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보배인 저출산 시대에도 ‘품을 잃은 아이들’이 있다. 친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유기된 아이들. 그리고 부모가 방임한 아이들까지.
올해 출생신고를 의무화하되 ‘익명 출산’을 허용하는 두 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우리 주위엔 여전히 미아처럼 품을 찾아 떠도는 아이들이 있다. 그동안 이 아이들은 뭘 감내하며 살아왔을까.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베이비박스’(부모가 아이를 두고 가도록 마련된 상자)를 500시간 동안 관찰하고, 품을 찾아 떠도는 0~29세 아동·청년 47명을 만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말한다. “미안해 아가야.” |
미아 – 품을 잃은 아이들
[3] 소년의 품에 남은 상처
“부모도 없는 새끼가 뭔데 이런 데서 공부하는 척하고 앉아있냐.”
그 순간, 이가람의 머릿속 수류탄 안전핀이 뽑혔다. 기말고사가 다가오던 2013년 여름. 열람실엔 시험공부를 하러 온 중학생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문제집을 넘기고 있었다. 양평군립도서관의 큼직한 책상을 사이에 두고 가람과 민혁(가명)에게만 살기가 흘렀다.
전날 둘 사이엔 이미 전조가 있었다. “너 엄마도 없잖아”라는 말을 눈앞에서도,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서도 민혁은 쉽게 꺼냈다. 부모가 있는 아이들끼리는 별 타격감이 없는 욕이었다. 하지만 가람에겐 그 수류탄을 터뜨릴 수 있는 뇌관이었다. 둘 사이에 주먹이 오갔다. 중학생 특유의 야생성이 교실 안을 가득 메웠다.
다음날 열람실에서 둘은 다시 마주쳤다. 잡담을 하는 가람에게 민혁의 신경이 곤두섰다.
“야! 시끄럽다고. 조용히 해라.”
“지금 대화 중이잖아. 끼어들지 마라.”
낮은 소리로 으르렁댈 때, 거기서 멈춰야 했다. 민혁은 가람의 약점을 잘 알았고, 너무나 결정적일 때에 건드렸다.
가람은 퍼뜩 가방에 무슨 물건이 들어있는지 기억해냈다. 전날 저녁 친구와 가지고 놀다가 가방에 넣어놓은, 중학생이 들고 다녀선 안 될 물건이었다.
첫 이름, 이순신
가람의 첫 이름은 ‘이순신’이었다. 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에 가로등 아래서 발견됐다는 이유였다. 영아원이었던 서울성로원 아기집에서 3년간 이순신으로 살다가 경기 양평의 보육원 ‘신망원’으로 옮겨졌다. 신망원 이사장은 출생신고를 할 때 “애 이름을 이순신이라고 지으면 커서 놀림 받는다”라며 ‘이가람’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줬다.
그곳에선 10명 가까운 사내아이가 한방을 썼다. 모르는 아이들과 두 줄로 머리를 맞대고 각자의 이불을 덮고 잤던 그날, 하지만 아침이 되니 서로의 이불이 뒤섞인 채 엉켜있던 그날. 가람의 생애 첫 기억이다.
일반 가정에서 외동으로 태어난 아이가 혼자서 부모 두 명의 사랑을 옴팡 받고 자라는 동안, 가람은 매일 바뀌며 출퇴근하는 생활지도원 ‘이모’의 관심을 수많은 아이들과 나눠가져야했다. 가끔 ‘삼촌’도 있었다. 가람의 기억에 남은 삼촌은 두 명이다. 그나마도 한 명은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나갔다.
그 시절의 생활을 결정지은 건 착한 형 세 명이 아니라, 못된 형 한두 명이었다. 기분이 좋으면 좋아서, 나쁘면 나빠서 동생들을 때렸다. 한여름엔 쓰레기장에 한 시간 동안 세워놓고 모기의 제물이 되게 만들었고, 각종 힘든 자세를 만들어 아이들을 ‘고문’시켰다. “지금 그랬다면 당장 소년원 갈 수준이었죠”라고 가람은 회고했다.
