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4일은 탈북청년 석범진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 됐다.
이날 이화여대의 아트하우스모모에선 그가 제작한 첫 독립 장편영화 ‘림시교원’의 시사회가 열렸다. 하지만 세상의 주목이 모두 대통령 탄핵이 선고될 국회에 쏠려 있던 터라 시사회는 썰렁했다. 취재 방문을 기대했던 기자들이 모두 불참하면서 기사도 한줄 나가지 않았다.
영화 림시교원은 가까운 미래에 북한으로 교생실습을 간 남한의 대학생 소희가 최고지도자 초상화 분실사건에 연루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았다. 석 씨는 시나리오부터 연출, 편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담당하면서 2024년 한 해를 통째로 이 작품에 쏟아부었다.
소란스러운 시국에 데뷔 무대를 망친 셈이라 억울한만도 했지만 석 씨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런 일이 있을 줄 모르고 시사회 날짜를 잡았지만, 하마터면 그것도 못할 뻔했습니다. 시사회가 열린 것이 어딥니까. 객석도 가득 찼고요. 영화를 보신 분들이 카메라 무빙이나 연출이 좋았다고 격려해 줘 힘이 납니다.”
석 씨는 북한에서 오로지 김정일 시대만 겪었다.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에 태어나,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에 탈북했다. 한국에서 4명의 대통령을 겪었고, 조만간 다섯 번째 대통령을 보게 됐다.
북한에서부터 문학 소년을 꿈꿨던 그는 한국에 와서 여러 편의 소설과 수많은 시를 발표했다. 작품성도 인정받아 24세에 이한열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연세문학회장, 연세예술원 영화학 1기 졸업, 영국 유학, 첫 장편영화 제작 등 적잖은 성과도 이뤄냈다.
이제 겨우 30세에 불과한 청년에게 앞으로 어떤 인생이 기다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30년 동안 쌓은 시련과 경험은 그를 버티게 해줄 든든한 뿌리가 될 것이다.
● 김일성 사망 다음달에 태어나다
석 씨는 1994년 8월 두만강 옆인 함경북도 무산에서 태어났다. 김일성이 사망한 지 한 달 뒤였다. 어머니는 김일성 장례식을 치르느라 더운 날씨에 여기 저기 다니며 울어야 했다. 그래서 늘 뱃속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끼봐 걱정스러웠다.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난의 행군’에 대한 기억은 없다. 가족들은 풀죽으로 끼니를 떼우면서도 외동아들인 그에겐 쌀밥을 해먹였다. 당시 4살 때였지만 흐릿한 기억으로 머릿속에 남아있다.
비록 풀죽을 먹었지만 그의 집안은 북한에서 상당한 엘리트 집안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독립운동 유공자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는 중소기업 지배인을 지냈고, 할머니도 무산세관 직원이었다.
외가도 뒤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서울대를 다니다가 6.25전쟁 때 북한군에 입대한 뒤 낙동강전선에서 팔을 잃고 영예군인(상이군인)이 됐다. 북에서도 두뇌는 인정받았지만, 남쪽 출신이라 평양에서 살지 못하고 무산으로 내려와 무산공대 교수로 재직했다. 다만 외활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기에 기억은 거의 없다.
아버지는 출신성분이 우수한 자들만 선발되는 김일성 경호부대에 입대했다. 하지만 훈련 중 머리를 심하게 다쳐 낙향해야만 했다. 그리고 무산공대를 졸업한 뒤 전기공으로 일했다.
그런데 석 씨가 커가면서 갖게 된 궁금증은 따로 있었다.
“어머니는 무산공대를 나와 군 인민위원회 재정부에서 일했고, 큰 이모는 교사, 작은 이모는 의사인데도 왜 장마당에서 장사를 하고 있을까?”
조부와 외조부 모두 마음만 먹으면 잘 살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고지식했다. 자식들은 부모덕을 보지 못한 채 각자 호구책을 찾아야만 했다.
