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의 나라에 찾아와 새로운 세상 활짝 열다
내용을첫 공식 장로교선교사인 언더우드가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부활절인 1885년 4월 5일에 인천 제물포에 도착한 지 140주년이 되는 2025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의 의미, 그리고 한국에 첫 발을 내딛은 그의 이후 행보가 이 땅에 일으킨 변화들의 면면을 전 역사위원장 박창식 목사가 상세하게 들려줍니다. <편집자 주>
“왜 너 자신은 가지 않느냐?”
한국장로교의 첫 목사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한국명 원두우·1859~1916)가 한국선교를 두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였다. 당시 언더우드는 신학을 마치고 인도(印度) 선교를 지망해 1년간 의학을 공부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교회도 없었고, 선교 지도자들 역시 한국선교는 시기상조라고 말할 때였다.
그러나 언더우드의 가슴에는 신학생 때에 누군가 읽어준 보고서의 내용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1882년 미국에 문호를 개방한 은둔국(Hermit Kingdom)의 1300여 만의 사람들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은 인도로 가지만 누군가 한국에 가기를 바라던 중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 본인이 직접 한국선교에 나서면서 첫 선교사가 됐다.
언더우드의 성장 과정
언더우드는 본래 영국 런던 출생으로 그의 부친은 제조 화학자요 발명가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품은 경건한 사람이었다. 이 재림신앙은 언더우드에게도 영향을 줘 그도 평생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대망하며 살았고 그 신앙을 한국교회에 전달했다.
열 살 때 형 프레드와 함께 프랑스 기숙학교에 다녔지만, 2년째 되던 해 아버지의 경제적 사정으로 미국으로 이민했다. 그의 가족이 정착한 곳은 화란 개혁파 교세가 강한 뉴저지였다. 언더우드의 가족은 자연히 화란 개혁파 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1881년 뉴욕대학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뉴 브룬즈윅(New Brunswick)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화란 개혁파의 교단 신학교로 개혁주의 전통을 간직하면서도 경건주의 영향으로 복음주의의 연대에 적극적이었다. 이런 영향으로 언더우드는 부흥운동과 연합운동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신학파(新學派, New School) 장로교도가 됐다. 이런 성향은 훗날 한국선교를 함께 시작했던 감리교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와 다양한 연합을 가능하게 했던 바탕이 됐다.
미지의 땅 한국으로 향하다
태평양을 건너 한국을 향하던 언더우드는 잠시 일본 요코하마에 머물며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를 배웠고, 아펜젤러와 함께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에 도착한 후 서울에 들어왔다. 그가 도착한 이듬해인 1866년 여름에는 아시아 진성 콜레라가 발생해 총 7000명 가량이 사망했는데, 심할 때는 하루에 460구의 시신이 실려 나갔다.
이런 와중에도 언더우드는 한국어 공부에 집중했다. 하루는 그가 모자를 사러 가게에 가서 “이것이 무엇이오?”라고 물었다. 주인이 “갓이요”라며 퉁명스럽게 말하자 이를 “가시오”란 말로 알아듣고 뛰어나오기도 했다. 1년 후 어느 정도 한국말 구사가 가능해지자 그는 즉시 노방전도와 사랑방 전도에 힘썼다.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가 그의 선교사역의 주된 목표였기 때문이다.
조정의 천주교 박해를 의식해 금교(禁敎) 정책을 따르던 선임 알렌 선교사와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음 전파자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할 임무를 받은 내가 어떻게 사람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겠느냐”며 목숨을 걸고 세례를 베풀었다. 1886년 7월 18일에 노도사(노춘경)에게 첫 세례를 베푼 이후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줬다.
그 결과 1887년 9월에 그의 사랑방에서 14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됐는데, 이것이 최초로 조직된 새문안교회의 시작이었다. 새문안교회의 설립은 언더우드 사역의 열매들과, 이전에 만주의 로스(J. Ross)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자들의 연합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언더우드의 개척 사역으로 지금의 서교동교회, 영등포교회를 비롯한 21개 교회가 세워졌다.
언더우드의 사역방식은 주로 교육선교였다. 노방전도에서 만난 고아들과 극빈 아동들을 모아 기술을 가르치는 고아원학교를 설립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 학교는 예수교학당, 언더우드학당 등의 시절을 거쳐 경신학교로 발전했다.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우사 김규식 등이 이곳에서 배출됐다.
