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따라잡기] 우크라이나 전쟁 3년차…크름반도 병합 10년


뉴스의 배경과 관련 용어를 설명해 드리는 ‘뉴스 따라잡기’ 시간입니다. 2022년 2월 24일에 시작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이 3년째를 맞게 됐습니다. 또 이 전쟁의 전초전 격이었던 러시아의 크름반도(크림반도) 합병은 꼭 10년 전의 일입니다. 전선은 장기간의 소모전으로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가, 최근 들어서는 러시아에 유리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데요. 뉴스 따라잡기 이 시간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의 크름반도 병합과 현재 전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3년째 접어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초기, 이번 전쟁이 2년을 넘길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현재 전황에 대해 미국 언론들은 우크라이나군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러시아군이 최근 약 970㎞에 달하는 거의 모든 전선에서 우크라이나군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러시아군이 바흐무트와 아우디이우카 등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의 5개 주요 전선에서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을 뚫으려 한다고도 전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서방 세계가 공급해주는 자원을 바탕으로 대부분 전선에서 방어에 주력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반면, 러시아는 돈바스를 포함해 우크라이나 영토 20% 정도를 장악하고 있는데요. 10년 전 크름반도를 점령한 것이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주요 지역과 러시아 등 주변 국가

“복잡다기한 크름반도의 역사”

러시아는 꼭 10년 전인 2014년 2월 크름반도를 사실상 강제 합병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최남단에 있는 크름반도의 역사는 매우 복잡합니다.

러시아제국은 부동항을 얻기 위해 남하하다 18세기 후반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승리한 뒤 크름반도에 있던 크림칸국을 독립국으로 만든 뒤 합병했습니다. 이후 남진을 시도하는 러시아를 영국과 프랑스가 막아섰다가 전쟁이 발발하고 러시아는 통제권을 상실합니다.

크름반도는1919년 러시아혁명 이후 크림타타르인에 의해 일시적으로 독립했다가 1921년 소련에 편입됩니다. 이때는 소련의 크림자치공화국으로 불렸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에 장악됐다가, 독일이 소련에서 물러난 1944년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그간의 반동 행위를 처단한다면서 크림타타르인 20만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했습니다.

인종청소가 끝난 뒤, 크름반도는 자치주로 격하됐다가 1954년 우크라이나 태생이던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연방으로 편입됩니다. 당시 3분의 2 정도였던 러시아계 인구는 점점 늘어나 90%를 차지할 정도가 됐습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될 무렵 러시아계 주민들의 요구로 이 지역은 다시 크림자치공화국이 됩니다. 그러다 1997년 흑해함대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국 해군 관할로 분할되고, 러시아는 세바스토폴에 흑해함대를 주둔시키는 조건으로 크름반도를 우크라이나 영토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민의 상당수가 러시아계였던 탓에 우크라이나 정부와는 크고 작은 갈등이 계속됐습니다.

크름반도(크림반도)와 주요 도시 세바스토폴


크름반도(크림반도)와 주요 도시 세바스토폴

“2014년 2월 러시아의 크름반도 합병”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014년 부활하는 러시아의 힘을 과시하듯 전격적으로 군대를 투입해 크름반도를 장악했습니다. 그러면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코소보 사태에 개입한 명분을 크름반도 합병의 구실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세르비아계에 의해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학살당한 코소보 사태를, 크름반도 분쟁과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실제로 당시 크름반도에서 러시아계 주민들에 대한 위협은 전혀 없었습니다.

크름반도를 점령한 러시아는 자국민 보호차원에서 합병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와 서방세계는 러시아가 주권 국가의 영토를 무단으로 침범했다고 반박합니다. 러시아의 군사행동은 유엔헌장과 안보리 결의에 대한 위반이라는 것입니다.

지난해 4월 벨기에 브뤼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본부에서 핀란드 국기 게양식을 거행하고 있다. (자료사진)


지난해 4월 벨기에 브뤼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본부에서 핀란드 국기 게양식을 거행하고 있다. (자료사진)

“북대서양조약기구 동진…바르샤바조약기구 해체”

나토는 2차 대전 이후 국력이 쇠잔했던 서유럽에 큰 위협 세력인 소련의 확장을 막아내고 독일을 통제하기 위해 미국이 주도해 만든 동맹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련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뒤에도 나토는 팽창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가 회원국이 되더니, 21세기 들어선 소련의 일원이었던 발트 3국도 나토 회원국이 됐습니다. 냉전 시기 나토에 맞서 만들어졌던 바르샤바조약기구가 1991년 이미 해체된 뒤의 일이었습니다

한때는 나토와의 군사협력까지 타진하던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 집권 이후 나토 확장에 반발했습니다. 나토 경계선이 자국의 국경 쪽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인식한 것입니다.

