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역사위원회(위원장:문상무 목사) 주최로 한국선교 14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가 5월 16일 총회회관에서 열렸다. 본 지면에서 이번 세미나의 강의들을 요약 소개하고, 한국선교 140주년의 역사적 의미와 향후 선교적 과제들을 함께 생각하는 계기로 삼는다. <편집자 주>
최초의 개신교인 이수정이 받든 조국복음화의 사명
[제1강] 이수정과 한국선교 140주년(신종철 교수·아신대)
이수정이라는 인물을 한국선교 140주년이라는 기준으로 삼은 이유는 그야말로 ‘한국기독교 선교의 개척자’이기 때문이다. 이수정은 1883년 4월 29일 일본 동경 로겟츠죠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올해가 한국선교 140주년이 된다.
이수정의 개종(세례 받음) 사건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수정은 1882년 9월 일본에 도착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성경을 읽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고 위대한 신앙을 고백했다. 또한 이수정은 자신의 신앙고백문을 작성해 일본 언론에 게재했다. 이를 계기로 계속 한국에 관한 많은 글을 발표해 일본에 올바른 한국관을 심어주었다.
또한 그는 일본에서 한글로 마가복음을 번역 출판했으며, 최초로 한글로 주기도문을 번역했다. 일본에 있던 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가 번역한 한글 마가복음 성경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4월 5일 제물포 입국시 가져온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 근대화를 위해 일본 유학을 떠났던 이수정은 인생 목표를 수정해 조국 복음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수정의 전도 첫 열매는 손봉구였다. 손봉구는 이수정에게 성경과 교리를 배우며 그의 인품과 믿음에 감격했다. “이수정이 기독교 때문에 사형에 처해진다면 나 또한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할 정도로 신앙이 성장했다. 또한 1883년 말에 김옥균의 주선으로 일본에 온 30여 명의 유학생 중 절반 정도가 이수정의 전도로 신자가 되었다. 신자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성경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기 위해 <한문요리문답서>를 교재로 하는 주일학교를 시작했다.
이수정은 진정한 평신도 사역자였고 ‘조선의 마케도니아인’ 역할을 감당했다. 우리도 각자 삶의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마케도니아인이 되어야 한다.
자생적·토착적 모습으로 출발한 첫 번째 한국교회
[제2강] 한국 최초의 소래교회 설립과 그 미친 영향(박응규 교수·아신대)
1883년에 한국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두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의 복음전도로 생긴 신앙 모임이 1883년 5월 16일 한국 개신교회의 요람인 소래교회로 탄생한 사건이다. 다른 하나는 유학생으로 일본에 갔던 이수정이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1883년 4월에 세례를 받고 첫 한국인 개신교(장로교) 신자가 된 사건이다. 2023년은 이 사건들이 일어난 지 140주년을 맞이하는 중요한 교회사적 의미가 있다.
소래교회는 최초의 자생적이고 토착적인 교회였다는 면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교회를 설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했다는 사실은 선교역사에 그 예가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서상륜처럼 성경번역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번역한 성경을 널리 배포하고 알렸던 권서인들이야말로 한국 초대교회의 기반을 조성한 선각자들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들이었다.
또한 소래교회는 선교사들이 한국 풍습을 익히기 위해 들리는 ‘한국 선교의 요람지’로 발돋움했다. 서경조는 언더우드와 마포삼열 등 많은 초기 선교사들이 소래를 방문하면 그들을 섬기는 동시에 한국 예절과 풍습을 가르치는 선생 역할도 했다.
해외선교에 대한 한국교회의 자발적 헌신에는 소래교회를 비롯한 황해노회 소속 교회들, 한위렴을 비롯한 재령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의 공헌이 지대했다. 한국장로교회가 1912년 총회를 결성하고 중국 산동선교를 시행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에도 이들이 산파역할을 했다.
소래교회는 사회적 차원에서도 많은 봉사와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서 한국교회가 본받아야 할 모델이 됐다. 현재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이러한 과거를 돌아보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역사적 통찰력과 역동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한국교회 다시 일어나 21세기 세계선교 선봉에 서야
[제3강] 한국선교 140주년 과거 현재 미래(김성욱 교수·총신대)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 입국 이후 한국교회는 존 네비우스 선교사의 삼자원리 선교정책대로 자립하고 자전하며 자치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가장 먼저 독노회 설립 이후 최초로 안수 받은 7명의 한국인 목회자 가운데 이기풍 목사를 1908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했다. 이어서 한국교회는 1908년에 일본선교, 1909년 시베리아선교, 그리고 1912년에 중국 산동성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공산주의 박해, 교단의 분열과 성장 등을 겪으면서 세계선교 사역을 이어가는 교회로 발전했다. 특히 장로교회는 제40회 총회에서 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1956년 최찬영 김순일 선교사를 보냈다. 또 산동성 선교를 계승하고자 1957년 대만에 계화삼 목사를 파송했다.
박용규 박사(총신대)는 ‘장로교 합동교단이 한국교회의 해외선교를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합동교단은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2010년 제3차 로잔선교대회 준비위원이던 덕 버드셀은 1700년부터 2000년까지 300년 동안 선교에 가장 모범인 교회로 한국교회와 모라비안교회를 들었다.
1980년대 100명이던 한국교회 선교사 숫자는 2020년에 무려 3만 명에 이른다. 140년이라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선교역사에 있어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록을 남기며 미국교회와 함께 세계선교의 선두를 달리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한국교회가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지만, 글로벌 사역자들은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나 21세기 세계선교를 활발히 전개하기를 기대한다. 현재 한국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교적 교회가 대안이며, 선교부흥을 위해서는 개혁주의 성경적 교회론의 회복이 해답이다.
여성들에게 기회 열어준 한국교회 오랜 전통 계승을
[제4강] 초기 한국교회 프락시스에 있어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양현표 교수·총신대)
조선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 특히 여성 선교사들은 고통의 일상 속에 있던 조선 여성들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조선 여성의 삶에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을 중요한 선교 과업으로 삼았다.
기독교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조선 여성들을 문명화했으며, 그들이 안방으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대면하도록 만들었다. 조선 여성들이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여러 기회를 제공했다.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억압받고 소외된 조선 여성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 결과 여성들은 교회 성장의 동력을 제공하는 주역이 됐고, 시대적·민족적 사명을 감당하며 구한말 조선 사회를 개혁하는 밑거름이 됐다. 초기 한국교회에 공헌한 전도부인의 활동, 원산대부흥과 평양대부흥운동에서 여성들의 지대한 역할, 3·1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 애국애족운동에서의 산파 역할 등이 대표적이다.
첫 휘장 세례의 주인공 전삼덕, 평양의 전도부인 김제시, 보호여회 창설자와 진명여학교 창설자인 여메레, 최초의 한국인 여성 교사 신마리아,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등 많은 기독 여성들이 교회와 민족에 혁혁한 공헌을 했다. 필자는 한국교회사를 남성 위주의 역사로만 해석한 것을 깊이 뉘우쳤다.
교회들은 여성들의 사역과 활동의 범위를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 내 여성들은 하나님께서 여성에게만 허락하신 강점을 특화하는 사역의 범주를 찾고 개발해서 투신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들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목회방안을 찾고자 노력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여성은 사회적 약자이고, 불평등의 대상이며, 소외되어 있는 계층 중 하나다. 초기 선교사들이 여성을 해방함으로 조선을 깨우려 했던 정책은 여전히 유효한 교회의 방향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