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좀처럼 냉기가 가시지 않던 들판에 조금씩 파릇한 기운이 돋는다. 죽은 듯 잠잠했던 생명들이 재잘재잘 피어나는 부활의 계절이다. 꽃무릇과 왕골의 동네, 함평군 해보면 문장리의 봄도 이렇게 막을 올린다.
글로벌비전센터와 쉼터다문화교회가 3년 전 이 동네에 문을 열었다. 온 세상을 한 바탕 휩쓴 코로나19의 스산한 위세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던 무렵이었다.
“많은 것들이 사라졌죠. 어렵게 지켜내던 사역의 기반들이 거의 다 무너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게 활동을 재개해야 할까, 과연 다시 일어설 수는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올해로 이주민 사역 30주년을 맞은 석창원 목사는 광주기독교윤리실천운동 간사로 사역하다가 이주민 노동자들을 섬기는 사역에 발을 들이게 됐고, 1996년에는 아내 김소연 사모와 함께 목포 사랑의교회(백동조 목사)로부터 선교사 파송을 받고 외국인근로자선교회를 창립했다.

아직 광주·전남 일대에서는 이주민선교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기 전이었던 시절에 외국인노동자들은 물론 유학생 다문화가족 고려인 등 점점 늘어나는 이주민들을 품는 사역을 차례로 개발해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무지개다문화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결성해 이주민들의 사회통합 프로그램을 활발하게 가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팬데믹의 장기화로 이주민들의 접촉이 어려워지고, 여러 사역이 중단되거나 위축되면서 석 목사는 큰 위기에 봉착했다. 이 와중에도 한글교실 운영을 비롯한 기본적인 사역들을 꾸준히 유지했고, 전쟁으로 더욱 늘어난 우크라이나 이주민들을 돕는 사역까지 감당해왔다.
그런 가운데 뜻밖의 선물처럼 함평에 마련된 새 건물은 석 목사에게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이 건물은 이선행 장로가 ‘사랑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건립한 곳으로, 당초에는 노인 요양시설을 염두에 두고 세워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이주민사역을 위한 공간으로 변신했다. 건물 1층은 예배와 사무공간으로, 2층은 숙소와 소그룹 공간으로 활용한다.
이 장로의 배려 덕분에 비좁은 예배공간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었고, 석 목사가 오랫동안 꿈꾸었던 이주민 생활공동체 구축을 위해 훌륭한 기반이 마련된 셈이었다. 관건은 광주에 정착해 있는 이주민들이 시골마을까지 얼마나 따라오느냐에 달려있었다.
처음에는 매주일 광주 월곡동의 무지개다문화교회와 함평의 쉼터교회를 오가며 번갈아 예배하는 강행군을 펼쳐야 했다. 그러다 점점 함평 쪽으로 옮겨 오는 인원이 많아지면서 1년 전 쯤에 드디어 두 교회를 쉼터다문화교회라는 이름으로 합칠 수 있었다.
이제 글로벌비전센터에서는 매주 필리핀 베트남 나이지리아 중국 캄보디아 등 다양한 국가 출신 이주민들이 모여, 같은 비전과 같은 신앙고백을 나누며 영적인 한 가족을 이루는 장관이 펼쳐진다. 다른 곳에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감동과 은혜가 있기에 이주민들은 기꺼이 짧지 않은 거리를 달려와, 예배하고 찬양하며 식탁교제까지 함께 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석 목사의 돌봄 속에서 한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이주민들 중에서는 집사의 직분을 받고 동역자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이주민 선교사역을 지켜보았던 석 목사의 딸 은희 씨 또한 뛰어난 조력자로 성장했다.
쉼터다문화교회에는 당초 쉼터교회에 출석하던 이선행 장로와 한국인 성도들도 함께한다. 비록 언어와 피부색은 달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는 데는 어떤 걸림돌도 없다.
점점 빈 집이 늘어나고 가구 수가 줄어들어 활력을 잃었던 문장리 마을에는 글로벌비전센터와 쉼터다문화교회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고 있다. 대부분 고령인 마을 주민들에게는 젊은 사람들이 마을을 드나들고, 광주동명교회 의료봉사단이나 자비량 음악선교 사역을 하는 엘드림찬양단 같은 팀이 방문해 자신들을 섬겨주는 풍경이 반갑기만 하다.
함평에서 지내는 동안 석창원 목사에게는 두 가지 꿈이 생겼다. 하나는 주변 농가나 산업단지에서 일하는 또 다른 이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생명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농촌에 들어와 보니 선교영역이나 마찬가지로 여기도 현실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초고령화가 진행돼 일할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이 없고, 농약과 화학비료의 남용으로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먹을거리들이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도 함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고민이 됐다. 짐이 조금 가벼워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무거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무엇인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센터 앞 텃밭에 무화과를 심어 가꾸고, 이웃 동네인 학교면에 농지를 분양받아 제법 규모를 갖춘 채소농사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서종석 목사, 이박행 목사, 고경태 목사, 전석호 목사 등 광주전남 일대에서 생명농업 사역을 펼치는 여러 목회자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들과 맺어진 관계로 인해 글로벌비전센터는 생명농업선교회의 연수프로그램 등 각종 사역 거점으로 활용되는 중이다.
석 목사가 먼저 시범을 보이자, 이주민들 사이에서도 반향이 나타났다. 특히 석 목사 부부를 ‘아빠’ ‘엄마’라고 부르며 누구보다 친근한 관계를 맺어온 베트남 출신 이주민 몇 가정이 아예 함평으로 이주해 함께 경작하며 신앙공동체를 이룰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석 목사는 이것이 마중물이 되어, 한국에 나온 이주민들이 신앙과 농업기술을 나란히 습득한 후 고국에 농업선교사로 재파송되는 사역으로 발전하는 일까지 꿈꾼다. 또한 시골의 빈 집들을 사람 사는 공간으로 채워나가며, 건강한 먹을거리들을 생산해내는 진정한 생명사역을 이주민들과 함께 전개해 나가려 한다.
앞으로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지나는 동안 쉼 없이 흘리는 땀방울은 함평의 대지 위에 단비처럼 쏟아질 것이다. 그런 시간들이 쌓이다보면 침체된 이주민사역이, 무너져가는 농촌이, 생명이 사라져가는 들판이 다 함께 되살아나는 진짜 부활의 계절이 다가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