하지만 나토는 냉전 이후 세계 평화에 대한 임무를 확대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전까지 나토의 주 임무는 전 세계 주요 대테러 작전과 평화유지,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에 초점을 맞춰왔습니다.

“숫자로 보는 양국의 인명피해 규모”

전쟁이 3년째로 접어들면서 희생자 규모도 커지고 있습니다. 유엔 보고서는 전쟁 발발 이후 2024년 1월까지 우크라이나에서 민간인 사망자가 1만200명, 부상자는 1만9천300명이라고 집계했습니다. 러시아 측 민간인 희생자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양국 군대의 희생자 규모는 더 큽니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현재까지 자국의 장병 4만 2천 100명이 숨졌다고 밝혔고, BBC 러시아어 방송은 러시아군 4만 3천400명이 숨졌다고 보도했습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자료사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자료사진)

“크름반도 수복 다짐하는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모든 것은 크름반도에서 시작됐다면서, 러시아에 빼앗긴 크름반도를 수복하겠다고 누누이 다짐해 왔습니다. 2014년 3월 크름자치공화국 의회가 러시아와의 합병을 결의한 것부터 문제 삼았습니다. 정당한 자결권 행사가 아닐뿐더러 주민투표도 엉터리였다고 합니다. 투표용지에 러시아 편입에 반대하는 기표란이 없어 아예 반대 의사를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는 것입니다.

3년째로 접어든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갖은 변수로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동부 지역과 크름반도 수복을 선언했지만, 서방 세계 지도자들의 속마음은 달라 보입니다. 지난여름 우크라이나의 야심 찬 ‘대반격’은 좌절됐고, 전황은 우크라이나에 불리한 국면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푸틴 대통령과 다시 손을 잡으면, 세계 정세는 또 어떻게 요동칠지 앞날은 매우 불투명합니다.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국방장관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국방장관

최근 뉴스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인물을 소개하는 ‘뉴스 속 인물’ 시간입니다. 오늘 주인공은 차기 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 유력한 프라보워 수비안토 국방장관입니다.

지난 14일 실시된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국방장관인 프라보워 수비안토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현직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장남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기 때문에 사실상 현 대통령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프라보워 수비안토 국방장관은 인도네시아의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올해 72세입니다.

프라보워 장관은 인도네시아에서 매우 영향력이 있는 명문가 출신입니다. 할아버지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국영은행 네가라은행의 창립자이면서 인도네시아 독립에도 기여했습니다. 식민지 시절 네덜란드에 유학한 엘리트 경제학자였던 아버지는 당시 수하르토 대통령에 의해 발탁돼 통상장관과 재무장관을 역임한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이었습니다.

유복한 집안의 자제였던 프라보워 장관은 학창 시절부터 영국, 스위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해외에서 수학한 덕에 영어를 비롯한 다양한 외국어에 능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활약하면서 육군 최정예인 특전사령관과 전략예비사령관을 거쳐 중장까지 진급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나 거칠 것이 없었던 프라보워 장관의 앞길을 막은 것은 인권탄압 논란이었습니다. 결국 1998년 인도네시아 정치적 격변 가운데에서 불명예 예편을 하게 됩니다.

같은 해 수하르토 대통령까지 실각하자 대통령의 딸과 이혼하고 요르단으로 망명했는데요. 귀국한 뒤 사업가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남동생인 하심과 함께 제지회사를 인수해 경영했고 이후 대기업 ‘누산타라 그룹’을 일궈 큰 성공을 거둡니다.

정계에 입문한 것은 2004년입니다. 이어 2008년에는 그린드라당(위대한인도네시아운동당)을 창당했습니다. 그린드라당의 대통령 후보로 2014년과 2019년 대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습니다. 두 차례 대선의 승자는 공교롭게도 현 조코 위도도 대통령입니다.

프라보워가 또다시 주목받은 것은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그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한 2019년이었습니다. 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조코 위도도 대통령에 의한 발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번 대선에서 현직 국방장관이면서 야당 대표였지만,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지지를 등에 업고 출마했는데요. 표본 조사 개표 결과, 득표율이 6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자,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공식적으로 승리가 확정되면 오는 10월에 인도네시아의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해 살펴봤고요. 뉴스 속 인물로 차기 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 유력한 프라보워 수비안토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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