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신영헌, 역사와 도시 바라보는 애통의 시선
외부 단절된 삶 신앙적 시각으로
광야의 예수 대신 자신 그리기도
구속과 영적 깨달음 회화적 변용
십자가 사랑 묘사와 초현실 구성
그다지 환영 못받아도 화풍 고집
초현실적 발상 최적 스타일 판단
도시문명 위험성 경고 작품 발표
애통의 언어 현실 안타깝게 주시
신영헌(1923-1995)은 평안남도 평원군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직후 월남한 뒤 남한 생활을 시작했다. 화가 수업을 받기 위해 고향을 잠시 떠나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그는 서울 장안에서도 손꼽히는 화가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데생을 배웠는데, 김창렬·전상수 같은 동기생들과 함께 194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신영헌의 작품활동은 그다지 활발한 편은 아니었다. 1978년 미술회관 개인전과 1985년 윤갤러리 초대전 등 두 차례 개인전 외에는 개인전을 개최한 바가 없으며, 1950-1960년대 열린 국전에 작품을 출품한 것 외에 이렇다 할 움직임은 발견되지 않는다.
신영헌은 화단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활동했는데, 그의 제자인 권영호 작가에 따르면 스승은 신장이 좋지 못해 가급적 외출을 삼갔다고 한다. 건강 문제가 그의 발목을 삼은 셈이다.
외부와 단절된 삶은 신앙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영향을 미쳤다. 광야의 그리스도 대신 자신을 종종 그려넣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그만큼 절실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삶의 방향이 확실해지자, 작품 성격도 선명해졌다. 그의 작업은 우리 강토를 휩쓴 전쟁의 비극, 하나님의 언약, 세속 도시의 딜레마 등을 주제로 삼았다.
그의 작품을 알아보기 전에 그의 활동 무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가 지속적으로 참여한 전람회는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 정기전이었다. 작가는 1966년에서 1983년 제18회까지 거르지 않고 매년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 정기전에 참여하는 열정을 보였다.
같은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작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기에, 또 협회에는 선후배 실향 작가들이 상당수 포진돼 있었기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해온 것으로 보인다.
한 작가에게 있어 충격적인 사건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신영헌의 인생을 뒤바꾼 사건은 다름 아닌 6.25 전쟁이었다. 서울대 미대 재학 중이던 그는 6.25 전쟁으로 부모와 헤어지게 되었고 졸지에 실향민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과 아픔이 되었다.
분단된 조국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불효의 죄의식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임진강>(1971), <모정은 산하를 누비고 1>(1971), <이월기>(1971), <모정은 산하를 누비고 2>(1980), <북망한>(1980년대) 등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실어낸 작품이다.
전쟁의 참화를 느낄 수 있는 작품도 여러 점 발표하였다. 이중에서 신영헌의 <대동교의 비극>(1958)은 1950년 12월 초 폭격기의 평양 대동교 폭파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다. 얼핏 보아서는 무엇을 나타냈는지 분간하기 어렵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서서히 이미지가 부각된다.
끊긴 철교와 도강하려는 사람들의 필사적인 노력, 포연이 한데 엉켜 아비규환의 도가니를 식별할 수 있다. 처참하게 휘어지고 망가진 철교와 도강 장면은 전쟁의 현장을 말해주는 동시에 피난의 고통, 이산가족과 상실감, 문명의 후퇴 등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을 소재로 한 또다른 작품으로는 <묘지>(1958)를 들 수 있다. 작가는 전 국토가 전쟁으로 인해 절망의 땅이 되어버렸음을 말해준다. 곳곳은 묘지가 촘촘히 들어서 있고 불에 타거나 폭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땅을 갈색 톤으로 도포했다. 화면에는 나무토막이나 파편, 그리고 묘지 등 막막함을 상징하는 이미지들로 넘쳐난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작품 주제는 복음과 관련된 작품들이었다. 단순히 성경 사실을 도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영적 깨달음을 회화적으로 변용한 작품이다.
<부활>(1970)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광휘를, <신약의 전개>(1970)에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힘찬 걸음으로 이 땅에 오시는 장면을, <광휘의 아침>(1973)에선 생명의 빛을 조명하는 하늘의 은총을, <복음의 끝>(1989>은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기쁘게 맞이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고 <참회록>(1977)은 죄인마저 용납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각각 증언하고 있다. 각각의 그림들은 생생한 사실묘사와 함께 각 장면을 초현실적으로 구성하는 특질이 곁들어져 있다.
물론 그의 작품은 묵시적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데, 가령 <붕양>(1975)에서는 커다란 원(지구)이 두 동강 나면서 떠나는 장면을, <폐도기>(1975)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한 도시의 참상을, 일련의 <도시>(1978),<도시>(1983-1984) 연작에서는 도시의 위기 문제를 다루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그의 일련의 도시 연작이 T. S. 엘리엇의 <황무지>를 연상시킨다면서, 삭막한 현대문명 속에서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물음을 던지고 있다고 했다(『세대지』, 1978년 4월호).
김우종의 말처럼 신영헌의 <도시>(1978)는 밀집된 고층빌딩과 죽어가는 인간의 대조를 통해, 도시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고발한다. 막대한 자본으로 도시를 개발하고 새롭게 단장하지만 거기서 삶을 채워주는 충만함을 발견하기란 힘들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본과 소비, 욕망과 유흥으로 술렁이는 환각적 이미지를 마주할 뿐이다. 도시 공간에서 우리는 ‘비존재하는 존재’로 살아간다(김승환, 『도시를 어떻게 충만케 할 것인가?』, 새물결플러스, 2024, 163쪽). 그곳의 거주자이면서 정작 이방인처럼 거주하는 셈이다.
이사야가 황폐한 성읍을 중수할 것을 촉구했듯(사 61:4), 작가는 건물에 깔려 신음하는 인간을 통해 죄로 물든 세속 도시를 중수할 것을 촉구하였다.
신영헌의 작품 세계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은 그리스도 인물화이다. <그리스도>(1970)는 눈을 감고 무엇인가 생각에 잠긴 그리스도의 모습을, <광야의 그리스도>(1972)는 광야에 홀로 계시는 그리스도를, <그리스도>(1977)는 인간을 대속하시려고 인간의 죄를 짊어지신 상한 그리스도를(1977), <광야>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는 그리스도(1981)를 각각 그렸다.
그의 인물화는 단순한 그리스도의 초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구속하실 뿐 아니라 역사를 구속하시고 무서운 속도로 치닫는 세속도시를 구속하는 분으로 그리스도를 묘출하였다는 표시가 된다. 그리스도의 주권사상을 은연중 찾아볼 수 있다.
신영헌의 회화는 우리 미술지형에서도 독특한 위치에 있다. 그의 초현실적 화풍은 국내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화풍을 고집하였다.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초현실적 발상이야말로 그의 생각을 잘 구현해 줄 수 있는 최적의 스타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년에 작가는 <도시> 연작에서 보듯, 공간의 충만함을 통해 관계성을 촉진하기보다 성과와 기능 위주의 도시 문명이 지닌 위험성을 경고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비인간화와 물질주의가 기준으로 자리잡은 현대 사회에서 작가가 얼마나 시대의 무감각을 깨뜨리고 애통의 언어로 현실을 안타깝게 주시하였는지 짐작케 한다. 그의 예술은 우리 사회에 들려주는 카나리아의 울음 소리 같은 것이었다.
서성록 명예교수(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