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지 힘이 갑자기 한편으로 쏠리면 위험하다. 자동차든 사람이든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다. 그래서 균형 잡는 기술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걱정스러운 쏠림 현상이 있다. 교통의 발달로 더욱 가속화된 수도권 쏠림현상이다. 이전에는 지방에도 명문대학이나 명문고등학교가 있었다. 그리고 나름의 특성화로 유명한 시장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전국 어디서나 서울에 와서 점심 먹고 쇼핑하고 영화 보고 집에 돌아가 저녁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쏠림은 더 심해지고 운동장은 기울어져만 간다.
그래도 세상에는 이런저런 안전장치가 있다. 이를테면 수도권에는 진입장벽이란 것이 있다. 그것이 돈이든 학업 성적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 쏠림에 어느 정도 제동을 건다.
문제는 교회다. 교회는 누구도,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더욱이 코로나19로 자극받은 온라인이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쏠림을 부추겼다. 제주도까지 포함해 서울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서울의 유명 교회에 소속할 수 있게 했다. 이동 능력이 뛰어난 젊은이들의 쏠림 현상은 더욱 심하다. 직장이든 배우자든 선택의 폭이 넓은 교회로 몰리는 것이 이제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이렇게 한편으로 쏠리다 보니 점점 영향력을 잃는 교회들이 늘어난다. 젊은 세대는 줄어들고 희망이 보이지 않은 채 쪼그라든다. 이제 버티는 것조차 버거워 보인다. 이런 쏠림 덕에 몇몇이 살아남았다고 이기거나 산 것은 결코 아니다. 더 이상 유입될 길이 막히면 쏠림 혜택을 누리던 그들도 버티기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샛강이 마르면 큰 강도 마르는 법. 샛강이 살지 않고야 강이든 바다든 살겠는가? 이런 쏠림을 보며 교회 생태계를 고민한다. ‘네가 죽어 내가 사는’ 것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며 함께 죽음으로 가는 길일 뿐이다. 따라서 의식과 가치관을 바꿔야 한다. 교회의 메시지가 바른 길을 깨우치고, 성경적 가치관을 제시해 정상적인 균형을 잡도록 해야 한다. 내 교회를 살리겠다고 복음을 왜곡하지는 말아야 한다. 이런 고민을 하던 차에 일부 정치권에서 그렇지 않아도 쏠림이 심한 ‘서울’을 더 넓히겠다고 한다. 이래저래 ‘쏠림’에서 벗어난 균형 잡힌 세상 만들기가 너무 버거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