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간을 올바른 기독론 위에 균형 잡힌 성령론을 확립하고자 힘써 온 배본철 교수(성결대 역사신학)가 “성령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라며 “예수께서 이 땅에 육체를 입고 계셨을 때 제자들이 그분을 인격적으로 섬겼듯이, 오늘날 성령도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섬겨야 한다”고 말했다. ⓒ송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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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은 성령체험의 필수적인 은사인가. 병원에 가지 않고 기도로만 심각한 질병에서 나았다는 증언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수련회나 캠프에서 은혜를 체험하고 ‘성령의 불’을 받은 것 같은데, 정작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뭇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성도들이라면 삶에서 반복적으로 갖게 되는 의문들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 승천하시며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주셨다. 그 영은 위로하고, 진리를 가르치며,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나게 하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한다. 하지만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혼란을 겪는다.
복음적인 기독교 신앙이 뿌리내리지 못한 곳, 아프리카 같은 지역에서는 성령관이 토속신앙과 뒤섞여 무속적인 행태로 나타나 문제가 되는 소식이 종종 들려 온다. 성령사역이라는 이름으로 성도들에게 살충제를 뿌리고 풀을 먹이며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쇼를 하다가 들켜, 해외로 도망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례도 있다. 한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30여 년간을 올바른 기독론 위에 균형 잡힌 성령론을 확립하고자 힘써 온 배본철 교수(성결대 역사신학)에게 ‘성령’에 대해 물었다. 올해를 끝으로 정년 퇴임하는 그는 강단을 사랑하는 학자인 동시에 전 세계를 발로 뛰는 성령사역자로서, ‘성령의 삶 코스-성령학교’로 삶과 사역에서 실제적인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성도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기복주의와 신비주의적 신앙에 물들어 있던 아프리카 현지인 목회자들은 이 코스를 통해 예수님이 중심이 된 튼튼한 성령론을 다지게 되었다.
배 교수는 “성령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라며 “예수께서 이 땅에 육체를 입고 계셨을 때 제자들이 그분을 인격적으로 섬겼듯이, 오늘날 성령도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섬겨야 한다”고 했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의 영이 지니신 품성 그 자체”라고도 했다.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는 겉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우며, 열매를 보아야 분별할 수 있다고 했다. “악령 역사는 복음과 교회를 방해하지만, 성령 역사는 덕을 세운다”는 것이다. ‘거듭남’과 ‘성령 받음’은 나뉠 수 없으며,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내 삶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의 영과의 연합”이라고 했다.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선 자백하지 않은 죄, 그리고 습관적인 죄를 버리고 새롭게 되기 위해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는 “용서함에 대한 확신과 함께 담대함으로 온전한 헌신”을 주께 드려야 한다고도 했다.
청년들의 일시적인 성령체험이 지속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 안에 죄의 욕구와 성령의 욕구의 양면성 사이에서 결국 죄의 욕구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인정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복’하는 것만이 해방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돈과 성은 그 자체가 중립적인 것이기에,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에 온전히 헌신된 마음이어야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관리할 수 있다고 했다.
육신의 질병을 놓고 기도와 의학적 치료의 고민에 앞서 중요한 건 ‘감사함으로 주님께 아뢰고 맡기는 일’이라고 했다. 방법론에 대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라고 했다. 다음은 배 교수와의 일문일답.
-가장 본질적인 질문, ‘성령 받음(혹은 성령)’이란 무엇입니까.
“성령이란 영어로는 ‘Holy Spirit’ 또는 ‘Holy Ghost’라고 표현하며 문자 그대로 ‘거룩한 영’이라는 뜻입니다. 거룩한 영은 곧 하나님의 영을 일컫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삼위를 지니신 한 분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으며, 또한 이 삼위 하나님의 결속된 관계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이 성구에서 ‘내가’란 성자 예수님을, ‘아버지’란 성부 하나님을, ‘또 다른 보혜사’란 성령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난 신자에게는 성령께서 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신자 안에 거하실 성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 거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 속에 거주하시는 것입니다. 이 성령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인격적이라는 의미는 예수께서 이 땅에 육체를 입고 계셨을 때 제자들이 그분을 인격적으로 섬겼듯이, 오늘날 성령을 섬기는 삶도 역시 그와 같이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지닌 분으로서, 우리의 영혼과 지정의의 기능을 통해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저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성령을 받음으로 맺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면 우리의 영혼과 인격 속에 성령의 열매(καρπος; 단수)가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한 성령 안에서 자라나는 것으로서, 이는 그리스도의 영이 지니신 품성 그 자체입니다. 그러기에 열매들이라는 복수 표현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갈 5:22-23).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잘 따르면서 살아갈 때, 여기에 성령의 열매가 제각기 다르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열매는 나오는데 또 어떤 열매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든가 하는 일이 없습니다. 한 성령을 품고 살아갈 때, 우리의 인품 속에는 자연히 성령의 품성인 이런 특성들이 모두 나타나게 됩니다. 단, 그 사람의 환경과 상황에 따라 어떤 열매가 특히 두드러지게 자라나게 될 수 있습니다.”
▲올해를 끝으로 정년 퇴임하는 그는 강단을 사랑하는 학자인 동시에 전 세계를 발로 뛰는 성령사역자로서, ‘성령의 삶 코스-성령학교’로 삶과 사역에서 실제적인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성도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배 교수는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선 자백하지 않은 죄, 그리고 습관적인 죄를 버리고 새롭게 되기 위한 철저한 회개를 강조했다. ⓒ송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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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성령 역사와 악령 역사를 어떻게 구분하나요.
