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의료선교사들과 한국교회’
한국개혁주의연구소가 ‘초기 내한 선교사 6번째 세미나’를 2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유나이티드문화재단 더글라스홀에서 ‘초기 내한 의료선교사들과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이날 2부 논문 발표회에서는 이승구 석좌교수(합동신대) 사회로 강덕영 장로(유나이티드문화재단 이사장)의 격려사 후 신학자들의 발표가 이어졌다.
로제타 홀 선교사의 의료·장애인 선교
먼저 박응규 명예교수(ACTS)는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의 의료 및 장애인 선교와 한국 교회사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박 교수는 “로제타 홀은 여성병원과 의료선교를 통한 한국 여성들을 위한 선교거점을 확보, 그 이후 선교 발전이나 각 분야 우수한 근대 여성 지도자들을 키우는 데 지대한 공로를 남겼다”며 “여성과 아동을 위한 의료사업 확대를 위해서는 여성병원을 많이 설립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인의 진보된 사고이며, 가장 무시받고 소홀한 대접을 받고 있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병원이 기독교 이상에 더 부합한다는 이상과 그에 따른 헌신과 희생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 여성들과 어린이들에게 지대한 영향과 혜택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특히 당시 남존여비 사상 혹은 내외법 관습으로 서양의학 혜택에서 소외되기 쉬웠던 여성들에게 기독교 신앙과 서양의학, 그리고 서양문화를 접할 기회를 제공했고, 이 과정에서 여성 선교의 거점이자 보루로서 그 역할을 잘 감당했다”며 “다양한 여성 의료기관을 통해 한국 여성들에게 전도부인, 간호사, 의사 등 직업 여성의 모델과 의학을 통한 근대 지식 탐구 계기를 제공함으로 여성들의 개화와 근대의식 함양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 “로제타 홀은 조선 최초 서양의학 여성병원인 보구여관, 서울 동대문 볼드윈 진료소, 지방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병원인 평양 광혜여원을 설립하고 운영했고, 무엇보다 여의사로서 진료하며 복음을 전도하는 가장 중추적 역할을 감당한 인물”이라며 “한국인 최초 양의사 박에스더를 비롯한 많은 초기 의료인을 배출하고 많은 의료기관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동대문에 세운 볼드윈 진료소는 오늘날 이화여대 부속병원으로 발전했고, 남편 윌리엄 홀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기홀병원은 평양연합기독병원으로 확장됐으며, 평양 광혜여원과 인천 부인병원을 세웠고, 여성 의료인 배출을 위한 경성여자의학강습소는 오늘날 고려대 의과대학으로 자리잡았다”고 소개했다.
박 교수는 “일찍이 사범학교를 다니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로제타 홀은 교육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평양 여성들을 치료하기 위해 세운 광혜여원 옆에 우리나라 최초 맹아학교를 설립하고, 직접 점자책을 만들어 맹인소녀들을 교육했다”며 “맹아학교가 자리잡은 후 농아학교를 세워 우리나라 특수교육 기반을 닦았다. 한국 특수교육학계도 로제타 홀이 한국 최초의 근대 특수교육을 시작한 선구자라고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1894년부터 로제타 홀은 점자 사용법을 개발해 한국 최초 시각장애인 교육을 시작했고, 1909년 청각장애인 교육으로 확대했다. 로제타 홀이 운영하던 시각장애인 교육기관은 한국 근대 특수교육의 요람이었다”고 전했다.
박응규 교수는 “평양에서 오랜 세월 여성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사랑을 실천한 로제타 홀은 ‘평양의 오마니’로도 불렸다. 조선 여성을 해방시켰다 하여 노예를 해방시킨 링컨과도 비견됐다. 나아가 로제타 셔우드 홀 여사는 우리나라 근·현대사 이해에 있어 반드시 연구해야 할 인물”이라며 “한국 기독교회사 및 선교사(史)와 여성사, 교육사, 그리고 의학사까지 그녀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한 인물이 한 시대와 사회에 이렇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사례는 찾아보기가 아주 힘들 것”이라고 평가했다.
맥라렌 선교사의 진주 배돈병원 선교
이어 민성길 명예교수(연세대)가 ‘맥라렌 선교사, 진주 배돈병원, 세브란스 그리고 신사참배 반대’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맥라렌 선교사(Charles Inglis McLaren, 馬羅連, 1882-1957)는 호주 장로교 의료선교사이자 정신과 의사로서, 1911년 부인과 같이 한국에 와서 32년간 진주 배돈병원과 세브란스 정신과 교수로 사역하다, 1942년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감옥과 연금 생활을 한 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했다.
