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간의 북한사역 기간 동안 매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처음 1년 동안 미션홈에서 함께 지냈던 8명의 북한 형제들에 대한 기억이 내겐 각별하다. 육신의 굶주림만 가득했던 그들은 1년여 간의 공동체의 삶을 통해 영혼의 갈급함을 아는 자들로 거듭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서 ‘선생’이라는 호칭을 주고 누가복음 10장의 말씀을 의지해 둘씩 짝을 지어 북중 접경지역으로 파송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확장엔 항상 사단의 방해가 뒤따른다. 제자들을 모집하는 중에 진칼빈, 박요한 두 선생의 소식이 끊겼다.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그들의 행적을 수소문해서 알아 낸 것은 그들이 북한 보위부의 공작으로 납치 북송됐다는 사실이었다. 이후 회령보위부에서 공개 총살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 일로 인해 나는 실제로 온 육체가 욱신거리는 고통을 느꼈다. 이 사역을 감당하기엔 내가 너무 부족해 사역을 멈춰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때 다른 6명의 선생들은 53명의 형제들을 모집해 산동성 제남으로 내려와 있었다. 나는 6명의 선생들을 따로 불러내 칼빈, 요한 선생의 소식을 전했다. 1년 동안 함께 지낸 형제들의 북송 소식을 알려야 하는 심정을 그 누가 알까. 그 자리에서 나를 해코지해도 할 말이 없었다. 조용히 내 말을 듣던 6명의 선생들은 합심기도를 했다. 그리고 유기풍 선생의 담담한 마무리 기도가 이어졌다.
“하나님, 두 선생들이 북한 감옥에 있든 순교의 자리에 있든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주시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선생님들이 되게 해 주세요!”
나는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고 다른 선생들과 함께 통곡을 하고 말았다. 그 기도로 북한의 영혼 구원에 대한 사명을 더욱 굳게 붙잡을 수 있었다. 그 후 추방되기 전까지 500여 명의 북한 형제들을 만났고, 250여 명의 북한 영혼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 삶을 누리게 됐다. 하지만 17명의 순교의 피가 더 뿌려졌다.
초대교회 당시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과 안디옥, 아시아와 마게도냐까지 복음이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북한 복음화 역시 감옥에서 복음을 담대히 외치고 순교도 불사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필요하다는 마음을 주셨다. 그래서 미션홈 현장에서 아침, 저녁 인사로 이렇게 고백하며 선포했다. “북조선에 예수의 피를 뿌립시다! 북조선을 위하여 순교합시다!”
무모해보이긴 하지만 솔직한 믿음의 고백이었다. 그리고 이 순교의 행진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