가람은 형들이 때리고 괴롭힌다고 이모들에게 일렀다. 그래봐야 해결책 없는 고자질에 불과했다. 이모들이 서류 결재를 받고 전화를 받으러 사무실로 나가면 괴롭힘은 다시 시작됐다. 가족이면서도 가족이 아닌 아이들과 살기 위해선 서열 속에서 각자도생해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형들에게 당한 괴롭힘이 가람의 손에도 익어갔다.
들켜선 안 되는 치부
신망원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한 학년에 반이 하나인 ‘미니학교’였다. 출중했던 가람의 장난기는 많은 아이를 울렸다. 사마귀 뱃속에서 뽑은 연가시, 뜨거운 물에 담가 노랗게 변한 ‘황금 여치’를 아이들 책상에 던졌다.
가람이 4학년이었던 2010년 말 교무실에서 작은 신경전이 벌어졌다. 모든 교사들이 5학년 담임을 기피했다. 가람을 맡기 무서워해서다. 결국 4학년 담임교사가 “어떻게든 1년만 더 해보겠다”며 총대를 멨다.
다음 해 어느 날, 가람의 담임은 복도에서 눈물을 흘렸다. “내가 너 나쁜 행동들 뜯어고치려고 했는데 더 이상은 못하겠다….” 담임은 한 마디를 남기고 등을 보였다. 잠시 뒤 흐느끼는 소리가 화장실에서 들려왔다. 복도 한가운데에 선 가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해 가람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전교생이 1000명이 넘는 큰 학교였다. 신망원에서 여기에 온 아이는 가람이 처음이었다. 전학 첫날, 교실 창밖에 아이들이 벌떼같이 몰려왔다. 책가방을 툭 쳐서 떨어뜨리고 도망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가람의 ‘집’에 대해선 아무도 몰랐다. 생존본능과 흥미가 동시에 발동했다. 가람이 태어나 처음으로 ‘보육원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뗀 순간이었다.
‘애들이 알면 난 먹잇감이야…’
가람은 기를 쓰고 출신을 숨겼다. 소위 ‘사고 치는’ 무리들과 한 패로 어울렸다. 신망원 아이들처럼 셔틀버스를 타고 등하교하는 대신 방과 후의 자유를 갖게 된 가람이 친구들과 온 동네를 쏘다니다 보면 해가 금세 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신망원 이모들은 가람에게 전화를 했다.
그날도 가람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정선 이모’라는 글자가 떴다.
“이가람, 넌 왜 맨날 이모한테 전화가 와? 부모님이 아니고?”
순간 가람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좀, 그냥 번호 저장을 이모라고 한 거야.”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지난번에도 “그냥 엄마, 아빠가 바쁘다”고 횡설수설하며 둘러댔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다른 물음표를 이어 붙이지 않았다.
이듬해 신망원 동기 1명이 전학을 왔다. 가람과 친했던 동갑내기 아이가 축구부에 스카우트된 것이다. 영아원에서부터 같이 손잡고 온 가장 오래된 친구였다. 하지만 가람은 편치 않았다. 신망원에서 경의중앙선 신원역까지 가는 30분 동안 가람은 친구에게 당부했다.
“우리 일단은 모른척하자. 나중에 자연스럽게 친해진 척하면 돼.”
14분 뒤 전철에서 내리고 나서부터 둘은 남남처럼 걸었다. 가람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얘랑 같은 출신인 거, 애들한테는 들키면 진짜 안 돼.’
남들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 다른 사람의 약점을 먼저 잡고 다니는 가람 때문에, 신망원 직원들은 한 달에 한 번꼴로 교무실에 불려 왔다. 그런 날 이모는 집에 가는 길에 ‘돈까스클럽’을 들르곤 했다. “먹고 싶은 거 골라봐”라는 이모의 말에 왕돈가스와 토마토 스파게티를 실컷 주문했다. 재미없는 학교 수업도 일찍 끝나고, 이모랑 단둘이 귀가하는 날. 가람은 그날이 좋았다.
