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사우디 육해공 방산 협력, 천궁-Ⅱ 수출은 시작에 불과|동아일보


전차 1500대·전투기 230대·전투함 11척 대체 수요, K-방산이 유력 주자
2월 초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 세계 각국 정부와 군 당국, 방위산업체 관계자가 대거 집결했다. 올해 두 번째를 맞은 세계방산전시회 ‘WDS(World Defense Show) 2024’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WDS 2024는 이웃 나라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열리는 중동·아프리카 최대 규모 방산전시회 IDEX(International Defense Exhibition&Conference)에 비하면 신생 행사다. 그럼에도 올해 행사에 750개 넘는 방산업체가 부스를 차렸고, 비즈니스 목적으로 출입증을 발급받은 사람만 10만 명 이상일 정도로 성황리에 끝났다. 지난해 IDEX 비즈니스 방문자가 13만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인파가 몰린 것이다.

WDS 2024에 참가한 업체들의 다양한 국적과 스케일도 ‘역대급’이었다. 최근 상당수 방산전시회는 신(新)냉전 기류 탓에 반쪽 자리로 열리기 일쑤다. 서방 국가가 개최하는 전시회에는 러시아와 중국 방산업체들이 불참하고, 러시아나 중국에서 열리는 전시회에는 서방 기업들이 불참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한국산 지대공 요격체계 천궁-Ⅱ. [뉴스1]한국산 지대공 요격체계 천궁-Ⅱ. [뉴스1]

‘역대급’ 규모 WDS 2024

반면 WDS 2024에는 진영을 가리지 않고 각국의 내로라하는 방산기업과 연구소가 대규모 인원과 장비를 보내 뜨거운 판촉 경쟁을 벌였다. 가령 한국은 신원식 국방부 장관 등 고위급 인사들이 출동해 KF-21 개발 협력 등을 제안했다. 미국(F-15EX), 프랑스(라팔), 영국·독일(유로파이터 타이푼)은 물론, 러시아(Su-75·MIG-35), 파키스탄(JF-17), 중국(FC-31)도 사우디에 주요 인사를 파견해 전투기 개발 등 방산 협력을 논의했다. 신생 방산전시회에 이처럼 많은 나라가 달려든 이유는 이 행사 주최자가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으로 불리는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이기 때문이다.

전제왕정국가인 사우디에선 오랫동안 국왕이 총리를 겸임하며 절대 권력을 휘둘러왔다. 현 국왕은 87세 고령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고, 빈 살만 왕세자가 총리 겸 왕실 직속 경제개발위원회(CEDA) 위원장을 맡아 사실상 모든 권력과 돈을 손에 쥐고 있다. 빈 살만 왕세자는 부왕의 총애를 받아 일찌감치 군과 정보기관을 장악해 세력을 키운 뒤 2017년 사촌형 무함마드 빈 나예프를 쫓아내고 왕세자 자리에 올랐다. 그는 2022년 사이가 돈독한 동생에게 국방장관 자리를 넘겨줬지만, 무기 개발·조달 전반을 관장하는 군비청(GAMI) 이사회 의장은 계속 맡고 있다. 이번 WDS 2024는 사우디 총리 겸 군비청 의장 자격으로 빈 살만 왕세자가 주최한 행사였다.

빈 살만 왕세자는 2016년 ‘비전 2030’을 천명했다. 사우디라는 나라 전체를 완전히 개조하겠다는 원대한 구상이다. 비전 2030에는 사우디의 방산 육성 방안도 담겼다. 그동안 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온 지상·항공·유도탄·전자전 체계를 단계적으로 국산화하고, 2030년까지 무기 구매 예산의 50%를 국산 무기 구매에 사용하는 게 뼈대다. 2030년까지는 6년이라는 시간이 남았지만, 무기체계는 국산화를 결정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현대 무기체계는 고도의 기술력을 가진 나라도 오랜 시간 연구개발과 시행착오를 거쳐야 겨우 완성할 수 있다. 공업국가도 아닌 사우디가 6년 만에 무기 국산화율 50%를 달성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사우디 실권자는 강력한 권력과 막대한 자금줄을 모두 쥔 ‘미스터 에브리싱’이다. 그 별명처럼 빈 살만 왕세자에게 불가능은 없어 보인다.

‘미스터 에브리싱’ 결심에 사우디 국고 열려

한국산 전투기 KF-21. [뉴시스]한국산 전투기 KF-21. [뉴시스]

빈 살만 왕세자가 겸직한 수많은 직위 중 국부펀드 공공투자기금(PIF) 의장이 있다. PIF는 7760억 달러(약 1037조 원)를 운용하는 기금이다. 2030년까지 사우디 무기 구매 예산의 50%를 가져가는 사우디아라비아국방산업(SAMI)이 바로 빈 살만 왕세자의 명령으로 PIF가 설립한 국영기업이다. 즉 빈 살만 왕세자가 외국에서 특정 무기를 기술도입 생산 형태로 구매하겠다고 결정하면, 사우디 정부의 일반·특별회계 예산은 물론 국부펀드에서 돈이 쏟아져 나온다는 얘기다.