석씨는 소학교에 입학할 나이인 7세에 깊은 산골로 들어가 움막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산 속에 소토지(뙈기밭)를 일궜는데, 남들이 훔쳐가지 않게 가족들이 돌아가며 경비를 서야만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움막에서 아들에게 휴지로 쓰던 요리책으로 한글을 가르쳤다. 그래서 1년 늦게 학교에 들어갔는데도 공부는 남들보다 더 잘할 수 있었다.
● 소학교 2학년때부터 쓴 시
그의 소학교 때 기억은 온통 나쁜 일들로 채워져 있다.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갔다. 군에서 머리를 다친 후유증으로 뇌종양이 발병했고, 병이 심해지면서 반신마비와 전신마비를 겪다가 몇 달 뒤 사망했다.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면서 재산을 다 팔고 나중에는 집까지 팔게 됐다. 어머니는 허름한 집으로 이사해 돼지를 키우고 술을 빚었다. 석 씨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술통을 메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술을 팔아야 했다. 그래도 먹고 살기 너무 힘들었다.
2006년엔 어머니가 그를 이웃집에 맡기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홀몸으로 어린 아들을 도저히 키울 자신이 없자,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떠난 것이다. 이후 석 씨는 할아버지 집에서 살게 됐다. 장손을 남의 집에 둘 수 없다며 그를 거둔 것이다.
지금까지 생생한 기억 하나가 있다. 소학교 정문에서 폭발물이 터진 일이다. 당시 그 일로 그가 다니던 무산소학교의 교장 딸을 비롯해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
북한 당국은 이를 안기부의 소행이라고 했다. 그때 이후 석 씨는 남조선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심을 갖게 됐다. 남조선이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폭발 현장에서 보았던 살점과 피비린내가 떠올랐던 것이다.
순탄하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석 씨는 꿈을 키워나갔다. 그의 첫 꿈은 화가였다. 그렇지만 그림을 가르치는 학생소년궁전 미술소조에 입학하려면 매달 쌀 10㎏과 당시 뇌물로 인기 많던 ‘고양이담배’ 2보루씩을 내야만 했다.
결국 화가의 꿈을 접은 어린 소년은 소학교 2학년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동무’라는 제목의 시가 그의 첫 작품이었다. 그의 작품은 좋은 평가를 받았고, 선생들은 다른 학생들에게 읽어주기 바빴다. 칭찬을 받으며 자신감을 얻은 소년은 신이 났다. 시 쓰기를 계속했고 나중에는 수필도 썼다.
그는 물리나 화학, 생물 등 이공계 분야에서도 성적이 좋았다. 덕분에 일반중학교에 다니던 그는 군에 하나 밖에 없는 수재학교인 무산 제1중학교로 편입했다.
돈도 없고 부모도 없는 석 씨가 학교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오직 하나, 공부 밖에 없었다. 그는 촛불을 켜고 코피가 터질 때까지 공부했다.
그 결과 학교를 대표해 나선 군 학과경연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5학년 때엔 무산군 대표로 ‘도 알아맞히기 경연’에 나가 순위권에 오르기도 했다. 알아맞히기 경연은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퀴즈 프로그램 같은 것이다.
전국 경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중앙급 대학에 갈 수 있다. 석 씨의 목표는 김책공대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온 가족이 공대를 졸업한 ‘공대 집안’이었기에, 석 씨도 많은 고민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또 돈이 발목을 잡았다. 전국 경연에 참가하기 위해선 도 소재지인 청진에 머물며 이듬해 경연 준비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석 씨에겐 숙식을 해결할 돈이 없었다.
한 달 정도 청진에 머물다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보낸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어머니가 아들을 데려오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하지만 그는 따라나서지 않고, 7개월을 혼자 고민했다. 잘하면 북한에서도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희망이 있는데, 굳이 모험을 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 두만강을 기어 넘다
그렇게 그가 고민을 거듭하던 시기에 몇 가지 일들이 연이어 터졌다.
우선 2009년 11월 30일에 전격 단행된 화폐개혁이었다. 당시 15세였던 어린 그의 눈에도 지금까지 사람들이 모은 돈을 모두 무효화하고, 한 세대에 10만 원만 나눠주는 정책은 너무나도 무리한 정책이었다.
