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주 성도가 10명 정도 모이는 작은 교회의 담임목사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교회의 목사에 불과한데 목회 칼럼을 쓰자니 부끄러움이 앞선다. 부족하지만, 이 글을 통해 조금이라도 힘을 얻는 목회자나 성도가 있다면 감사할 것 같아서 마음을 잡고 글을 쓴다.
먼저 나를 소개하자면, 나는 사지마비 중증장애인이다. 전혀 일어나 걷지 못하고 전동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며, 팔도 쓸 수 없어 혼자서는 밥을 먹지도 못한다. 세수도 못하고 물도 마시지 못한다. 물론 연필을 잡고 글을 쓸 수도 없다. 책을 넘길 수도 없어서 항상 누가 책을 넘겨줘야 책을 읽을 수 있다. 한마디로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 말고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생활할 수 있다.
그러면 이 글은 어떻게 쓰고 있을까? 스마트폰의 음성인식 기능으로 메모장에 글을 쓰고 오탈자를 정리해 원고를 마무리한다. 다행히 요즘은 스마트폰 음성인식 기능이 좋아져서 그나마 오타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물론 주일마다 하는 내 모든 설교도 이렇게 작성한다.
이쯤 되면 내가 언제부터 온몸을 쓰지 못하게 됐는지 다들 궁금해한다. 때는 1998년 12월로 돌아간다. 나는 그때 대학교 4학년이었다. 내 목뼈 속에 종양이 생기고 그 종양이 경수 신경을 누르는 바람에 나는 목 이하를 쓸 수 없는 사지마비 중증장애인이 됐다. 그때가 27살이었다.
나는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나는 시험장에서도 다른 보통의 사람과는 달리 여러 편의시설과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신대원 입학시험을 보기 전에 입학처에 전화로 문의했다. “나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는 중증장애인인데 입학시험 장소에 엘리베이터가 있나요? 나는 필기가 불가능합니다. 누가 대신 내 답안지에 답을 표기해 줄 수 있을까요?” 등을 문의했다. 그러자 너무 당황스러워하는 떨리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 왔다. “시험 장소는 1층으로 배정할 수 있는데……. 답안지에 마킹을 대신하는 문제는 내부 회의를 거쳐야 합니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교직원이 답안지에 대리 마킹을 해 줄 수 있다는 회신이 왔다. 신대원 시험을 보는 사람 중에 답안지에 답을 쓸 수 없어서 대신 써주는 사람이 필요한 경우가 그동안 없었던 것이다. 신대원 입학 전형 역사상 최초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이렇게 신대원에 입학했고 2015년 108회로 졸업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