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칼럼]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투 DB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 즈음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전해 준 말씀이다. 그 자세한 내용이 누가복음 2장 8-14절에 기록돼 있다. 아래는 그 일부이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0-14).”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유 된 구별된 자들’이다. 다른 곳에선 이들을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롬 8:29)”,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롬 11:2)”,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신 자들(엡 1:5)”등으로 표현했다. 이는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갖다 준 ‘평화의 대상’이 모든 인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평화’는 유한족(有閑族)들이 한적한 수도원(修道院)이나 산사(山寺)에서 ‘피정(避靜)’이나 ‘참선(參禪)’ 같은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을 통해 얻는 ‘심적(心的)인 것’이 아닌, ‘불화’, ‘원수 됨’, ‘전쟁’과 관련된 ‘치열한 용어’이다. 곧 ‘죄’로 인간과 하나님이 원수 됐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해한 결과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가 동시에 어떻게 ‘하나님의 원수(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상태)일 수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나, 이는 그들도 아담의 원죄를 갖고 태어나 생득적(生得的)으로 하나님을 대적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아신바’ 되고 그의 ‘구원경륜 안’에 있었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기 전까진 그들 역시 하나님과 원수관계에 있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5)”,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신지라, ‘은혜의 경륜 안’에선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셨지만 ‘죄 아래 있는 그들’에 대해선 원수시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부모자식 관계’에 빗댄다면, 그들은 부모에게 ‘사랑스러운 자식인 동시에 속 끓이는 애물단지(headache)’와도 같다.

어떤 부모들은 속썩이는 그들 자식을 향해 ‘저 원수덩어리’라고 하는데 ‘오죽 했으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애물단지인 그의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도 그와 같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진노할 수밖에 없는 그의 ‘딜레마(dilemma)적 슬픔’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사 1:2-6)”.

◈화목제물 예수 그리스도

성탄절이 되면 교회나 성당에서 앞 다투어 다양한 ‘성탄 메시지들’을 내어놓는다. 그 내용들은 대개 ‘평화’니 ‘기쁨’이니 하는 문구들로 도배된다. 그러나 그것들의 원처(原處)가 불분명하고 중구난방(衆口難防)이며, 정곡을 찌르지 못 한다.

기껏 그들이 쏟아내는 ‘평화와 기쁨’ 타령은 대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사람 사이에 ‘미움과 증오’를 철폐하고 국가 간, 인종 간, 종교 간의 ‘다툼과 불화’를 종식시키고 ‘사해공포주의를 실현하자’로 요약된다.

올 성탄절에도 어김없이 한국 가톨릭교회의 모체라고 하는 ‘M성당’이 ‘성탄절 메시지’를 발표했다. 주임 신부인 대주교가 발표한 ‘메시지’를 듣고선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아기로 오신 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숨겨진 어린아이 같은 선한 마음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이다.

그의 강론을 들을 때 마치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이나 ‘내 안에 부처가 있다’는 ‘불교 설법’을 듣는 것 같았다. 그에게 있어 ‘예수의 그리스도 됨’은 인간 마음에 숨겨진 선을 끄집어내주는 ‘선(善)의 적출자(摘出者) 역할’이었다.

그의 메시지 어디에도 ‘인간의 죄인 됨’과 ‘죄인의 구주 예수’ 개념은 없다. 그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매주 이러한 그의 ‘초라하고 왜곡된 강론’을 들어야 하는 ‘수많은 영혼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솟구쳐 올랐다.

그들뿐이겠는가? 성탄절기에 많은 교회들이 아기 예수를 영접한다고 야단법석이지만, 정작 그를 문 밖에 세워놓는다. 그들은 종교다원주의의 ‘뽀얗고 부드러운 예수 손의 노크’만 환영하고 ‘못 박힌 그의 손의 노크’는 외면함으로서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것은 사람들 안에 숨겨진 ‘순진무구한 어린 아기의 마음을 끄집어내기 위함’도, ‘마음의 평화요법’을 전수해 주기 위해 온 것도 아니다. 이미 앞서 말했듯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원수 된 사이를 화목하게 하려고 자신을 ‘화목제물(peace offerings)’로 드리기 위해 오셨다.

환언하면 그는 한 마리 짐승처럼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다는 말이다. 아기 예수께 예물로 드린 동방박사들의 보배함 속에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인 ‘몰약(myrrh)’이 담긴 것은 그의 탄생이 ‘죽음을 지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뿐만 아니다. 신구약 성경에 32회(구약 26회, 신약 6회) 등장하는 ‘화목 제물’이라는 단어는 모두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지칭하기도 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4)”.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0, 22)”.

성탄절기에 당신이 영접하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십니까?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학술고문,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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