무엇보다 북한돈만 갖고 있던 사람들은 졸지에 거지가 되고, 달러나 위안화를 갖고 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부자가 되는 상황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물가도 미친 듯이 뛰었고, 온 나라에 생활고로 고통받는 인민들의 아우성이 넘쳐났다.
석 씨는 어느날 할머니에게 “이런 정책을 실시한 사람은 인민들 앞에 나와 머리 숙이고 사과해야 한다”고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는 “어디에서든 그런 얘기는 절대로 하지 말라”며 어린 손자에게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석 씨의 뜨거워진 감정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이후 “이런 말이 되지 않는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니”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당시 그가 정서적으로 크게 의지했던 두 사람이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일도 큰 충격이 됐다. 한 명은 그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사촌이었다. 특히 공부에 열심인 석 씨에게 “너 그러다가 정신병원에 간다”라며 농담하던 사촌이 먼저 광인이 돼 병원으로 입원하던 장면은 그에게 죽음 이상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라이벌 관계였던 학교 친구가 월반을 해서 국방대학에 합격한 일도 그를 충격에 빠지게 했다. 부자집 자식은 학년을 조작하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일이 가능한데, 공부로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에겐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힘들게 한 것이다.
결국 그는 어머니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 결심을 담아 그는 ‘눈길 우에서’라는 소설을 썼다. 모교 선생들에게 전한 무언의 작별 인사였다.
2011년 2월 그는 마침내 안내자와 함께 탈북의 길에 올랐다. 두만강까진 집에서 2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항상 다니던 길이었다. 강에 도착하니 안내인에게서 미리 돈을 받은 군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발소리를 내면 안 돼. 신발을 벗어.”
군관은 먼저 신발을 벗더니 꽁꽁 언 두만강에 뛰어들더니 기어가기 시작했다. 석 씨도 신발을 벗고 그의 뒤를 따랐다. 일행은 기어가다 멈추고 동태를 살피고, 다시 기어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두만강 일대를 헤맨 끝에 반대편 중국에 도착했다. 이후 군관은 중국 쪽 도로에 가면 택시가 기다린다는 말만 남기고 부리나케 돌아섰다.
하지만 그의 말과 달리 도로에는 택시가 없었다. 엄동설한에 얼음 위를 한 시간 동안 기어오느라 발은 동상에 걸렸고, 얼어붙은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석 씨는 희망을 잃지 않고 중국 마을 쪽으로 도로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걸었지만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반대방향으로 한참을 돌아와 강을 건넜던 처음 위치에 도달했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고, 동이 트기 시작했다. 그 때 멀리서 차량 한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놀란 석 씨는 잽싸게 길 옆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수풀에 천천히 다가서다 멈춰선 차량에서 “네가 어제 넘어오기로 한 얘냐”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찾던 택시였다. 택시 기사는 “(자기도) 온 밤을 헤맸다면서 이렇게 만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석 씨가 택시에 타자마자 기사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건네주었다. 전화 속 목소리는 분명 어머니 목소리였다. 하지만 말투가 너무 달랐다.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데 20% 정도만 이해됐다.
“나는 지금 나사렛대학교를 다니는데 하나님이 너를 무사히 인도하실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에 머리 속으로 “대학이 아니고 대학교? 하나님은 누구? 어머니는 중국에 있는 것이 맞나?”라는 의구심만 잇따랐다. 그때까지도 그는 어머니가 중국에 있는 줄로 알았다.
나중에 안 사실은 어머니가 탈북 후 중국 남부 선전에서 한국 기업 에서식모로 일하다가 2년 뒤인 2008년에 한국으로 왔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한국에 와서 외할아버지 형제들을 모두 만났다. 외할아버지는 집안의 장손이었고, 전쟁 때 동생들을 남겨둔 채 군에 들어갔다는 사실도 그 때 알았다.
● 태국에서 겪은 첫 수감생활
한국으로 오는 과정은 어머니가 잘 연결을 해준 덕에 다른 탈북민에 비해선 훨씬 순탄했다.