“겉으로만 봐서는 성령의 역사와 더러운 영의 역사를 구분하기 힘듭니다. 영적인 능력을 체험한 장의 삶에 나타나는 결과와 열매를 보아야 제대로 분별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악령의 역사는 언제나 복음과 교회를 방해하지만,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교회에 덕을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자는 이미 성령을 받은 것인가요. 성령과 거듭남, 성령과 성령충만의 관계를 알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은 서로 다르다고 믿고 가르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바에 의하면, 거듭남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함을 통해서 오지만 그 이후의 성령세례의 체험 때에 비로소 성령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령 받는다는 말을 성령세례의 체험과 동일시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성령 받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 것이 다르다면, 우리의 신앙은 여러 영들을 믿는 다신론(多神論)과 다를 바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기독교의 기본 진리로부터는 멀어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혼에 성령을 모셔 들이는 것이요, 성령세례란 이미 영혼에 거하고 계시는 그 성령에 의해 충만히 세례 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나은 표현일 것입니다. 사실 ‘세례’라는 말 속에는 ‘흠뻑 적신다’ 또는 ‘완전히 뒤덮힌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날 때 성령이 영혼 속에 임하게 된다고 전제하고, 그 성령에 의해 충만히 지배되어질 때 성령세례 또는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한 사람은 곧 성령을 받은 사람이며, 또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내 삶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의 영과의 연합의 삶, 즉 성령과의 친밀한 교제와 또 그분께 대한 순종의 삶을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성령(세례)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소개 부탁드립니다.
“성령세례 즉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먼저 자백하지 않은 죄가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결코 준비되지 않은 불결한 영혼의 그릇에는 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에 가책되는 모든 죄를 고백하여 용서함 받은 확신과 담대함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는 온전한 헌신을 주께 드려야 합니다. 온전한 헌신이란 내 모든 존재를 온전히 주께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주께 드리는 만큼 주님도 우리를 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령세례 받기까지는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더디게 임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자가 진정 자신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계산과 다짐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준비만 다 되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성령세례를 주십니다. 이는 성령세례의 능력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 예비된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믿고 구하여야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성령의 능력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의심 없이 곧 받을 것을 믿고 구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받으십시오. 그 경험은 확실하고 분명하게 여러분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이 시대 많은 청년들이 은혜받기를 갈구하며 다양한 집회에 참석합니다. 현장에서 보면 충분히 은혜 받고 성령 받은 것 같은데 왜 삶에서 다시 무너지는 경우가 많나요.
“적어도 성령을 따라 살아가면 죄를 이기고 변화된 성숙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6-18).
본문에서 우리는 성령으로 지속적으로 걸어가면(περιπατειτε) 육체의 욕망을 이루지 않는다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16절). 우리에게는 육체의 욕구와 성령의 욕구가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육체는 성령을 대항하여 욕구하고 있고, 성령은 또한 육체를 대항하여 욕구하고 있습니다(17절). 그러므로 아무리 거룩함의 완전을 이룬 자라 할지라도 경험상 육체의 욕심이 완전히 사라져서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런 단계는 결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양면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살던 옛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경험적으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복할 때 우리는 이 성결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옛사람을 죽였다’(롬 6:6; 갈 5:24)는 표현은 성결의 능력에 대한 현주소를 정확히 기술한 것이지만, 경험적으로는 우리의 자유의지가 지속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못할 때가 많으므로, 이럴 때는 ‘죄를 죽이신’ 성령의 능력이 우리 영혼 속에서 구현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의 의지를 지속적으로 드린다면, 죄와 육체의 소욕 그리고 율법의 요구는 우리 안에서 죽은 것과도 같습니다.”
-청년들이 겪는 돈과 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성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성은 결혼이라는 범주 내에서 실행되어야 합니다. 성관계는 부부의 사랑과 자손의 번식을 위한 수단이지 성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돈 또는 물질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경이 돈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돈의 기능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선과 악의 양면성을 지니며 또 이와 함께 필연적인 모순성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돈의 양면성이 함께 부각되는 이유는, 그 돈 자체가 인간의 소욕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일 때 비로소 그 본래적인 가치가 나타난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우리의 몸은 죄악된 도구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위한 몸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며(고전 6:19-20) 하나님의 영이 그들 안에 거하십니다(롬 8:9). 예수께서 그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 드리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몸을 의의 병기로 드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롬 6:13). 이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기도 합니다(빌 1:20-21).
온전히 헌신되어 마음이 새롭게 변화된 영혼의 특징은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의 방식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이러한 분별의 지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육신의 질병과 성령의 관계에서 겪는 고민들이 있습니다. 기도해야 하나요, 병원을 가야 하나요.
“먼저 크리스천은 육체적인 질병에 걸렸을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질병에 걸렸다고 생각될 때 무엇보다도 선행(先行)되어야 할 것은 우선 이 사실에 대해 주님께 맡겨드리는 일, 그것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는 일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무엇보다도 질병의 증세나 통증에만 온 신경을 쓰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얻기 위하여 영혼을 자유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성령의 인도하심이 내 마음속에 주어질 수 있습니다. 만일 그 인도하심이 질병과 나의 영적 상태에 관한 어떤 교훈일 수도, 또는 육체적인 과로나 환경적인 개선을 위한 깨달음을 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성령께서 나에게 치유의 은혜를 나타내기 원하신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다면, 마땅히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5-16). 의약이나 의술의 도움을 통해서 역사하시기를 원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의약의 도움이 없이 오직 기도만으로 하나님이 치유하시기를 원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약을 사용하건 오직 기도만으로 하건,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