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KF-21에 ‘러브콜’ 보낸 필리핀|동아일보


7월 ‘정보제공요청서’ KAI에 발송… 전투행동반경 넓어 중국 견제 가능

한국산 4.5세대 전투기 KF-21. [뉴시스]

한국산 4.5세대 전투기 KF-21. [뉴시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고 중동 정세도 크게 악화되면서 세계 방위산업 업체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탈(脫)냉전 이후 각국이 무기 구매를 줄이자 방위산업은 오랜 침체기를 겪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급변한 국제 정세로 주문이 밀려들면서 주요 방산 기업은 향후 몇 년 치 일감을 쌓아놓고 있다. 바꿔 말하면 이제 무기를 주문해도 빠른 시일 안에 받을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여러 무기체계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기술력이 필요하고 제조 공정도 까다로운 전투기의 경우 이미 대기 기간이 심각할 정도로 길다. 신규 주문이 거의 없던 시절에는 전투기 구매 계약서에 서명하고 입금하면 1~2년 내 출고가 가능했다. 반면 최근 들어 인기 기종은 계약 후 빨라야 3~4년, 최악의 경우 6~7년 후에나 초도 물량을 받는 상황이다. 전투기 ‘출고 대란’이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이다.

전투기 초도 물량 인수에 6~7년 걸려

미국산 F-16V 전투기. [뉴시스]

미국산 F-16V 전투기. [뉴시스]

최근 세계 각국으로 번진 4.5세대 전투기 도입 열풍에 힘입어 가장 높은 판매고를 기록 중인 무기는 미국 록히드마틴의 F-16V다. 록히드마틴은 2019년 F-16 생산시설을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로 이전했다. 주사업장인 포트워스는 신형 전투기인 F-35 생산에 집중하고, 잔여 물량이 몇 대 없는 F-16의 경우 별도로 소규모 생산시설을 차려 소화할 계획이었다.

당초 그린빌 공장이 가동을 시작했을 때 생산직 노동자는 25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주문이 몰리면서 공장 규모가 급속도로 커져 7월 기준 노동자 700명이 전투기 생산에 매달리고 있다. 이처럼 일손이 28배나 늘었음에도 매달 생산되는 F-16은 2대에 불과하다. 현재 공장을 증축 중이라 2026년쯤에는 생산량이 월 4대로 늘어날 예정이지만, 7월 말 기준 밀려 있는 주문 물량만 129대에 이른다. 지금처럼 한 달에 2대를 생산하는 속도로는 전투기 계약 후 인도까지 64개월이 넘게 걸린다는 얘기다. 실제로 2020년 8월 F-16V 66대 구매 계약을 체결한 대만은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1대의 전투기도 받지 못했다.

전투기를 사려는 나라는 많은데 물량이 받쳐주지 못하니 당연히 가격은 급등하고 있다. 한국이 20여 년 전 KF-16C/D 블록 52 전투기를 구매할 때 대당 440억 원 정도였던 F-16 가격은 현재 대당 8000만 달러(약 1100억 원)에 육박한다. 전투기를 구매할 때는 기체는 물론, 군수지원과 무장(武裝) 등을 패키지로 함께 산다. 따라서 실제 전투기 구매 가격은 기체 값의 1.5~2배 선에서 형성된다. 가령 최근 슬로바키아가 F-16V 14대를 구매할 때 지불한 가격은 대당 1억2800만 달러(약 1760억 원)에 달했다. 한국이 F-16보다 성능이 훨씬 좋은 F-35A 전투기를 2019년 대당 1850억 원에 구입했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가격 상승세다.

이처럼 비싼 가격에도 F-16V는 없어서 못 파는 인기 상품이다. 국제 정세가 악화됨에 따라 군비 증강에 나선 개발도상국이 살 수 있는 전투기는 몇 종류 안 되기 때문이다. 특히 F-35는 미국 정부의 수출 통제가 심해 아무 나라나 살 수 있는 기종이 아니다. 유럽의 유로파이터 타이푼이나 프랑스의 라팔은 F-16V보다 훨씬 비싸다. 7월 튀르키예가 받아든 유로파이터 타이푼 가격 견적은 40대에 100억 유로(약 15조 원)로 대당 약 3700억 원에 달했다. 2022년 인도네시아에 팔린 라팔 가격은 대당 약 2630억 원이었다.