글로벌 무기 시장에서 사우디는 성능과 납기 등 기본 조건만 충족되면 비용은 크게 고민하지 않는 ‘큰손’으로 유명하다. 사우디는 당초 200억 달러(약 26조7000억 원) 규모로 예상되던 F-15SA 전투기 84대 구매, F-15S 70대 개량 계약에 294억 달러(약 39조3000억 원)를 들였다. 최대 150억 달러(약 20조 원) 정도로 추산되던 헬기 180대 패키지 구매에는 300억 달러(약 40조 원)를 지출했다. 이들 계약은 빈 살만 왕세자가 권력을 잡기 전인 2011년에 이뤄진 것으로,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국왕이 직접 결정해 발표한 것이다. 이처럼 실권자의 눈에만 들면 복잡한 협상이나 큰 어려움 없이 비싼 값에 무기를 팔 수 있는 사우디 방산 시장은 각국 방산업체로선 그야말로 꿈의 시장이다.

그런 점에서 WDS 2024는 방위산업 육성과 군사력 강화라는 확고한 의지를 가진 미스터 에브리싱이 세계 각국 방산업체를 불러 모아 ‘간택’에 앞서 예비 심사를 하는 자리였다. 적게는 수십조 원, 많게는 수백조 원이 오가는 기회를 놓고 각국은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향후 사우디 방산 시장에서 어느 정도 실적을 낼 수 있을까.

K-방산 성적표를 가늠하려면 사우디의 무기 도입 소요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야 한다. 사우디는 정규군인 ‘왕립군’ 산하에 육군·해군·공군·방공군·전략로켓군 등 5개 군종이 있고, 이와 별개로 왕실 친위대 성격의 방위군이 있다. 정규군이 약 25만7000명, 방위군이 약 15만3000명 규모다. 국토 대부분이 사막이다 보니 기계화 부대가 주류이며, 전차·장갑차·차량 등 장비 보유량이 대단히 많다.

사우디 육군의 시급한 과제는 노후 전차와 보병전투장갑차를 대체하는 것이다. 사우디군 주력 전차는 575대를 도입한 미국산 M1A2S다. 미군용 M1A2에 비해 수출형 다운그레이드 사양이라 후티 반군과 전투에서 취약성이 드러났다. 사우디군 2선급 전차로는 M60A3 660대와 AMX-30SA 250대가 있는데, 도입 40년이 넘은 구형들이라 전량 대체가 시급하다. 현재 한국의 수출용 3.5세대 전차로는 K2ME와 K2EX가 있다. 사우디가 악화되는 안보 상황을 감안해 모든 전차 전력을 현대화할 경우 소요 물량은 단기적으로 900여 대, 장기적으로는 1500여 대에 달한다. 보병전투장갑차만 해도 걸프전 전에 도입된 M2A2 브래들리 400여 대와 AMX-10P 300여 대가 모두 교체 대상이다. 이와 별개로 3200여 대에 달하는 구형 M113 장갑차와 2500여 대의 험비 차량 대체 사업도 추진 중이다.

한국은 보병전투장갑차와 소형전술차량 모두 유력한 수출 모델을 보유하고 있다. 보병전투장갑차의 경우 국산 AS21 ‘레드백’이 좋은 선택지며, M113은 이미 한국군이 운용 중인 ‘타이곤’ 8×8 장갑차로 대체할 수 있다. 험비의 경우 WDS 2024에서 현지생산 양해각서를 체결한 소형전술차량의 파생형 수출이 유력하다.

K9A2 자주포, 영국·루마니아·사우디에서도 기대주

K2 전차. [뉴시스]K2 전차. [뉴시스]

사우디 포병 전력을 이루는 PLZ-45, M109A2/A3/A5, AMX-GCT 등 900여 문도 교체 대상이다. 사우디는 최근 프랑스의 세자르 차륜형 자주포를 참고한 자국산 8×8 차륜형 자주포를 개발했다. 다만 이는 방위군의 노후화된 세자르 자주포를 대체하기 위한 모델로, 육군용 자주포는 해외 기술협력을 통해 현지화한 궤도형 모델을 도입할 가능성이 크다. 최근 국산 K9A2 자주포가 영국과 루마니아의 차기 자주포 도입 사업에서 유력 주자로 꼽히고 있다. 사거리, 연사 속도, 포격 정밀도, 생존성 면에서 경쟁자들을 압도하는 우수한 자주포로 이번 WDS 2024에서도 선보였다.