신경정신과 의사였던 맥라렌 선교사는 1911년 부인과 함께 호주 장로교 선교부에 의해 진주 배돈병원(培敦病院, Margaret Whitecross Paton Memorial Hospital)으로 파송받았다. 3년간 원장 커렐 선교사(Hugh Currell, 거열 또는 거열휴, 1871-1943)를 돕고, 그가 귀국한 뒤 1915년부터 1923년까지 원장으로 봉사했다. 당시 진주는 경상남도 도청소재지로서 서부경남의 중심이었으나 근대 병원이 없었고, 배돈병원을 통해 교회 설립도 본격 시작됐다.
민성길 교수는 “맥라렌은 병원에서의 진료 활동에도 복음 전파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직원과 환자들을 위한 예배를 매일 드렸고, 병원에 외래환자와 각 병실 선교를 위해 전도사와 전도부인이 상주했다”며 “맥라렌은 배돈병원에서 일하면서, 클라크·라이알·맥크레 등 선교사들과 진주 지역교회들을 돌보기 위해 여러 마을들을 여행하기도 했다. 순회 기간 중 짧게나마 환자 진료도 하고, 마산까지 가서 집회를 갖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민 교수는 “맥라렌은 일본에서 태어나 식민지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일본의 국가주의와 신도주의, 곧 신도국가주의(Shinto Nationalism)의 본질과 신사참배 강요의 깊은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며 “그는 신사참배 강요를 성경 말씀, 특히 요한계시록에 의거해 분석했다. 그는 불의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싸울 것인가 평화할 것인가 고민하다, 새로운 해결 차원을 발견했다. 즉 전쟁의 신, 배신자나 공격자에 대한 신체적 저항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반대되는 진리를 증거함’으로써 곧바로 반격했다. 때문에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체포돼 수감됐고, 석방 후에도 약 3개월간 연금 생활을 하다 호주로 돌아갔다”고 했다.
민성길 교수는 “맥라렌은 기독교 선교사로서 한국인을 사랑하고, 정신질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환자들을 돌보고, 젊은이들의 가능성을 믿고 교육을 시켰고, 성경과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 그의 독특한 의학철학과 인도주의 사상을 제시하고 실천했다”며 “그는 열정적으로 성경을 탐구하고, 기독교를 전하며, 환자를 돌보고, 영적 의학을 추구했다. 그런 그에게 신사참배 반대는 너무나 당연했다”고 밝혔다.
민 교수는 “맥라렌은 슈바이처와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같은 시대, 같은 선교사, 같은 의사, 그리고 다같이 미지의 땅에서 봉사했다. 그러나 슈바이처와 달리 맥라렌은 사상적으로 보수 신앙을 견지했다”며 “그는 동양사상을 존경했으나, 슈바이처와 달리 이를 자신의 신앙과 혼합하지 않았다. 그는 “공자와 맹자의 위대한 가르침이, 내가 가진 보잘것없는 지식에 그리고 내가 치료 도중 곤란함에 빠질 경우, 때때로 내게 길을 비춰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으로 거듭 돌아가게 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맥라렌은 무엇보다 한국인 후학을 교육시켰고, 세브란스 정신과에 후계자를 남겼다. 이 점이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다른 점”이라며 “안타깝게도 그의 가르침은 세브란스 내에서 체계적으로 계승되지 못했다. 그의 제자 이중철 교수는 일제 말 스승의 길을 따라 학교를 떠났고, 세브란스 신경정신과는 문을 닫았다. 그러나 소수이지만 지금도 그의 제자들의 후예들이 맥라렌 교수의 가르침을 이어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끝으로 “현재 의학에는 다양한 첨단 이론과 기술들이 발달하고 있으나, 그가 몸소 보여 준 바 일정하고 견고한 의학철학에 기초하고, 열정적이고 진지한 기독교적 태도와 신앙을 견지하면서, 환자를 돌보라는 가르침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도전이 된다”며 “끝으로 한 가지 제언한다. 늦은 감이 있지만, 과거 배돈병원이 기여한 바를 우리가 잊지 않도록 기념하는 무언가를 진주에 만들어 남기는 일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해방 전까지 의료 선교사 350명 방한
마지막으로 이상규 석좌교수(백석대)가 ‘미국 남장로교의 의료선교’라는 제목으로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지역 곳곳에서 펼친 의료선교 활동에 대해 발표했다.
