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신문 창간 60주년 특집] 기독신문 60년사 -개혁신앙의 파수꾼, 기독언론의 나침반 (2) < 기획/해설 < 기사본문



이 땅의 교회사와 민족사를 정론으로 담아내다


 


<기독신문>의 창간(1965)과 그 의미


이영식 박사(총신대학교 역사신학)
이영식 박사(총신대학교 역사신학)


창간을 준비한 사람들, 전국실업인신앙동지회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통합 측이 분리됨과 동시에 <기독교공보>도 그쪽으로 넘어갔고, 승동 측은 <파수군>을 인수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자 했다. 더 나아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고자 했다. 그 실천이 바로 <기독신문>의 창간이었다. <기독신문>은 시작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교단지라는 명예로운 지위를 갖고 있었다.


<기독신문> 창간에 있어서 실업인신앙동지회가 산파역할을 했다. 대구 중앙교회 우성기 장로는 교회가 통합 측으로 가담하자, 서성로에 새롭게 교회를 개척했다. 이때 부산의 백남조 장로로부터 거액의 연보를 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개혁주의 신앙을 추구하며, 교단에 봉사하자는 목표로 전국의 유력한 장로들이 모이게 됐다. 1963년 7월 9일 백남조 장로 댁에서 13인의 장로들이 모여 실업인신앙동지회를 결성했다. 이날 참석한 장로는 서울의 김인득 양재열 김정국, 대구의 정규만 장기동 김추호 권운현 박기수 우성기, 부산의 백남조 방남준 박찬수 장로 등이었다.


이들은 같은 해 초가을 워커힐호텔에서 부부동반으로 친목을 도모하고, 신앙 간증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때 부산 모임 때 급한 일로 불참했던 곽현보 장로도 참석했다. 이들은 지속적인 모임을 위해서 그 명칭을 전국실업인신앙동지회라고 확정했다. 회장에는 백남조 장로, 부회장에 김추호·김인득 장로, 서기에 우성기 장로, 회계에 양재열 장로를 선출했다.


전국실업인신앙동지회는 구체적인 신문 창간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서울 장충동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신문 이름을 <기독신문>으로 정했다. 전국실업인신앙동지회는 총신대학교 사당캠퍼스의 조성과 발전은 물론 <기독신문>의 창간과 이후 운영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실제로 신앙동지회는 향후 <기독신문>의 이사장 및 사장 등으로 그 운영에 참여하였고, 재정적 후원에도 헌신적이었다.


전국실업인신앙동지회 회원 중에 본지 운영진으로 힘썼던 이들로는 초대 사장 김정국 장로, 이들과 뜻을 같이 했던 2대 사장 곽현보 장로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2대 이사장 양재열 장로, 3대 이사장 우성기 장로, 제8대 및 10대 사장을 역임한 김인득 장로도 있었다.


초창기 [기독신문] 임직원들.
초창기 [기독신문] 임직원들.


창간, 개혁신앙으로 새로운 역사를!


1965년 1월 4일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지 <기독신문>이 ‘개혁신앙의 보수(保守), 교회의 단결, 성도의 교제’라는 사시(社是)로 하여 창간됐다. 초대 이사장은 당시 총회장이었던 김윤찬 목사, 사장은 전국실업인신앙동지회의 김정국 장로였다. 그리고 신문사의 원활한 운영과 발전을 위해서 실행이사 등 운영진을 선출하였다.


신문이사는 ‘신병렬 박상석 김정국 백남조 김인재 김윤찬 양재열 김인득 김장오 양화석 이대영 김병우 민상기 김종필 박기동’이었고, 여기에 보강된 이사는 ‘곽현보 김기용 고성훈 김재민 박찬목 이환수 김장호 안용준’ 등이었다. 발행인 및 인쇄인은 ‘김재민’, 실무진은 ‘편집 안용준·박윤성, 서무경리 이남영, 기자 변순재·백일 (광고) 발송 전봉옥’으로 구성됐다. 재정문제에 대해서는 “기독신문의 운영은 전국실업인신앙동지회의 찬조와 이사들의 찬조 외에 독지가들의 찬조, 광고 지대로써 운영될 것이다”라고 했다.


