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칼럼] 죄에 대한 하나님의 두 안목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투 DB

◈죄를 현미경처럼 보심

‘현미경(microscope, 顯微鏡)’은 ‘생 눈’으로 보지 못하는 세균, 바이러스(virus)까지 본다. 전문가들은 깨끗해 보이는 손바닥도 현미경으로 보면, 화장실 변기에 붙은 세균 수보다 그것(손)에 붙은 수가 더 많다고 한다. 멀쩡해 보이는 손바닥이 그렇게 더럽다는 사실에 한 번 놀라고, 그것을 밝혀낸 ‘현미경의 위력’에 또 한 번 놀란다.

우리 죄도 그렇다. 우리 눈엔 죄로 여겨지지 않는 것도 ‘율법이라는 현미경’ 앞에선 적나라하게 그 실상을 드러낸다. 사람들이 다반사로 행하는 ‘형제에 대한 미움’과 ‘마음의 음욕’이 하나님의 눈엔 ‘살인’이요 ‘간음’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끌고 그 앞에 나온 이들에게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간 것(요 8:3-9)”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숨겨진 죄상(罪狀)을 보게 하니 자신들도 그녀와 다를 바 없는 중죄인임을 깨달은 때문이다.

심장과 폐부를 살피시는 그리스도 앞에서 비로소 자신들 죄의 적나라함을 보게 된 것이다. 이제껏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저해상도(底解像度)인 ‘엑스레이(X-ray)’에만 비춰왔기에, 자신들이 상당히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러다 이제 고해상도(高解像度)인 ‘MRI(Magnetic Resonance Imaging)’에 자신의 죄를 비춰봄으로 비로소 자기들의 죄의 실상을 보게 된 것이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10).”

◈용서한 죄는 다신 기억치 아니하심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현미경 식’으로만 보시지 않는다. 만일 그가 우리 죄를 그렇게만 보신다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 물론 우리 자신도 우리 죄를 그렇게만 봐선 안 된다. 그러면 죄의식에 매몰 돼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진다.

다윗이 범죄 후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시 40:12)”라 한 말은 죄의식에 매몰된 그의 심정을 표현한 것 같다(여기서 ‘내 마음이 사라졌다(my heart has failed me, NIV)’는 한국식으론 ‘혼이 나갔다’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죄의식에만 매몰돼 있지 않고 믿음으로 새 출발을 했다).

과거 청교도들 중 너무 자신들의 죄만 직시해 정신병자와 자살자들이 생겨났던 것도 이해가 될 만 하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죄를 적나라하게 보지 못하는 한계는 어쩌면 은혜일 수 있다(이 역시 ‘죄의 남용을 부추기는 빌미’로 오용될까 말하기 조심스럽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그가 우리의 죄를 사유(赦宥)하시는 분’이고, 나아가 ‘그가 한번 사유하신 죄에 대해선 기억조차 하지 않는 분’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를 그가 자신의 죄를 사유하신 때문이라고 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찐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시 130:3-4)”. 이 말씀에서 보듯, 그는 누구보다 죄의식이 많았던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철저하고도 완전한 사유를 믿었던 사람이었다.

이런 ‘완전한 죄의 사유’에 대한 성경의 약속들은 부지기수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34).”“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8:12).”

예수님이 죄인 삭개오를 향해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그의 죄를 철저하고 완전하게 사유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됐다’ 함은 ‘영원한 지위를 얻었다’ 함이고,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지위가 변개되거나 무효화되질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사유(赦宥)하시고, 그들의 죄를 기억치 아니하심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함’, 곧 ‘그리스도의 피’가 그들의 ‘과거·현재·미래’의 죄를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구속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사유(赦宥)하시는 하나님

죄를 ‘현미경’같이 보시는 하나님이 택자의 죄를 사(赦)하시고 그것을 기억지도 아니하시는 것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5).”

먼저는 사유(赦宥)받은 택자로부터 하나님이 영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고(엡 1:14), 다음으론 매일 인간의 죄에 대해 분노하시므로(시 7:11) 고통하셨던 하나님이 그들을 사유(赦宥)하여 ‘분노의 고통’이 멈추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분노와 그로 인한 고통’은 ‘죄인들의 죄 된 분노와 그로 인한 고통’과는 다른 ‘거룩한 의분(義憤)’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인간의 죄’가 어떻게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고 그를 괴롭게 하는가를 지적했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말 2:17)”.

예수님도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 유대인들에게 극노(極怒)하시는 것을 통해 인간의 죄가 그를 얼마나 분노케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가를 보여주셨다. 요한복음 2장 14-16절은 그것을 적나라하게 적고 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요 2:14-16).”

이러한 ‘하나님의 분노’는 ‘택자의 죄’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에게서 구속이 이뤄질 때까지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셨고, 그로 인해 고통당하셨다. 성자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통해 택자에 대한 분노가 풀어지고 그들을 사유(赦宥)하심으로 비로소 그의 고통도 그치셨다.

성자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하신 것은 그의 죽음이 하나님을 만족시켜 택자를 사유하심으로 마침내 ‘그의 분노와 고통을 풀어드렸다’는 뜻이고, 그 결과 ‘택자의 구속을 성취했다’는 뜻이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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