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특집] 대한민국 형평운동 100주년에 ‘백정동석예배’ 조명 받다 < 송년특집 < 기획/해설 < 기사본문



인습의 금기 깬 진주교회의 위대한 결단


2023년은 형평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였다. 많은 사람들이 낯설게 느낄 ‘형평운동’이란 단어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근현대의 평등운동, 인권운동을 가리킨다.

1923년 4월 24일 경남 진주에서 ‘형평사’라는 단체가 조직되면서 시작된 이 땅의 형평운동은 점차 전국적인 운동으로 번져갔고 조국 근대화에 중요한 발판 중 하나가 됐다. 그런데 이 형평운동의 기원이 사실 형평사가 처음 결성되기 14년 전, 바로 진주교회(송영의 목사)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 오랫동안 역사 속 깊이 감추어져 있다가 최근 다시 조명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마치 차별의 온상인 것 마냥 혐의를 받고 있는 한국교회의 정체가 사실은 민주적 가치, 인권의 가치를 이 땅에 구현하는 일에 가장 앞서간 존재였다. 이 엄연한 사실을 당시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살펴보자. <편집자 주>


진주교회의 100년 전 ‘백정교인 동석예배’ 사건을 기리며 진주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세운 기념표지판. 
진주교회의 100년 전 ‘백정교인 동석예배’ 사건을 기리며 진주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세운 기념표지판. 


그날 선교사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달리 몹시 불편해 보였고, 한국인 성도들을 향한 목소리는 엄격했다.


“백정들도 교회에 와서 같이 예배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존비귀천(尊卑貴賤)의 신분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 곳에서 다 같이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데이비드 라이얼(한국명 라대벽) 선교사는 단호했다. 한 치의 물러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교인들 역시 자신들 입장을 누그러뜨릴 뜻이 전혀 없었다. ‘어디서 감히 백정들과 동석을 하라는 거야’라는 분노 섞인 감정들이 각자의 표정에 역력했다.


1894년 시작된 갑오개혁을 계기로 이미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유교사회의 질서는 무너지고 있었고, 복음은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익히 배워 알고 있었으나 백정과 같은 천민들하고 나란히 앉아 예배하는 일은 이들에게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신분제도가 공고한 인도의 ‘불가촉천민’처럼, 무당 재인 사공 갖바치 기생 등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계층들이 아직까지 이 땅에는 존재했다. 백정은 그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이고 대표적인 존재였다.


진주 남강 변에 설치된 형평운동기념탑 전경.
진주 남강 변에 설치된 형평운동기념탑 전경.


함부로 깰 수 없는 벽이었기에, 휴 커럴(한국명 거열휴)을 비롯한 호주선교사들이 경남 진주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일반인들과 백정들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예배하는 것을 묵인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 갓 부임한 33세 젊은 선교사의 눈에 이런 식의 차별은 반드시 고쳐야 할 불합리한 관습일 뿐이었다.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라이얼 선교사의 입장이 완강한 것처럼 교인들의 태도도 완고했다. ‘선교사님 말씀이 비록 옳다 해도 아직 우리 예절과 풍속에는 시기가 이르다’는 설득을 했다가 통하지 않자, 결국 한국인 교인들은 예배를 거부하고 각자 집으로 향해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909년 5월 9일은 그렇게 씁쓸하게 저물었다.


라이얼 선교사의 지시로 교회당을 찾아왔던 백정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광경은 큰 상처였다. 그로부터 몇 주간 진주교회의 분위기는 마치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자칫 호주장로교선교부의 여태까지 수고와 헌신들이 죄다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찾아왔다. 이 때 해결사로 나선 인물이 넬리 스콜스와 메리 켈리 등 두 여성 선교사였다.


진주교회가 신분차별의 인습을 타파할 수 있도록 백정교인 동석예배를 주도한 세 명의 호주장로교 선교사. 왼쪽부터 데이비드 라이얼, 넬리 스콜스, 메리 켈리. 
진주교회가 신분차별의 인습을 타파할 수 있도록 백정교인 동석예배를 주도한 세 명의 호주장로교 선교사. 왼쪽부터 데이비드 라이얼, 넬리 스콜스, 메리 켈리. 


3년째 진주에 머물며 한국인 성도들과 따뜻하게 교분을 나누고 있던 이들은 친화력과 소통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얼어붙은 분위기를 녹여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정성스러운 노력이 마침내 대화의 물꼬를 텄다.