김재준 교수 등의 자유주의 신학이 불씨가 되어 1953년 기장 측이, WCC 문제로 1959년 통합 측이 분열됐다. 그로 인해 교회와 학교 및 병원 등의 기관에 대한 쟁탈전이 일어나고, 세상에서의 장로교회의 위상은 추락했으며, 전도사업은 치명상을 입었다. 또한 통합 측 계일승 교수를 비롯한 학교 관계자들은 두 차례나 여러 대의 트럭을 총회신학교로 몰고 와서 학교 비품을 싣고 가려다가 직원과 학생들의 완강한 제지로 실패했다. 더구나 1963년에는 고신 측도 환원을 단행했다. 그 시대 상황에서 <기독신문>은 ‘개혁신앙의 보수, 교회의 단결, 성도의 교제’라는 사시를 대내외적으로 선언했다. 그것은 <기독신문>의 가치와 방향이며, 존재 의미이기도 했다.


<기독신문> 창간호(제1호) 1면에는 “한국(韓國) 교계(敎界) 유일(唯一)의 보수지(保守紙)로 발전호(發展乎)”라는 제목으로 그 의의를 부연했다: “순간 파숫군지를 총회 기관지로 발행하여 오다가 이번에 특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들의 후원 아래 주간 기독신문을 발행하게 되었다. … 유독 기독신문은 한국교계의 개혁신앙의 보수를 위한 지중한 사명을 지고 그 출발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교계의 정화와 개혁신앙의 보수를 위해 그 거보를 내디딘다”라고 했다.


옛 [기독신문] 기자의 취재 모습.
옛 [기독신문] 기자의 취재 모습.


같은 맥락에서 사장 김정국 장로는 창간사(創刊辭)에서 다음과 같은 다짐을 했다: “첫째로 개혁신앙의 보수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여 싸우겠습니다. … 기관지는 전체 교회의 대변지요 더 나아가서 교회의 기본성분인 성도들의 대변지임을 재천명하면서 결코 치우침이 없이 과감한 편집 태도와 보도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둘째로 보도의 정확을 기하겠습니다. … 무근하고 불확실한 사건들에 대하여서는 일체의 보도를 삼가며 확실하고 근거 있는 사건들에 대하여서는 주저치 않고 세밀한 보도를 하여 기사의 정확을 기하겠습니다.”


또한 박형룡 박사는 <기독신문> 창간을 축하하면서 다음과 같은 권면을 했다: “첫째로 진실한 사자가 되라. 교계의 사실들을 진실히 보도하는 진실한 사자가 되라. 이 신문은 <기독신문>이니 세속의 언론기관들이 자주 하듯이 자체의 어떤 선입주견에 맞도록 사실을 왜곡하여 허위 선전하려는 시험을 멀리 피하라. 흰 것은 희다 검은 것은 검다고 사실대로 전달하는 진실한 사자가 되기를 바란다. 둘째로 충성스러운 「파숫군」이 되라. … 셋째로 유능한 지도자가 되라. … 넷째로 평화의 조성자가 되라.” 박형룡 박사는 진실하고 공정하며 충성스러운 파수꾼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것을 주문했다.


이상과 같이 <기독신문>의 사시, 김정국 장로의 창간사, 박형룡 박사의 권면은 이후 <기독신문>만이 아니라, 한국 교계 언론지의 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했다고 할 것이다.


[기독신문] 초대이사장 김윤찬 목사 부부와 ICCC 총재 맥킨타이어 박사 부부.
[기독신문] 초대이사장 김윤찬 목사 부부와 ICCC 총재 맥킨타이어 박사 부부.


