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 전 캐나다의 한 선교사가 조선 땅에 복음을 들고 찾아왔다. 그의 헌신과 수고는 이 땅에서 수많은 믿음의 열매들을 맺었다. 그 열매들 중 일부가 선교사의 고향으로 찾아들었고, 옛 은인을 향한 사랑의 보답이 이루어졌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윌리엄 존 맥켄지(William John Mckenzie) 선교사다. 1861년 캐나다 케이프브레튼에서 태어난 맥켄지 선교사는 스코틀랜드 태생의 조상들로부터 신실한 신앙을 물려받으며 성장했다. 1888년 대학을 졸업하며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한 그는 파인힐신학교를 다니며 복음사역자로서 준비했다. 잠시 담임목회를 하다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다.
매켄지 선교사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미지의 땅 조선을 소개하는 문서였다. 하지만 소속한 캐나다장로교단은 조선선교에 착수할 계획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스스로 후원금을 모아 1893년 10월 트루로 버라카교회에서 파송예배를 드리고 조선으로 출발했다.
매켄지 선교사는 한국을 찾아온 최초의 캐나다인 선교사이자 자비량 선교사였다. 그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마펫 등 미국인 선교사들과 협력하며 복음의 불모지에 열심히 씨앗을 뿌렸다. 1894년 서경조 등 한국인 힘으로 처음 세워진 소래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조선인들과 똑같은 의복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으며, 같은 온돌방에서 지내는 선교사의 모습에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경청했다.
하지만 선교를 향한 뜨거운 열정과 과중한 사역들이 그의 건강을 해치고 말았다. 걱정이 된 언더우드 선교사가 어렵게 고기와 치즈를 구해 보내주었지만, 이마저도 맥켄지는 가난한 조선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결국 그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 땅을 밟은 지 불과 1년 반 만인 1895년에 세상을 떠난다. 아직 34세의 젊은 나이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나지 않았다. 떠난 이를 그리워하던 서경조가 “맥켄지 같은 선교사를 보내 달라”며 캐나다로 보낸 편지가, 결국 캐나다장로교단이 정식으로 조선선교에 착수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1897년 그리어슨, 푸트, 맥레 등의 선교사들이 한국을 찾아와 함경도 일대를 담당하며 수많은 교회들을 세우고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했다. 특히 같은 캐나다 출신의 하디 선교사는 원산대부흥운동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한국교회사에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한편 맥켄지가 한국 땅을 밟은 지 딱 100년 후인 1993년, 그가 수학했던 파인힐신학교 예배당에서는 캐나다로 건너간 조선인들의 후예들을 통해 핼리팩스한인교회가 세워지는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다.
이 교회를 중심으로 맥켄지를 기억하는 수많은 한국인 목회자와 성도들이 추모사업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캐나다동노회와 서노회 주관으로 기념행사들이 본격 추진됐다. 특히 지난해에는 맥켄지의 고향인 케이프브레튼에서 고인의 생가터와 가족묘지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드디어 올해 10월 4일 이곳에 추모비를 세우며 고인을 기리는 기념예배를 열게 됐다.
이 자리에서 캐나다동노회장 유은상 목사는 ‘만달란트 빚진 자’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우리가 은혜를 되갚기까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다”면서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는 것을 사용할 줄 아는 지혜와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한다”고 권면했다.
이와 동시에 핼리팩스한인교회(최병필 목사) 교육관에는 맥켄지기념관을 조성하고, 교회당 앞 도로에 기념동판을 건립하는 사업도 함께 진행됐다.
이번 사업에 동참한 <미션토론토> 이사장 이요환 목사와 발행인 강창구 목사는 “맥켄지 선교사의 내한 130주년과, 핼리택스한인교회 설립 30주년을 맞은 뜻깊은 해에 기념사업이 이루어져 감개무량하다”면서 “복음의 빚진 자로서 우리의 사명을 되새길 것”을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