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1300과 1600년 사이에 피렌체에 그 많은 천재가 경쟁하듯 태어났는데, 왜 지금은 잠잠할까? 천재들은 여전히 존재하는데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럴까? 아니면 태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싶다.
대체로 천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수명도 길어야 한다. 너무 단명하면 재능을 제대로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화가로서는 더더욱 그렇다. 피카소처럼 장수하면 다양한 그림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겨우 37살에 죽었으나 온 세상을 놀라게 한 고흐 같은 화가도 있기 때문이다.
마사초(Masaccio1401-1428)는 고흐보다도 10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도 르네상스의 최고 화가의 반열에 올랐으니 대단한 천재다 싶다. 마사초는 피렌체 두오모(Duomo)에서 남동쪽으로 약 65km 떨어진 토스카나주, 아레조의 발다르노(Valdarno)에서 1401년에 태어났다. 그 마을은 포도밭으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시골이다.
그의 아버지는 공증인으로, 그가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다. 10세기부터 시작된 공증인 제도가 지금도 있는데, 노타이어라고 하여 변호사가 몇 년간 공부를 더 한 후 국가시험에서 합격하고 공증인 사무실에서 5년여 동안 실습을 마쳐야 한다. 집을 매매할 때 공증인의 사인을 필요로 한다. 그런 힘든 과정을 거쳤기 때문인지 거드름을 피우면서 손님을 맞이하는 꼴이란…….
마사초는 어머니가 늙은 약사와 재혼하는 바람에 의붓아버지를 따라 피렌체로 이사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시골에 묻혀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이 시대는 천재로 태어났으나 여건이 좋지 않아 재능을 썩혀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싶다.
마사초는 자신의 영혼과 의지를 오로지 예술에만 전념하고, 다른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지저분한 톰’, ‘얼간이 톰’, 이런 식으로 불렀다고 한다. 보통 10대는 이성의 관심 때문에 외모에 신경을 쓰고 멋을 부리게 되는데 말이다. 그는 조또의 작품을 묘사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그는 특별히 어느 화가에게 배웠다는 기록이 없고, 혼자서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1422년, 겨우 20세에 피렌체의 미술을 주도하는 메디치의 화가 조합인 길드(Artede’ Medici e Speziale)에 가입했다. 가입하게 되면 정기적으로 상당한 회비를 내야 하는데 말이다. 그것은 화가로서의 객관적 실력을 인정받았기에,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길드에 가입한 지 3달 만에 의뢰를 받아 왕좌에 앉은 성모 마리아, 두 명의 천사, 성인으로 구성된 3부작을 그렸고, 그림은 발다르노 인근 조베날레에 있다.
그는 건축가요 화가였던 부르넬레스키, 도나텔로를 사귀게 되었다. 그들은 마사초보다 20-30년 선배요, 이미 유명인 예술가이었다. 또한 1423-1425년에 많은 인물화와 프레스코 그림, 그리고 교회의 제단화를 그렸다. 겨우 스물두 살에서 스물네 살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이런 일은 음악계나 체육계가 아닌 미술 세계에서는 거의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겠다 싶다.
그는 그럴 정도로 뛰어난 천재였다. 그는 당시로는 획기적으로 누드화를 처음으로 그렸고, 공간과 빛과 색조의 효과를 적용한 원근법을 회화에 적용하였다. 그리고 사람의 감정 표현을 발전시켰다. 대상을 입체감 있게 표현했고, 자연광을 이용한 빛의 효과를 그림에 이용한 화가였다. 또한 그는 피렌체를 그림의 배경으로 끌어들인 첫 번째 르네상스 화가였다. 예술이나 학문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첫 번째로 시도하는 일이다. 이런 일은 천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와 나이 차가 많은 부르넬레스키나 도나텔로 같은 대선배들도 그의 천재성을 보았기 때문에 교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1423년, 20대 초반에 부르넬레스키의 권고와 격려로 마셀리노와 함께 로마로 떠났다. 로마에 산재한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작품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부르넬레스키가 로마와 그리스의 고대 건축을 공부하려고 17년 동안을 몸부림치면서 습득하게 된 지식이 많았기에 로마 유학을 권고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 영향을 크게 받았는지, 그 시기부터 화려한 장식의 고딕 양식에서 벗어나 더욱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한 정황을 그의 작품을 통해 보게 된다.
그는 그 당시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그 중 대표작으로 피사의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Santa Maria del Carmine) 교회의 브랑카치 기도소(Cappella Brancacci)에 마셀리노와 함께 구약과 신약의 내용을 주제로 그렸다. 이 프레스코화(추방당하는 아담과 하와)는 르네상스 미술의 효시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의 성삼위일체는 원근법을 최초로 적용한 그림이다. 그리고 1425년(24세)에 산타 마리아 교회에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에서 사람의 감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또한 원근법을 완벽하게 적용하여 그린 성삼위일체 그림을 미켈란젤로가 습득하여 바티칸의 천지창조에 적용했다. 미켈란젤로뿐 아니라 그 이후의 화가들은 음으로 양으로 그의 미술 기법에 많은 빚을 졌다. 그 삼위일체 그림 하단에 해골로 남아 앙상하게 누워 있는 전신을 그려놓았고, 이런 글을 적었다. “Io fui gia quel che voi siete quel ch’io sono voi anco sarete.”(“나는 한때 지금의 너였고, 지금의 나는 네가 될 것이다.”) 덧없는 인생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안타깝게도 한창 왕성하게 일할 시기인 27세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미술 평전을 쓴 바사리는 그를 시기하는 자들에 의한 암살이라고 언급했다. 천재들은 항상 주변으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먹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가 당시의 보통 사람들만큼만 더 살았더라면 그림의 지평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렇게 단명한 삶이었기에 신은 그의 젊은 나이에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하셨을 수도 있겠고……
그는 로마에서 죽은 지 15년 후에 시신이 그리운 고향, 피렌체의 카르 멜 교회로 옮겨졌다. 초라했던 묘지에 한 세기도 더 지난 후에 시인 안니발레 카로(Annibale Caro1507-1566)가 이런 비문을 썼다. “나는 그림을 그렸고, 내 그림은 삶과 같았다. 나는 내 인물들에게 움직임, 열정, 영혼을 주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사람을 미켈란젤로가 가르쳤다. 그는 나에게서 배웠다.”
그가 요절하자 가장 슬퍼한 사람이 부르넬레스키였다. 그를 잃어버린 것은 비할 데 없는 큰 손실이라고 비통해했다. 그는 단명했으나, 르네상스 예술의 지평을 업그레이드시킨 위대한 천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