이상규 교수는 “기독교가 한국에 소개되기 전 의료 실태는 경험적 의술 일종인 한의학 외에 비과학적 샤머니즘과 관련된 민간요법에 의존하는 전근대적 의료수준에 머물고 있었다”며 “그러나 기독교를 통해 서양 의술(Western medicine)과 접촉하면서, 기독교의 선교병원은 한국에서 서양 의술의 수용과 전파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884년 알렌(H. G. Allen) 의사 입국 이후 해방 전까지 350여 명의 의료 선교사들이 내한해 서울을 비롯한 평양, 선천, 원산, 강계, 부산, 대구, 진주, 전주, 광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활동했다”고 밝혔다.
이 교수에 의하면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는 북장로교보다 8년 늦은 1892년 시작됐다.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와 부인(Patsy Bolling), 루이스 테이트(Lewis B. Tate)와 여동생 메티 테이트(Mattie S. Tate), 리니 데이비스(Linnie Davis), 전킨(William M. Junkin)과 부인(Mary Leyburn) 등 ‘7인의 선발대’가 1892년 10월 17일과 11월 4일 내한해 개척자가 됐다.
이어 1893년 유진 벨(Eugene Bell) 목사 부부, 드류 의사(A. D. Drew, MD)에 이어 1894년 윌리엄 해리슨(William Harrison) 목사, 1895년 잉골드(Miss Mattie Ingold, MD) 의사, 1897년 오웬(Rev Clement Owen, MD) 의사 등이 입국해 전주(1896)와 군산(1896)을 시작으로 목포(1898), 광주(1904), 순천(1913) 지부를 각각 설치하고 호남 전역에서 사역하게 된다.
전라도 지역 병원의 경우 전주 지부에 전주야소(예수)병원, 군산 지부에 군산야소병원, 군산구암야소병원, 목포 지부에 목포양동병원, 프렌치기념병원, 광주 지부에 제중원, 광주양림병원, 광주기독병원, 순천 지부에 안력산 병원 등을 설립했다.
이 교수는 “남장로교는 이 5개 선교지부를 통해 사실상 전라도에서 서양의료 행위를 독점했고, 세브란스에도 의료진을 파송해 연합사역에 협력했다. 환자 진료와 치료 병원, 나환자 보호와 치료 외에도 의사·간호사 양성, 위생 및 환경개선 등에도 관여했다”며 “남장로교는 의료활동을 복음전도의 부수적 활동으로 간주했다. 전주 예수병원 설립자였던 잉골드는 이 정책을 수용하고 이 정신을 성실히 이행하려 노력했다. 그래서 전도사업에도 힘을 썼고, ‘유아 요리문답’이라는 책도 간행했다”고 소개했다.
이상규 교수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는 전라도에 5개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각 선교부별 의료활동을 전개했는데, 다른 장로교, 감리교 선교부도 이와 마찬가지로 각 선교지부에서 의료활동을 전개했다”며 “이들 병원은 대부분 1940년까지 유지됐고, 대동아 전쟁 전후 다수 병원은 폐쇄되고 일부는 한국인에게 이양 또는 양도됐다”고 전했다.
이 외 병원의 경우 미국 북장로교가 1885년 4월 서울에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한 후 감리교의 시병원(施病院, 1885. 9), 북장로교의 보구녀관(普救女館, 1887)이 설립됐고, 서울 외에도 여러 선교병원들이 설립됐다. 즉 전킨 기념병원(부산, 1891), 래드병원(평양, 1893), 기홀병원(평양, 1897), 구세병원(원산, 1896), 동산병원(대구, 1897), 미동병원(선천, 1901), 던칸기념병원(청주, 1903), 아이베이병원(개성, 1907), 제혜병원(함흥, 1908), 게례지병원(강계, 1909), 배돈병원(진주, 1913) 등이다. 1913년까지 남장로교 선교 지역을 포함해 전국에 3개 진료소, 30개 선교병원이 운영되고 있었다.
끝으로 “남장로교는 5개 선교지부에서 효과적인 의료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의료선교 활동이 남긴 공헌은 첫째, 기독교적 자애에 기초해 한국인들을 치료해 재활, 재생의 길을 가도록 도움을 줬다. 둘째, 서양 의술 전파를 통해 한국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며 “셋째, 의학교육과 의사, 간호사 등 의료인 양성에 기여했다. 넷째, 예방·시약·치료, 공중위생 및 보건증진 등을 통해 보건 의식 함양 및 의료 환경을 개선해 결과적으로 한국의 사회발전에 기여했고, 한국인 삶의 질을 향상시켜 복음 전파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짚었다.
앞선 1부 예배에서는 오덕교 총장(횃불트리니티대) 인도로 안명준 초빙교수(한국성서대)의 기도 후 현창학 특임교수(합동신대)가 ‘감사의 기적(대하 20:20-26)’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