그런 날이 아니라면 가람은 언제나 혼자서 귀가했다. 전철역을 나오면 북한강 너머 기울어가는 오후의 해가 강물에 번쩍이며 비쳤다. 동네 할아버지들을 지나쳐 고불고불한 시골길을 오르다 보면 큼직한 차를 한 대씩 마주치곤 했다.
“도련님!”
갑자기 가람 앞에서 차가 멈추고 문이 탁 닫힌다. 멀끔한 양복 차림의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타시죠.”
기다려왔던 순간이다. 내 출생의 비밀이 드디어 나타나는구나, 마침내 엄마가 나를 찾고 있구나. 저택에 도착하자 누군가가 다시 안내한다. “곧 회장님이 도착하십니다. 앞으론 이곳에서 회장님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한 경영수업을 듣게 될 겁니다….”
가람의 상상은 이어졌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떤 차도 멈춰서지 않았다. 멀어져가는 엔진소리를 들으며 그는 계속 걸었다. 집에 들어가기 싫을 때마다 가람의 상상은 길어지곤 했다.
어른에 대한 신뢰가 깨지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 교사가 어느 날 가람과 함께 다니는 아이들을 타이르기 위해 따로 불렀다.
“너희에게 가람이 상황을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가람이는 너희처럼 부모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그러니까 사고 치지 않게 너희가 도와줘야 해.”
하지만 아이들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저희 다 알아요.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말씀해줬어요.”
5학년 때면 벌써 2년 전이었다. 그 교사는 “나도 걔는 어떻게 못 해. 걔 고아원 사니까 원장님한테 직접 연락해봐”라면서 신망원 전화번호까지 친구들에게 알려줬다고 했다. 담임은 가람을 불러 이 얘기를 전했다.
가람은 그날 남은 수업을 듣지 않고 복도에서 종일 울었다. 창피함도, 슬픔도 아니었다. 쭈뼛대며 다가온 아이들은 모른 척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가람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나 힘들게 애들을 속였는데, 그래서 다들 모르는 줄 알았는데…. 나만 바보였네.’
엄마 없는 아이라는 걸 약점으로 잡는 건 애들이나 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 짓을 다른 사람도 아닌, 선생님이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가람은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어른에 대한 신뢰였다.
모든 게 드러나면서 “애미 없는 새끼”라는 폭언을 함부로 꺼내는 아이들도 늘기 시작했다. 가람에게는 모든 치부를 까발리는 폭탄 같은 말이었다. 바로 그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그동안 발버둥 쳐 왔는데…. 두려움이 현실화된 것이다.
그때부터 가람은 집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친구네 집을 돌아가며 잤다. 1학년이 끝나가던 초겨울, 친구 한 명이 자신만만하게 자고 가라며 자기 집으로 불렀다. 반지하였다. 집에 들어서자 치킨 냄새가 진동했다. 친구 부모님은 식탁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들어왔니? 너네 어차피 술 먹고 다니는 거 다 알아. 여기 앉아. 너네도 한잔해.”
가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친구를 쳐다봤다. 친구는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람도 언제나 누구에게나 솔직하고 싶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가람의 ‘집’에선 규칙을 조금만 어기면 “다른 애들이 따라 하니까 안 돼”라는 말이 귀에 못이 박혔다. ‘다른 애들’이라는 게 없는 집, 아이와 부모만 있는 ‘보통 집’을 보며 부러움이 자랐다.
치킨을 다 먹은 뒤 친구의 앨범을 펼쳤다. 그 속에는 아기에서 소년으로 자란 친구, 얼굴에 조금씩 주름이 늘어나는 부모님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가람은 현관문을 바라봤다. 친구가 들어올 때마다 엄마와 아빠가 “들어왔니”라고 반기는 장면이 필름처럼 돌아갔다.