1928년 열린 형평사 제6회 정기대회 포스터. 
1928년 열린 형평사 제6회 정기대회 포스터. 


그 해 7월 22일 백정 성도들이 먼저 행동을 취했다. ‘우리가 본래 예배처소로 돌아가겠다’고 먼저 결단을 내리자, 냉랭했던 교인들의 마음이 눈 녹듯 풀어졌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이번에는 돌아온 교인들이 백정 성도들의 결단에 고마움을 표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인습을 깨뜨리고 선교사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1909년 8월 1일은 감동의 주일이었다. 양반과 상민과 천민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예배하는 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큰 시험을 잘 견뎌낸 진주교회는 이로 인해 세상 사람들, 특히 차별받고 소외당하던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됐고 더욱 건강한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라이얼 선교사는 이후 남해와 마산 등지에서 크게 활약하며 존경받는 사역자로 우뚝 섰고, 화해에 결정적 공헌을 한 스콜스와 켈리는 호주장로교선교부로부터 감사장을 전달받았다.


진주교회 백정교인 동석예배가 형평운동의 기원이 된 사실을 학문적으로 밝힌 경상대학교 김중섭 교수의  표지. 
진주교회 백정교인 동석예배가 형평운동의 기원이 된 사실을 학문적으로 밝힌 경상대학교 김중섭 교수의 표지. 


‘백정교인 동석예배’라 부르는 이 사건은 그렇게 진주교회와 호주장로교선교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 사건이 교회 밖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진주문화연구소가 2001년 ‘진주문화를 찾아서’ 시리즈 제3권으로 <형평운동>이라는 제목의 책을 낸 일이었다. 이 책을 집필한 경상대학교 김중섭 교수가 관련 자료들을 수집해 진주교회 ‘백정교인 동석예배’의 의미를 크게 조명하면서, 형평운동의 역사가 다시 쓰이게 됐다.


진주지역 교회역사 발굴에 앞장서 온 진주교회 조헌국 장로는 “실제로 백정교인 동석예배를 계기로 진주 사람들의 의식이 크게 바뀌었고, 훗날 형평운동에 백정 아닌 인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흐름이 형성될 수 있었다”면서 “형평운동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신백정’이라고 나무랄 정도로 강력한 분위기가 나타나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사실 백정을 비롯한 천민들을 교회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인 일이 진주에서만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서울 승동교회에서도 박성춘이라는 인물을 시작으로 수많은 백정 성도들이 생겨나며 신분차별의 관습을 깨뜨렸다. 박성춘은 훗날 승동교회의 장로로 임직을 받았고, 그 아들 박서양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의학수련을 받은 후 조선인 최초의 양의사로 성장했다. 호남에도 정읍의 최중진 목사처럼 백정 출신들의 인권신장에 앞장선 인물들이 있었다.


이는 20세기 이후 민주국가로 발전해온 대한민국 사회에서 크게 칭송받을 일이었다. 실제로 진주교회의 경우, 형평운동에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는 공로로 2013년 진주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교회당 앞마당에 기념표지판을 세워주는 명예를 얻었다.


이 표지판은 3·1운동 당시 진주만세시위의 신호탄 역할을 한 교회 종탑과 함께 진주교회가 지역사회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관을 비롯한 진주교회당 곳곳에는 백정동석예배와 형평운동에 관한 역사자료들이 자랑스럽게 전시되고 있다.


조헌국 장로가 진주교회에서 기원한 형평운동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조헌국 장로가 진주교회에서 기원한 형평운동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형평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진주시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관련 기념사업을 통해 백정교인 동석예배와 진주교회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작업들이 다각적으로 진행됐다. 사회적 고정관념에 도전까지 하면서 성경의 정신에 충실했던 한 교회의 결단이 복음의 가치를 세상 속에서 두고두고 드높인 셈이다.


조헌국 장로는 “교회들에게는 시대적으로 감당해야 할 과제가 주어졌고, 형평운동이나 여성인권을 위한 공창제도 폐지운동 역시 당대 교회가 책임질 과제였다”면서 “오늘날에도 저출산, 기후재앙과 같은 위기 앞에 서 대한민국 사회를 건져낼 의무가 한국교회에 있다”고 강조한다.


성경의 가르침에 반하는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 사회의 인권신장에 앞장서야 할 교회의 사명 또한 여전하다. 100년 전의 백정들처럼, 이 땅에는 아직도 억눌리고 소외를 당하는 이웃들이 적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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