심양이란 곳까지는 혼자 왔다. 하지만 이후부턴 도착하는 곳마다 다른 탈북민들이 합세했다. 중국 남부 쿤밍에 이르렀을 때는 일행이 30여 명이나 됐다. 이 가운데엔 여성과 아이가 20여 명이나 됐다. 남성은 대여섯 명에 불과했다. 석 씨처럼 탈북 후 곧바로 한국행 길에 오른 사람도 없었다.
남쪽으로 이동할 때마다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북에서 나올 땐 외투를 껴입었는데, 보름 뒤엔 얇은 티셔츠만 입었다. 브로커들은 옷을 한 배낭씩 메고 와 일행들을 갈아입혔다. 살펴보니 먼저 떠난 사람들이 입었던 옷들 같았다.
밤새 이름을 알 수 없는 산을 넘었더니 라오스란 곳에 도착했다. 또 몇 시간 뒤엔 태국이라고 했다. 그는 일행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태국에 도착하면 경찰에게 한시라도 빨리 체포되는 것이 유리하다고 해서 큰 도로 가운데로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헤매던 도중 누군가의 신고를 받은 태국 경찰이 나타났다.
태국 감방 생활은 힘들었다. 고생했던 다른 탈북민들에겐 견딜만한 수준이었지만, 첫 수감생활을 경험하는 석 씨에겐 고통스러웠다.
감옥 안에서도 그는 자서전을 썼다. 북한에서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는 과정의 기록이었다. 마침내 탈북 2개월 뒤인 2011년 4월 한국에 도착했다.
태국 감방에선 밥을 하루에 두 끼만 주었는데, 항상 똑같은 메뉴인 밥과 닭죽만 나왔다. 반면 한국의 조사기관에서 주는 밥은 무척 맛있었다. 빵과 우유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그 덕에 삐쩍 말랐던 몸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
하나원에 갔을 때 어머니가 면회를 왔다. 북에 있을 때 그는 어머니가 중국에서 사는 줄 알았다. 친척들이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2011년 9월 마침내 그는 하나원을 나왔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는 천안으로 갔다. 당시 17세인 그는 고등학교 2학년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는 주변지인들의 권고를 받고 일반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 검정고시 만점으로 연세대 입학
한국에서의 학교생활은 혼란스러웠다. 두 살이 많아도 밝힐 수가 없었다.
북한에서 군 대표로 선출됐던 실력이라 여기서도 과학은 어렵지 않았다. 학교 과학중점반에 들어가 물리, 화학, 생물 등 평소 그가 좋아하던 과목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교내외 경시대회에도 자주 출전해 꽤 많은 상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영어가 너무 어려웠다. 맞춤법을 새로 공부해야 하는 국어는 더 어려웠다. 어머니가 힘들게 공장에 가서 돈을 벌다보니 학원이나 과외를 받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는 국어를 익히기 위해 무작정 많은 책을 읽고 시와 시나리오를 썼다. 그랬더니 언젠가부터 국어가 교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과학도가 되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어느새 시와 수필, 소설을 쓰는 시간이 많아졌다. 고등학교 때 쓴 단편소설 ‘늑대일기’는 탈북민의 이야기를 반려견의 시각으로 서술한 독특한 소설이었는데 선생들이 보고 매우 좋았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다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3 때 위기가 찾아왔다. 어머니가 공장에서 일하다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쓰러졌던 것이다. 집에서 돈을 벌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그는 학교를 중퇴하기로 결심했다.
젊은 담임선생은 자신의 월급에서 용돈을 떼어 너에게 줄 테니 계속 학교를 다니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석 씨는 이런 도움의 손길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사지가 멀쩡한데 왜 도움을 받아야 되냐”는 반발심만 생겼다.
믿는 구석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그는 영상을 제작하는 방법을 처음 접했는데, 촬영을 독학으로 파고들어 영상 제작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면 대학을 가지 않고도 평생 먹고 살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햄버거 체인점에서 일하며 반 년 동안 열심히 돈을 벌었고, 점차 생활이 안정됐다. 미성년자라 나오지 않았던 정착지원금도 이때쯤에 나왔다. 다시 공부를 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다.
하지만 나이가 많아 다시 고등학교를 가진 못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를 담당했던 천안 서북경찰서 형사는 그가 검정고시학원에 다닐 수 있게 금전적으로 지원했다.