가람에게도 사진은 많았다. 그 속의 가람은 늘 혼자였다. 가끔 신망원을 찾아오던 후원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이름도 가물가물했다. 이걸 가지고 누구랑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어렸을 때 얘기를 나눠줄 사람 없었다.
이모와 삼촌은 이틀에 한 번씩 교대했다. 그들은 자주 그만뒀고, 자주 새 사람으로 교체됐다. 편애하는 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은 다 느꼈다. 알아서 각자의 사랑을 찾아야 했다.
가람이 정말 좋아했던 이모가 있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다가가서 칭얼대면 잠이 들 때까지 안아줬다. 주말이면 데리고 나가서 애정을 담아 놀아줬다. 언젠가 그 이모의 손을 잡고 터널길을 걸었던 기억이 났다. 맛있는 것을 너무 많이 먹고 마셔서, 긴 터널길을 걸어가는 내내 자꾸 화장실이 가고 싶어 보챘던 것 같은 기억이 났다. 과거를 회상하고 서로 놀리며 그런 추억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이모는 몇 년 만에 신망원을 그만뒀다. 그때의 기억도 이모가 갖고 사라졌다. 새로 온 이모는 과거의 가람을 몰랐다. 가람을 1부터 100까지 지켜본 사람은 가람뿐이었다.
“엄마인 척하지 마요”
친구네 집을 돌아가며 잤다. 외박이 이어지자 박명희 원장이 결국 학교로 찾아갔다. 불려 나온 가람은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걱정돼서 찾아왔다는 말에 가람은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
“엄마인 척하지 마요.”
이상했다. 가람의 말이 박 원장에겐 “엄마가 돼 주세요…”라는 환청으로 들렸다. 2009년 원장이 되고 지금까지 지켜본 가람은 반성이란 걸 모르는 아이였다. 그랬던 아이의 말이 그날따라 다르게 들렸다. 모든 문제를 남 탓으로 돌리는 건, 스스로를 탓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질까 봐 그런 것 아닐까. 이 녀석이 혹시 진짜 가족을 갈구하는 거였다면…. 그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봤다.
“내가 네 엄마는 아니지만, 원장으로서 널 데리고 키우잖아. 너 신망원이 그렇게 싫으면 차라리 우리 집에 와서 좀 지낼래?”
사나웠던 가람의 눈가가 그 순간 살짝 불그스름해졌다. 그는 자신의 판단이 맞다고 확신했다. 그날 저녁 세 딸을 모아놓고 말했다.
“가람이가 요즘 많이 힘들어해서 우리 집에 와서 지내도 좋겠다고 했어. 그러면 너희들이 방을 같이 써야 하는데 괜찮겠니?”
“걔가 온대? 그럼 그러자.”
가람과 동갑인 큰딸이 쿨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날도 다음날도 가람은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 가람에겐 갈 수 있는 친구 집이 너무 많았다.
가람은 어른을 외면하고 친구들에게 매달렸다. 자러 갈 친구 집이 마땅치 않은 밤엔 노숙을 했다. 벼를 베어내고 빈 겨울 논두렁에 볏짚을 쌓아서 불을 지피고 모여 잔 적도 있다. 저녁거리는 마트에서 훔쳤다. 공사장에 남은 대리석 같은 걸 주워다가 강다리 밑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 와중에도 학교를 빠지진 않았다. 점심은 먹어야 하니까.
경찰서를 처음 간 건 학교폭력 가해자로 신고가 접수되면서다. 경찰관은 뒤로 깊이 기대앉아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네가 부모가 없고 하니까, 쟤가 부모가 있어서 부러워서 때렸다고 해. 상대방한테 좀 불쌍하게 여겨져야 선처를 받을 수 있어.”
