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목사. ⓒ크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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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유명인이나 스타 연예인들이 ‘하나님 존재를 인정했다’고 하면 곧장 그를 기독교인으로 인정하고 서둘러 그를 간증집회에 세워 전도에 활용한다. 이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뿐더러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들의 어설프고 설익은 간증이 청중들에게 왜곡된 신앙관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다만 그 사람을 철저히 검증한 후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엄격주의 기조’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갓 믿은 사람들에게서 완전한 것을 기대할 수 도 없다). 공적으로 누구를 기독교인으로 인정할 땐 최소한 ‘삼위일체 신앙’이 그에게서 확증된 후에라야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역시 ‘삼위일체 신앙’을 신학적으로 능수능란하게 풀어 재낄 수 있는 정도가 돼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힘주어 말할 수 있는 정도는 돼야 한다.
만유인력(universal gravitation, 萬有引力)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 1727)’은 위대한 과학자라는 유명세를 타고, 교회사에서 늘 ‘저명한 그리스도인(famous christian) 반열’에 서 있다. 그러나 그의 어록(語錄)에 나타난 그의 신앙 면면을 볼 때 그를 정통 기독교인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우리에겐 ‘자연이라는 성경’이 있으니 더 이상의 ‘활자로 된 성경’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주일날 어두침침한 예배당에 앉아 어줍잖은 목사의 설교를 듣기보단 야외로 나가 대자연이 들려주는 설교를 듣자(a history of christian theology, William Placher).”
그의 이 말에선 ‘제대로 된 성경관’도,‘삼위일체 신앙’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하나의 ‘자연신론자(a deist)’로서의 ‘천박한 썰(說)’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만년(晩年)에 그가 ‘자신은 죄인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고는 하나, 과거의 ‘그의 성경관’이 수정됐는지, ‘삼위일체 신앙’이 확립 됐는진 확인할 수 없다. 비단 이 사람뿐이겠는가?
◈신앙 시금석으로서의 삼위일체 신앙
어떤 사람에 대해 그가 ‘단일신론자’인지, ‘종교다원주의자(보편론자)’인지를 구분짓는 것이 ‘삼위일체 신앙’이다. 그것에 의해 ‘그의 신앙의 진위(眞僞)’가 판가름 나고, ‘구원’을 확증받는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 2:22).”“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요 5:43).”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가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그가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면 그의 신앙은 ‘생득적인 종교 신앙(innate religiosity)’에 불과하다. 다양한 종교인들이 그들 나름의 종교를 선택한 것도 이‘생득적인 종교성(innate religiousness)’에서 발로됐다.
‘아덴 사람들(men of Athens)’이 수없이 차려놓은 그들의 제단들(행 17:23)을 통해 ‘신에의 동경심(a longing for god)’을 나타낸 것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과 무관한 이런 ‘생득적인 종교성’에서 발로됐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행 17:23).”
오늘도 이런 ‘생득적인 종교성’에서 나온 ‘신에의 동경심(longing for god)’에 이끌려 혹자는 성당이나 절간으로 간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로 온다. 그러나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전 1:24)’곤 할 수 없다. 그는 다만 ‘생득적인 종교성’에 이끌려 그곳에 간 것뿐이다. 그는 여차했으면 이슬람교, 천주교, 여호와의 증인,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등으로도 갈 수 있었다.
이후 그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다행히 ‘삼위일체 복음’을 듣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었다면 그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지만, 만일 그가 교회 출석 이후에도 복음을 듣지 못해 ‘삼위일체 신앙’에 진입하지 못했다면, 그는 여전히 ‘교회 안’의 ‘생득적인 종교인(종교다원주의자)’로 남을 뿐이다.
◈거듭남으로만 가질 수 있는 삼위일체 신앙
심지어 누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다 기독교인은 아니다. 그가 ‘예수를 누구로 믿느냐’에 따라 그것의 여부가 결정된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닌, 다만 인류가 본받아야 할 ‘사랑의 실천자’‘도덕 교사’‘초 능력자’등으로 만 믿는다면, 그는 ‘삼위일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니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예수를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는다’ 혹은, ‘예수를 내 죄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초월적인 ‘하나님의 삼위일체’ 지식을 ‘생득적인 자연인의 지성’으로는 가질 수가 없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사 53:1)”라고 탄식했고, 사도 바울 역시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전 2:9)”고 탄식했다.
따라서 ‘삼위일체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그가 아버지께로서 났고(요 1:12-13),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고(요 6:45), 아버지에게 등 떠밀렸고(요 6:44) 성령의 지식을 가졌다(고전 2:10; 12:3)’는 말이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복음을 들어야만 생기는 삼위일체 신앙
이처럼 인간의 ‘생득적인 종교성’으로는 발견이 불가능한 ‘삼위일체 신앙’은 반드시 ‘복음’을 들어야만 생겨난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한 것이다.
앞서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나야’만 ‘삼위일체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복음을 듣는 것’을 전제로 한다. ‘복음을 듣는 것’을 통해 ‘거듭남’과 ‘믿음’이 발생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3-25)”.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물론 ‘형식적 순서’로는 ‘거듭남’이 먼저이고,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이 그 후 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거듭남의 모태’이지만, 실제론 ‘거듭남’과 ‘믿음’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십자가 복음’을 들을 때 ‘중생의 역사’와 ‘믿음’이 현재적으로 발생한다. 복음을 듣지 않고선 ‘중생의 역사’도 ‘믿음’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복음’은 무시한 채 ‘일반 계시’만을 의존하는 ‘자연신론자들’은 백만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삼위일체 신앙’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명약관화 해 진다. 다음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도 ‘중생’과 ‘복음을 들음’과 ‘믿음’의 긴밀한 관계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 10:16-18).”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믿을 수 가 없고, 또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선 믿을 수 없다’는 말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학술고문,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