사우디 해군도 새로운 무기 소요가 많다. 그간 해군력에 거의 투자하지 않던 사우디는 최근 홍해와 페르시아만 해상 교통로가 위협받으면서 전력 강화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현재 사우디 해군의 주력 전투함은 노후화된 알 리야드급(4700t급) 3척과 알 마디나급(2600t급) 호위함 4척, 바드르급(1000t급) 초계함 4척이다. 사우디는 이들 전투함을 높은 성능의 신형함으로 대체할 계획이며, 기존에 보유하지 못한 중형 잠수함도 최소 4척 도입할 예정이다. 이 분야에선 HD현대중공업이 충남급 호위함을 기반으로 설계한 수출형 호위함 HDF-3800SA와 스텔스 선형의 초계함 HDF-1400을 제안하고 있다.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두 업체는 각각 장보고-3 배치(Batch) 2를 기반으로 한 수출형 잠수함의 수출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진수된 한국 해군 호위함 ‘충남함’. [뉴시스]지난해 4월 진수된 한국 해군 호위함 ‘충남함’. [뉴시스]

사우디는 2018년 미국에 호위함 4척을 발주했는데, 여태까지 건조 중인 상황이다. 해당 모델의 성능과 신뢰성도 검증되지 않아 자국에 조선소를 새로 짓고 전투함을 조달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사우디가 현지 군함 조달을 결정할 경우 한국은 해외 업체들과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HD현대중공업의 조선 중간지주사인 HD한국조선해양은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해운사와 손잡고 공동 출자 형식으로 현지에 중동 최대 조선소를 짓고 있다. 이 조선소가 올해 말 가동을 시작하면 사우디는 ‘비전 2030’에 따라 대량의 신형 전투함을 발주할 확률이 높으며, HD현대중공업의 수출형 모델이 사우디 건함 사업을 선점할 공산이 크다.

사우디 공군과 방공군도 방산 시장의 ‘블루오션’이다. 사우디는 F-15C/D/S와 토네이도 IDS 계열 전투기 230여 대를 대체할 계획이다. 특히 해외 협력을 통한 전투기 국산화에 관심이 많다. 지난해 사우디는 영국·일본·이탈리아가 주도하는 6세대 전투기 공동개발 프로젝트 GCAP에 참여 신청을 했지만 거부당했다. 사우디가 러시아·중국산 전투기를 꺼리는 상황에서 기존 공군 전력과 호환되는 차세대 전투기를 국내 기술도입 생산 형태로 획득하려면 한국산 KF-21이 유일한 옵션이다.

방공 분야에선 이미 수출이 확정된 천궁-Ⅱ 10개 포대가 사우디와 한국의 방산 협력 가능성을 특히 키운다. 사우디 육군·방위군의 노후 대공포 400여 문을 대체할 유력 후보로 한국산 저고도 방공체계 비호-Ⅱ가 있다. 크로탈과 스팅어·레드아이 등 사우디가 보유한 노후 단거리 대공미사일 1600여 발도 교체 대상이다. 비호-Ⅱ가 수출될 경우 군수 지원의 용이성을 높이고자 휴대용 대공미사일 신궁과 패키지 형태로 판매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노후 단거리 대공미사일 시장도 노려볼 만하다. 한편 사우디가 최근 미국의 정치적 견제 탓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후속 군수지원에 어려움을 겪는 점도 주목된다. 이를 보완하는 고고도·장거리 방공 시스템으로서 한국산 L-SAM의 수출 확률도 높다.

사우디와 협력으로 K-방산 퀀텀 점프 가능

육해공을 아우르는 대(對)사우디 무기 수출은 단순한 ‘희망사항’이 아니라, 실현 가능성이 매우 큰 ‘시나리오’다. 사우디는 방산 자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존 최대 협력국이던 미국과 관계가 크게 틀어진 상황이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앞세워 방산 수출에서 몽니를 부리고 있고, 이것이 사우디 측 반발을 사고 있다. 한국산 무기는 기존 사우디군 무기체계와 호환되면서도 기술이전 등 방산 협력에서 강한 경쟁력을 지녔다. 이번 WDS 2024는 한국 정부와 방산 기업이 미스터 에브리싱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시하는 자리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우디와 방산 협력이 본격화되면 한국 방산업계는 오일머니를 통해 자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연구개발(R&D) 투자 확대와 규모의 경제 확보로 기술·가격 경쟁력을 독보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다. 사우디와 협력이 성사될 경우 K-방산의 퀀텀(콴툼) 점프가 기대된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27호에 실렸습니다〉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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