가람에게 부모가 없다는 사실은 그에겐 그저 귀찮은 사건을 빨리 해결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아이의 상처를 약점으로 삼지 않을 것이라는, 어른에 대해 남아있던 일말의 믿음이 다시 한번 무너졌다. ‘나는 그냥 불쌍한 존재구나.’ 그리고 경찰이 하라는 대로 했다. 가람은 오늘만 보고 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부모 있는 게 부러워서 그랬다고 써”
2013년 7월 양평도서관에서 민혁과 마주한 가람은 “부모가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라”라는 말에 벌떡 일어섰다.
문득 머릿속에 지난밤 일이 스쳐 지나갔다. 그날 같이 놀던 친구는 일본 애니메이션 ‘나루토’를 좋아했다. “심심한데 나루토 표창 던지기나 따라해 보자”며 그들은 집에서 휴대용 과도를 들고 동네 공원으로 나섰다. 나무 기둥에 아무리 던져봐야 과도가 꽂힐 리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친구는 방바닥에 팽개쳐져 있던 가람의 가방에 과도를 던져 넣었다.
가람은 가방에서 그 칼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리고 민혁에게 휘둘렀다. 배에 스쳤지만 옷조차 찢지 못했다. 그다음엔 팔꿈치에 스쳤다. 역시 피는 나지 않았다. 머리채를 잡고 목에 과도를 갖다 댔다.
“아까 그 소리 다시 한번 해봐라.”
눈으로만 힐끔대던 사람들이 낮게 웅성댔다. 민혁이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받쳐 잡았다. 벌어진 살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가람은 칼을 떨어뜨렸다. 민혁은 가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경찰에 신고한다.”
그날 가람은 처음으로 수갑을 찼다. 경찰서에서 똑같은 말을 들었다. “쟤가 부모가 있어서 부러워서 그랬다고 적어.”
부모가 있는 게 부럽기만 했던 게 아니다. 부모가 없는 것이 드러날 때마다 지독하게 무시 받는 것이 지긋지긋할 뿐이었다. ‘고아원 사는 애’라는 낙인은 그 무엇으로도 덮을 수 없는 약점이었다.
그때 민혁의 아버지가 경찰서에 왔다. 먼저 와있던 박 원장은 마음을 졸였다. 가람은 덤덤했다. 뺨 정도 맞지 않을까 싶었다. 민혁의 아버지는 호통을 시작했다. 그런데 방향이 예상과 반대였다.
“야, 너는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어? 사람이 해야 될 말이 아닌데 왜 그딴 소리를 해!”
그는 “아들이 원인제공을 한 것 같다”며 가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어른에게 사과를 받는 것은 가람의 삶에서 극히 드문 일이었다. 심지어 칼에 베인 건 가람이 아닌 민혁이었다.
가람은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죄송하다”고 얼버무렸다.
‘혹시 내가 어른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나….’
잠시 떠올랐던 생각은 이내 가라앉았다. 초등학교 5학년 담임, 진술서 작성을 강요했던 경찰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어쨌든, 이번에도 ‘부러워서’라는 진술은 해야 했다.
다시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
중학교 2학년. 가람은 신망원을 나왔다. 흡연, 절도, 욕설, 교권침해, 폭력, 감정조절의 어려움…. 박 원장이 법원에 보낸 통고(소년 사건을 법원에 바로 신청하는 제도) 서류에는 가람이 저지른 행각이 빼곡히 적혔다. 보육원은 가람을 더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가람은 경기 안양시 서울소년분류심사원(미성년자들이 소년보호재판을 받기 전 머무는 시설)에서 강간범, 차량 절도범들과 열흘을 같이 지냈다. 그곳에서 10단계 보호처분 중 6호 처분(민간 시설의 감호 위탁)을 받고 전주의 법무부 관할 보호시설로 옮겨졌다.
신망원에선 가람이 큰형에 속했지만, 전주에선 다시 막내였다. 형들에게 발로 걷어차여 코에는 금이 가고 이빨도 부러졌다. 가람은 밤마다 ‘태생’을 생각하다 잠들었다.
‘내가 만약 보통 가정에서 멀쩡하게 태어나서 자랐으면 어땠을까….’