오늘날 한국이 교육 강국으로 성장한 데에는 언더우드로부터 시작하는 ‘백년대계’ 비전에서 바탕이 형성된 덕이 크다. 경신학교는 훗날 조선기독대학, 연희전문학교가 되었고 다시 에비슨 선교사와 함께 설립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합쳐져 1957년에 연세대학교로 발전했다.
한글 성경번역을 위한 헌신
언더우드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사역은 성경번역이었다. 놀랍게도 그가 처음 입국했을 때 이미 성경 일부가 번역돼 있었다.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과 만주에서 로스를 중심으로 번역된 <예수셩교전서>가 그것이다. 언더우드는 내한한 지 1년여 만에 아펜젤러와 함께 이수정의 마가복음을 고쳐서 출간했다. 이때 기존 번역본을 사용할 것인가, 새로 번역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했다. 기존 번역의 사투리와 오역을 일일이 수정하는 것보다 새롭게 번역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1887년에 상설 성경위원회를 구성했다.
성경 번역에서 중요한 논점은 신(神)의 칭호를 ‘하나님’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천주’(天主)나 ‘상제’(上帝)로 할 것인가였다. 대체로 선교사들은 ‘하나님’을 주장했으나 언더우드는 한동안 이 용어를 거부했다. 언더우드가 추구한 것은 모든 신보다 뛰어나고 온갖 잡신을 포괄하는 유일신관을 내포하는 개념이었다. 마침내 언더우드는 ‘하나님’이 ‘크고 고귀한 하나님’(The Honorable Heavens)이란 본래의 의미로 사용되기를 바라면서 자신이 주장했던 명칭들을 버리고 상대방의 요구를 기꺼이 수용했다.
언더우드는 평생 성경 번역위원장을 맡았고,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06년에 공인본 신약전서를 간행했고 1911년에는 드디어 성경 완역을 이룰 수 있었다.
언더우드는 1890년 6월 중국 산동성에서 오래 사역하던 네비우스(John Nevius)를 초청했고, 그가 제시한 3자(三自) 원리를 한국선교정책으로 채택했다. 자전(自傳) 자립(自立) 그리고 자치(自治)로 요약되는 네비우스 정책은 한국인이 스스로 전도하고 재정도 담당하며 또한 교회 운영도 스스로 하는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네비우스 정책에 충실하게 한국교회를 이끌었으며, 그 외에도 다방면으로 선교사역을 펼쳤다. 한국 첫 근대출판사인 조선성교서회를 설립해 사전, 성경, 찬송, 전도문서를 간행하며 출판문화에 선구적으로 기여했다. 인쇄매체 중에서도 신문에 대한 비전이 있었던 언더우드는 1897년에 <그리스도신문>을 발간했다. 이것은 아펜젤러가 간행한 <조선그리스도인회보>와 함께 한국 기독교신문의 효시가 되었다.
한국장로교회 첫 총회장이 되다
1912년 9월 1일 드디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됐다. 이때 언더우드는 초대 총회장으로 피선됐다.
선교사역이 힘차게 도약할 무렵 그의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조선총독부의 강요로 일본어 개인 교습에 몰두하면서 건강이 악화돼, 결국에는 미국에 있는 누이의 집에서 요양하게 됐다. 그는 병상에 있으면서도 대학의 발전을 빌었고 비서를 통해 업무를 처리했다.
언더우드는 결국 1916년 10월 12일 오후 3시 30분에 애틀랜틱시티에서 5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유해는 그를 파송했던 뉴욕 브루클린 라파엣교회 묘지에 묻혔다. 고종 황제는 그를 기려 태극훈장을 내렸고, 한국정부는 1963년 광복절을 기해 대통령상을 수여했다.
프랑스 역사학자 레오나드는 16세기 종교개혁자 존 칼빈(J. Calvin)을 일컬어 ‘문명의 건설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언더우드는 ‘한국 기독교 문명의 건설자’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한국선교 개척의 최고 공로자이며 한국 기독교의 초석을 놓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교계는 물론 일반에도 그는 무시되고 외면받았다. 언더우드가 기독교선교와 한국 근대화에 끼친 지대한 영향은 더 연구, 평가되어 널리 알려져야 한다. 2025년도, 언더우드가 내한한 지 140주년이 되는 지금 그와 자손 4대가 한국을 섬긴 선교와 희생정신은 한국교회에 새롭게 조명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