석 달 동안 학원에 다닌 뒤 치른 검정고시에서 그는 7개 과목에서 모두 만점을 받았다. 검정고시라고 해도 만점 득점자는 내신 1등급으로 인정해주었다. 그는 어느 대학을 갈까 고민하다가 연세대를 지목했다. 그가 좋아하는 시인 윤동주가 다닌 학교라는 사실에 매력을 느꼈다.
2016년 그는 소원대로 연세대 전기전자공학부에 입학했다. 문학을 좋아하긴 했지만, 가족 내력 때문에 공학도가 되겠다는 꿈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게다가 연세대엔 문예창작과가 없었다.
● 이한열문학상을 수상하다
대학 생활 초기는 즐거웠다. 그는 동기들에게 굳이 탈북민임을 드러내지 않았다. 커뮤니티마다 리더를 자처하고 사람들과 잘 지내니 동기들은 그를 과대표로 추천했다.
과대표를 하면서 대동제, 주점행사, 합동응원전 등을 주도했다. 연세문학회에 가입해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다.
입학 다음해엔 연세문학회 회장으로도 선출됐다. 이후 연세대 총동아리연합회 창작예술분과장, 영화동아리 부회장 등을 맡으며 한국 학생들과 잘 어울리게 됐다.
하지만 대학 과정에 느낀 교훈도 있었다. 전공과목은 대체로 재미있고 따라갈 수 있었지만, 수학이 너무 어려웠다. 전공에서 난관에 부딪치자 그는 미래를 다시 그려보았다.
대학 졸업 후 회사원이 된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 같이 보였다. 반면 문학 분야에선 주변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특히 2017년에 쓴 시 ‘타투’는 이한열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타투의 내용은 길지 않다.
“타투.
날이 찬 오늘은 시린 당신의 발을 찾고 있습니다. 버선발에 덧신을 동여매도 얼어 죽을 것 같았던 그 겨울은 처마 아래 고드름이 참 예뻤습니다. 허기진 날에는 당신이 저녁마다 붙여 두었던 가마 솥 누룽지를 생각합니다. 토끼가 먹는 풀을 뜯어다 사람도 함께 나눠 먹을 때 이태백이 놀던 달에 나도 올라 앉아 쿵쿵 절구를 찧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유족보다 더 슬퍼하는 문상객에게는 허리를 더 굽혀 인사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보다 덜 아픈 사람들이 먼저 세상을 떠날 때 당신의 아픔이 덜 무거워 보이는 착시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몹시 아프게 지워버린 이름에게 부름을 돌려주려고 나왔습니다. 피부마다 바늘을 찔러 넣어 떨어진 낙엽들을 피워내겠습니다.”
심사를 맡았던 시인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는 “(석 씨가) 투고한 작품들 수준이 고른 편이어서 시를 보는 수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삶을 대하는 진지함과 언어를 부리는 상상력도 믿음직하다”는 심사평을 남겼다.
석 씨는 ‘꽃제비와 까치’라는 수필로 광화문 글판 에세이쓰기 대회 특별상을 수상했고, 대학생 때 여성부 장관상도 받았다. 이때 받은 상금으로 그는 카메라를 샀다. 늘 꿈을 꾸던 촬영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첫 단편영화 ‘연음’은 이렇게 나왔다.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글로만 머물던 자신의 이야기를 영상화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다. 한 해 뒤엔 서울시의 한 프로젝트에 참여해 ‘데자뷔’라는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영화를 열심히 만든 이유는 ‘영화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 어느 평론가의 말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고, 점차 노하우를 익혔다. 이 과정에 미래에 대한 꿈도 달라졌다.
특히 2019년 영국대사관이 주관한 프로그램에 당선돼 6개월 동안 런던 유학생활을 경험하면서 세상에 대한 자신의 시각이 좁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6개월 동안 그는 학업 외에 ‘런던으로 간 평양사람’이란 시나리오와 함께 ‘뉴몰든FC’라는 장편소설까지 썼다. 이 장편소설은 25세 대학생의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탄탄한 서사와 절도된 문체로 여러 작가들을 놀라게 했다.