원장인 임영숙 수녀는 그나마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 주말엔 아이들 밥을 손수 지었고, 아픈 아이가 생기면 직접 병원을 데리고 갔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조금씩 벗어나던 가람이 과거의 관성대로 대들고 나서도 후회라는 것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임 원장도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가람은 아무 종교도 믿지 않았지만 자기 전 매일 기도했다.
“제가 한 행동들에 대해서 정말 반성하고 있으니까 빨리 신망원에 보내주세요. 이 순간들이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제발요.”
한편 가람을 퇴소시킨 박 원장은 초조했다. 원장으로선 해야 할 조치였지만 인간적으로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가람과 같이 뿌리를 전혀 모르는 ‘무연고’ 아이들은 부모가 누구인지는 아는 아이들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생고아”라고 일컬었다. 외로움과 분노에 가득 찬 가람이 세상마저 등 돌린 생고아가 됐다고 생각할까 봐 마음이 쓰였다.
반면 가람은 박 원장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가출을 일삼던 시절에도 가람은 박 원장에게 긴 카톡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죄송해요. 지금 제가 하는 행동들이 잘못이라는 건 알아요. 금방 고칠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가람 마음 깊은 곳에는 다시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랬던 자신을 박 원장이 공식적으로 내친 것이었다.
그래도 박 원장은 ‘정선 이모’와 함께 간간히 전주로 찾아왔다. 그리곤 가람에게 해마다 약속했다. “1년 뒤에 데리러 올게.” 2016년 가람이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엔 다짐도 했다. “너 3년 후에 고등학교 졸업하면 같이 제주도로 여행 가자.”
허황하게 들리는 기약들 속에서 두 사람은 서서히 익숙해졌다. 가람의 ‘사고 빈도’도 점차 낮아졌다. 물론 보호관찰기간 동안 더 문제를 일으키면 다음 순서는 소년원이라는 두려움이 가장 컸다. 하지만 거칠었던 친구들이 사라진 자리를 ‘전주엄마’ 임 원장과 ‘양평엄마’ 박 원장이 채우면서 가람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고등학교 1학년 담임은 가람의 생활기록부에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라고 적었다.
최초의 가로등을 찾아가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었다. 가람은 키가 컸다. 아무리 먹어도 살도 찌지 않았다.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비슷한 처지의 주변 친구들 중에서는 경찰서에서 부모의 연락처를 찾은 사람도 있다고 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자 가람은 세 살까지 살았던 영아원에 연락했다. 주택가 가로등 아래에서 발견됐다는 내용, 신고자의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서울 중랑구 신내동 XXX’라는 주소를 받아적어 찾아갔다. 식당과 주차장, 낡은 연립빌라 사이에서 가람은 두리번거렸다. 가로등이 많았지만 여기다 싶은 지점은 없었다.
지구대와 경찰서도 찾아갔다. DNA를 채취해 실종아동찾기 데이터베이스에 올려두겠다는 얘기, 만약 그걸로 친모를 찾더라도 친모가 동의해야만 연락할 수 있다는 얘기뿐이었다. DNA 채취는 이미 오래전 신망원에서도 했던 것이었다. 다른 자료는 없느냐고 묻자 경찰은 말했다.
“그때만 해도 옛날이라 다 수기로 적어가지고 폐기됐을 건데….“
친부모를 찾게 된다면 무엇부터 하려고 했느냐고 묻자, 가람은 “싸대기 한 대씩 때려주고 끝내고 싶어요. 여자 한 대, 남자 한 대요”라고 말했다. 아마 빚이 많을 테니 알고 지내고 싶진 않았다. 다만 단 한 가지, 친부모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긴 했다. “대체 어떤 상황이었기에 저를 낳아서 버렸어야 했나요.” 더 이상 직접 물어볼 수 없어진 질문이었다.