가성비 4세대 전투기 찾는 개발도상국

한국산 경공격기 FA-50. [위키피디아]

한국산 경공격기 FA-50. [위키피디아]

스웨덴이 기존 4세대 전투기 JAS-39를 대폭 개량한 JAS-39E/F ‘그리펜NG’를 상대적으로 저렴한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비싸다. 이 전투기 판매가는 2015년 브라질 계약 기준으로 36대에 54억 달러(약 7조4000억 원)로 대당 2050억 원에 달했다. 면허생산임을 감안해도 9년 전 계약 가격이 그 정도였다면 현재는 대당 2000억 원을 훌쩍 뛰어넘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심화되고 있는 중국발(發) 안보 위협에 맞서 신형 전투기를 도입하려는 필리핀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필리핀은 현재 주력 전투기인 한국산 FA-50PH 12대와 함께 운용할 신형 다목적 전투기 도입 사업인 ‘MRF(Multi-Role Fighter jet)’를 추진하고 있다. MRF는 612억 페소(약 1조4620억 원)를 들여 신형 전투기 12대를 도입하는 게 뼈대다. 총사업비를 감안하면 전투기 가격이 대당 1200억 원을 넘어선 안 된다. 그런데 그간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F-16V는 기체 가격만 1100억 원이다. 필리핀이 F-16V를 선택할 경우 사업 예산을 1.5배 이상 증액하거나 도입 수량을 줄이지 않으면 예비 부품과 무장 등은 전혀 도입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 같은 상황은 그리펜NG도 마찬가지다. 당초 그리펜 시리즈는 최대이륙중량 14t급의 염가형 다목적 전투기로 계획됐다. 하지만 16.5t급 그리펜NG로 체급을 키워 성능을 개량하는 과정에서 비용이 크게 상승했다. 게다가 스웨덴과 브라질 말고는 판매하지 못해 대량생산을 통한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데도 실패했다. 이 때문에 가격은 더욱 올라 현재는 F-16V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비싼 상황이 됐다. 그리펜NG 제조사와 스웨덴 정부가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하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필리핀이 예산을 대폭 증액하거나 도입 물량을 축소하지 않는 이상 무장과 부품을 넉넉히 구매할 수 없는 실정이다.

한때 필리핀 조야에선 현재 12대를 운용 중인 한국산 FA-50의 개량형 FA-50 블록 20을 도입하는 방안도 거론됐다. FA-50 블록 20은 13.6t급으로 체급은 작지만 능동형 전자주사식 위상배열(AESA) 레이더 데이터링크 시스템을 갖춰 성능이 뛰어나다. 중거리공대공미사일 ‘암람’을 비롯해 다양한 정밀유도무기 운용도 가능한 기종이다. 최근 폴란드·말레이시아 수출 가격 기준 대당 700억 원가량이라 가격 경쟁력도 높다.

하지만 F-16V, 그리펜NG, FA-50 블록 20 모두 필리핀이 직면한 안보 위협에 확실한 해결책은 아니다. 필리핀은 중국과 남중국해에서 해양 분쟁을 벌이는 나라다. 최근 미국과 안보협력을 강화함에 따라 대만 유사시 미군의 전진기지 역할도 해야 한다. 필리핀 공군이 도입하는 전투기는 중국의 4.5~5세대 전투기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성능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4세대 전투기를 바탕으로 개량된 F-16V나 그리펜NG가 중국 J-20, J-31 같은 스텔스 전투기와 대적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KF-21, 스텔스 성능 우수

중국 해안경비대 선박(오른쪽)이 3월 5일(현지 시간)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제도(중국명 난사군도, 필리핀명 칼라얀 군도) 인근 해역에서 필리핀 물자 보급선에 물대포를 발사하고 있다. [뉴시스]

중국 해안경비대 선박(오른쪽)이 3월 5일(현지 시간)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제도(중국명 난사군도, 필리핀명 칼라얀 군도) 인근 해역에서 필리핀 물자 보급선에 물대포를 발사하고 있다. [뉴시스]

F-16V와 그리펜NG는 분명 훌륭한 전투기이지만, 남중국해 곳곳에 인공섬 군사기지를 건설한 데다 항공모함도 운용하고 있는 중국을 대적하기에는 한계가 많다. 분쟁 수역인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제도(중국명 난사군도, 필리핀명 칼라얀 군도)는 필리핀 공군의 핵심 거점인 루손섬 바사 기지에서 직선거리로 700㎞가 넘는 곳에 있다. 가까운 팔라완섬의 안토니오 바우티스타 공군기지에서도 300㎞ 이상을 날아가야 한다. 유사시 먼바다까지 비행해야 하는 이런 작전 환경에선 소형보다 중형 이상 체급, 단발보다는 쌍발 전투기가 선호된다. 전투기가 작으면 그만큼 연료와 무장 탑재량도 적어 작전 공역에서 적기에 맞서 효과적으로 싸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쌍발엔진 전투기와 달리 단발엔진 전투기는 엔진 하나가 고장 나면 속수무책으로 추락한다는 단점도 있다.