초고를 오디오북으로 발간한 그는 아직도 이 소설을 끌어안고 수정하고 있다. 그만큼 이 소설에 대한 애정이 깊다. 그는 자신의 소설을 펴내줄 출판사를 찾고 있다.
● “석범진으로 살고 싶습니다.”
영국에서 돌아온 그는 학과장을 찾아가 국어국문학과로 전과 신청을 했다.
학과장은 석 씨가 코딩을 짜는 것보단 글쓰기에 더 소질이 있고, 회로설계보단 영화를 만드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엔 동감했지만, “누구나 박찬욱이나 봉준호가 될 수 없는데, 그래도 그 길을 가야 하겠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박찬욱, 봉준호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석범진이라는 사람이고 싶고 저만의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는 깊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라 마음을 바꾸진 않았다.
이듬해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자마자 코로나가 터졌다. 모든 수업이 비대면으로 진행됐지만, 그래도 국문과가 과학보단 훨씬 재미있었다. 성적도 덤으로 높아졌다.
코로나 기간에도 그는 짬짬이 ‘길섶’이라는 단편영화를 찍었다. 돈이 없어 자원해주는 형과 동생들을 배우로 써야 했고, 남들이 다니지 않는 외진 곳에서 한밤중에 찍어야 했지만 그래도 영화를 만드는 순간만큼은 행복했다.
2022년 연세대를 졸업할 때 마침 연세예술원이 생겨나 첫 학생들을 모집했다. 연세예술원엔 영화학과도 있었는데, 학생들이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도록 영화 제작에 필요한 장비나 제작비를 지원해주었다.
이미 대학 시절 4편의 단편영화를 찍었던 석 씨는 연세예술원에 지원해 합격했다. 20여 명의 영화학과 학생들 중엔 현직 촬영 및 조명 감독도 있었고, 작가도 있었다. 동기들이 서로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예술원을 다니며 석 씨는 한 걸음 더 성장했다. 2024년 예술원 주최 제1회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그가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또 영화학과 1기생 졸업 기념으로 장편영화를 만들게 됐을 때 예술원 교수들은 연출까지도 석 씨에게 맡겼다. 로케이션 섭외부터 배우 섭외까지 어느 하나 쉬운 일은 없었다.
예산은 1억 원으로 책정됐지만, 이중 7000만 원은 재능기부 등의 형태로 협찬을 받았고, 실제 들어간 돈은 3000만 원 정도였다. 이것으로 장편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석 씨는 해냈다. 돈이 없어 영화를 흑백으로 만들어야 했고, 스토리를 여러 번 바꾸어야 했지만 결국 70분짜리 영화를 7,8월의 땡볕 속에 촬영해 마무리할 수 있었다.
12월에 진행된 영화 림시교원 시사회는 석 씨에겐 영화계로 발을 내딛는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겐 꿈이 있고, 꿈을 향해 가기 위한 단계별 목표도 있다.
“제가 개인적으로 ‘두만강 감독’이라고 부르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두만강’과 ‘경계’를 만든 장률 감독, ‘무산일기’를 만든 박정범 감독, ‘아리랑’을 만든 나운규입니다. 장 감독은 두만강을 넘어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박 감독은 제 고향인 무산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탈북민의 삶을 다루었습니다. 나운규는 어릴 때 고향 회령에서 보고 들은 노래와 이미지를 영화에 접목한 감독입니다. 저는 이 감독들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고, 저도 앞으로 두만강 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의 머리 속엔 벌써 여러 시나리오로 꽉 차있다. ‘꽃제비’ ‘붉은 소년단원’ ‘다섯 소년에 대한 이야기’는 언젠가 영화가 돼 나올 것이다. 모두 소토지 세대와 장마당 세대의 삶을 그려내는 작품들이다.
“영화를 찍으면 상업영화를 찍어야 유명 감독이라고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저도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주류가 되지 못해도 독보적인 영화는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재미가 없어도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영화를 만들 순 있습니다. 저는 그 누군가가 되고 싶지 않고 저 자신이고 싶습니다. 영화의 힘을 믿는 한 이 길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