초대 이사장 김윤찬 목사


<기독신문> 초대 이사장이며 당시 총회장이었던 김윤찬 목사는 창간호에서 “금년의 할 일은 총회신학교 건축과 내외지 전도사업, 총회 기관지인 신문 급(及) 신학교 운영이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 특별히 감사한 것은 신년 첫 열매로 기관지인 신문이 나오고 앞으로 모든 사업도 계속 실행될 것을 믿으며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했다.


김윤찬은 1905년 8월 평남 대동군 산사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친 김락환은 마포삼열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였다. 부친의 신앙을 물려받은 김윤찬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1939년 4월 13일 제34회로 졸업했다. 곧이어 평남 강동군의 중부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 그는 신사참배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죄라고 저항했으며, 주일 1회 예배 강요에 맞서 삼일예배까지 드렸다. 그리고 동지를 규합하여 결사대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러다 일제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주위의 간곡한 요청으로, 황해도 곡산 언진산 동굴에 피신하여 1년 3개월 동안 숨어지냈다.


광복을 맞이했지만, 이북에서는 소련군과 김일성 공산당의 살상과 박해가 시작됐다. 김윤찬 목사는 공산당의 시책에 반대함으로 결국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고, 소련의 “관과 같은 감옥”에서 29일간 갇혀 고초를 겪다가 제대로 걷지도 못한 상태로 풀려 나왔다. 이어서 그는 북한 공산당의 어용단체인 강양욱의 조선기독교연맹에 반대해 목사 면직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6·25 동란기에 가족들과 북한에서 탈출해, 1951년 6월 10일 부산에서 ‘평양교회’를 설립했고, 그 사역은 서울의 평안교회로 이어졌다. 그는 성경의 무오성을 공격하던 김재준 교수의 자유주의 신학이 신학교와 강단을 흔들고 있을 때, 그리고 1959년 WCC 문제로 통합 측이 분열하는 혼란과 분쟁의 시기에도, 장로교회가 개혁주의 신앙을 보전해 가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정부의 시책으로 총회신학교는 남산에서 이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통합 측 학생들과는 달리, 총회신학교 학생들은 강의실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1960년 3월 28일부터 김치선 목사가 세운 대한신학교에서 임시로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당시 부총회장 김윤찬 목사는 미국 페이스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의 총장이자 ICCC 총재인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박사에게 총회신학교의 상황을 적은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김윤찬 목사는 그에게서 받은 10만 달러로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있는 건물을 구입할 수 있었다. 총회신학교는 이곳에서 1960년 8월 22일부터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기독신문> 발전과 칼빈대학교 설립에도 큰 공헌을 했다.


그는 교단의 영적부흥을 위해서도 앞장섰으며, 고신 측과 승동 측의 합동에도 합동추진위원으로 활동을 했다. 그는 총회장을 제49회(1964)와 제52회(1967) 두 번 역임하며 합동 측 교단, 총신대학교와 <기독신문>을 섬겼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 태양신에 무릎 꿇지 않았고, 공산당의 박해에도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개혁신앙을 말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했던 인물이었다.


창간호의 구성과 편집


창간호에 게재된 최초의 설교는 박윤선 박사의 설교로서, 고린도전서 4장 6절을 본문으로 하고 제목은 ‘새로워지자’였다. 또한 ‘방패’(防牌)라는 제목의 칼럼이 창간호부터 시작하여 이후 계속됐다. 창간호는 한자 제호를 <基督新聞>(기독신문)으로 했다. 그리고 제4호 신문부터는 영문 ‘The Christian Times’라는 이름을 병행했다. 본보는 창간호에서 타블로이드(Tabloid) 배판 2면으로 구성되다가, 1965년 10월 11일 제33호부터 4면으로 확대됐다. 창간 당시의 구독료는 1부 6원이었고, 월정액은 24원이었다. 당시 짜장면 한 그릇 값(35원)으로 <기독신문>을 5부 사고, 5원이 남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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