MRF를 놓고 오랜 고민을 해오던 필리핀은 7월 하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측에 정보제공요청서(RFI)를 보냈다. RFI는 구매자가 입찰에 앞서 구매하고자 하는 물품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보내달라고 공급업체에 요청하는 것이다. 필리핀 국방부가 KAI에 보낸 RFI는 KF-21에 대한 것이었다. 즉 KF-21에 관심이 있으니 관련 정보를 보내달라고 KAI에 공식 요청했다는 뜻이다.

KF-21은 필리핀 공군의 고민을 단번에 날려버릴 카드가 될 수 있다. KF-21은 F-16V나 그리펜NG와 달리 처음부터 4.5세대 전투기로 설계됐다. 게다가 설계 과정에서 5·6세대로의 단계적 진화도 염두에 둔 기종이다. 이 때문에 저피탐 설계가 적극 도입돼 현존하는 4.5세대 전투기에 비해 레이더 반사 면적(RCS)이 훨씬 작은 것으로 알려졌다. KF-21의 정확한 RCS는 비밀이지만, F-16C의 5분의 1 수준이라는 F/A-18E보다 훨씬 작은 것으로 추정된다. F-22, F-35 같은 5세대 스텔스기에 비할 순 없지만 탐지가 매우 어려운 ‘세미 스텔스기’라는 얘기다.

F-16이나 그리펜NG보다 한 체급 위 중형 전투기라는 것도 KF-21의 강점이다. KF-21은 같은 계열 엔진을 사용하는 F/A-18E/F보다 연료를 많이 실을 수 있지만 무게는 더 가볍다. 기동성이 우수하고 전투행동반경이 넓다는 뜻이다. 공표된 수치는 없지만 F/A-18E/F의 전투행동반경인 722㎞보다 훨씬 넓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루손섬이나 팔라완섬에서 이륙해도 남중국해 분쟁수역 상공에서 무리 없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이다. 게다가 KF-21의 주력 공대공 무장인 ‘미티어’ 미사일을 사용하면 분쟁수역 상공까지 갈 필요 없이 먼 거리에서 일방적으로 미사일을 퍼붓고 이탈하는 전술도 가능하다. 미티어는 사거리가 300㎞에 달하는 데다, 이른바 ‘회피불가구역(NEZ)’이 기존 공대공미사일보다 2~3배 길어 중국 전투기에 대단히 위협적인 무기다.

이제 필요한 것은 ‘외교’

가장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될 가격 측면에서 아직 변수가 있지만, KAI 측은 필리핀이 구매할 KF-21 블록-2 기준 대당 1000억 원 정도를 예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공군에 인도되는 KF-21 초도 물량 20대 가격이 2조6262억 원으로, 대당 1300억 원 수준이다. 이것이 저율초도생산(LRIP) 가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향후 가격 하락이 클 전망이다. F-35도 초기 양산 단계에서 대당 2억2000만 달러(약 3030억 원)가 넘었지만, 본격적으로 양산되는 현재는 8000만 달러(약 1100억 원)까지 가격이 떨어졌다. KF-21 양산 본격화로 가격마저 안정화된다면 필리핀 입장에선 다른 후보 기종보다 성능이 압도적 우위에 있는 KF-21을 안 살 이유가 없다.

이처럼 KF-21의 상품성이 충분한 상황에서 한국이 주력해야 하는 것은 ‘외교’다. K-방산은 노르웨이 전차 도입 사업 당시 군 종합평가에서 독일제 전차를 앞질렀지만, 노르웨이 정부가 ‘정치적 요인’으로 판을 뒤집는 바람에 고배를 마셨다. 부디 관계당국과 업체가 한 팀이 돼 필리핀 공군 전투기 전력이 ‘메이드 인 코리아’로 통일되길 기대해본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52호에 실렸습니다.>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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