실체다.
교회는 세상이 감히 손댈 수 없는 특권층이 아니라,
거룩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는 공동체다.
그러나 그 거룩은 국가 권력이 함부로 무너뜨릴 수 없는 존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맺으며
교회가 침묵하고,
목회자가 침묵하고,
성도들마저 ‘괜히 건드리면 더 시끄러워질까’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잃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존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기억하라.
이미 우리는 ‘코로나 방역’이라는 이름 아래 예배당 인원을 50명으로 제한받고, 심지어 길거리 전도조차 금지당한 시절을 겪었다.
그때 일부 정권에 우호적이던 교계 지도자들은 자발적 협조라는 미명 아래 사실상 정책에 부역했고, 신앙의 자유를 방치했다.
그 결과, 전국에서 1만 3천여 개 교회가 문을 닫고,
예배가 중단되며, 신앙의 공동체성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그때 교회는 스스로 침묵했고,
지금은 침묵한 교회가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압수수색은 단지 한 건의 수사가 아니라,
공적 신앙이 정치에 의해 시험받는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일 수 있다.
이제라도 외쳐야 한다.
“교회를 권력의 도구로 만들지 말라”.
“믿음의 사람들에게 ‘범죄 혐의자’라는 프레임을 씌우지 말라”.
“이것은 단순한 영장이 아니라,
믿음을 겨눈 경고탄이다.
그리고 이 경고 앞에 다시 침묵한다면,
다음은 예배당이 아니라 신앙 그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다.”
최원호 박사(Ph.D)
심리학자·칼럼니스트
심리학 박사로 서울 한영신대와 고려대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했습니다. <열등감을 도구로 쓰신 예수>, <열등감, 예수를 만나다>, <나는 열등한 나를 사랑한다> 등 베스트셀러 저자로 서울 중랑구 은혜제일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최원호 박사의 이중창’ 칼럼은 신앙과 심리학의 결합된 통찰력을 통해 사회, 심리, 그리고 신앙의 복잡한 문제의 해결을 추구합니다. 새로운 통찰력과 지혜로 독자 여러분들의 삶과 신앙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