남은 건 신고자 연락처였다.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다. 나이 든 남자가 받았다. 신고한 것은 자기의 딸인데, 당시 일로 너무 충격을 받았으니 더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 딸은 가람의 가장 어릴 적 모습을 본, 유일한 인물이었다. 가람은 1년에 두세 번씩 모두 다른 시간대에 전화를 걸었다. 매번 그 남자가 받았다.
대학교까지 마친 지난해, 전주를 떠나려 이삿짐을 정리하던 지난해 이삿짐을 정리하던 가람은 그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메모지를 발견했다. 오랜만에 다시 전화번호를 눌렀다. 이번에도 통화가 안 되면 그만할 참이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처음으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옛날 기억을 하나씩 더듬어 설명해줬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밖에서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나가 보니까 아기가 있더라고요. 깜짝 놀라서 경찰서에 데려다줬는데, 주변에 어떤 할머니가 서성대고 있었어요. 그 할머니께서 경찰서까지 따라오셨는데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요. 지금은 어떻게 지내요?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어요?”
“아, 저, 이제 대학 막 졸업했고요, 취업해서 이사 갈 예정이고….” 갑작스런 질문에 가람이 얼떨결에 답하자 그는 말했다. “잘 커 줘서 고맙네요.”
잠시 말을 잇기 어려웠지만 가람은 용기를 냈다. “다음에 한 번 올라가면 뵙고 싶어요”라는 말에 그는 “언제든 괜찮으니, 연락 한번 하고 와요”라고 답했다.
가람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도어락에 지문을 얹고 ‘가족’이 되었다
올해 다시 찾아온 충무공 탄신일 4월 28일. 가람과 여자친구, ‘엄마’와 ‘아빠’가 생일맞이 식사를 하러 모였다. 그 자리에서 박 원장이 입을 뗐다.
“딸들한테 네 입양 동의 받았어.”
옆자리 여자친구를 의식한 가람은 그 순간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간신히 눌렀다. 가람은 그때 박 원장 부부를 엄마아빠로 부르고 수시로 집에도 드나들었다. 하지만 서류상 가족이 아닌 상황에서 가람은 늘 눈치를 봤다. 친척 경조사 때는 자신이 박 원장을 ‘엄마’라고 부르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해야 했다. 박 원장 부부는 드문드문 ‘성인 입양’ 얘기를 꺼냈지만, 가람은 별 희망을 품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커다란 생일선물을 받은 것이다.
입양 절차를 마치고 얼마 후 박명희는 집 도어락을 최신형으로 교체했다. 이가람에서 ‘박가람’으로 성도 바꾼 그는 가족의 지문을 등록하는 기계에 자신의 엄지손가락도 얹었다. 이젠 진짜 가족이 됐다. 믿을 수 있고 흔들리지도 변하지도 않는 어딘가에 속해있고 싶다는 안정감. 가람이 평생에 걸쳐 원해온 걸 얻은 순간이었다.
성인이 된 가람에게 ‘부모 없는 놈’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대신 동정과 의심이라는 상반된 시선이 따라붙었다. 일터의 동료는 “너 자취하잖아”라는 핑계로 반찬이며 선물을 자꾸 챙겨줬다. 그는 자취하는 다른 직원들에겐 그런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대학 때 일했던 카페 사장도 가람이 보육원 출신이라는 걸 안 뒤 30만 원이 든 봉투를 챙겨주며 속삭였다. “다른 애들한텐 휴가비로 5만원씩만 줬으니까 비밀로 해.”
아무 일도 없을 땐 연민을 샀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1순위 용의자가 됐다. 술집에서 일할 때 사장은 “시재가 안 맞는다”며 전 직원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첫 번째로 가람을 호명했다. 이런 누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가람은 아득바득 완벽을 추구하며 살았다.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를 동정하고 의심하게 되기도 했다.
현재 가람은 내년을 목표로 미국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 대학에서 전공한 호텔조리학과 식당에서 직접 일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요식업 분야의 사업을 배워볼 생각이다. 그의 휴대전화 잠금화면은 흰 바탕에 고딕체로 적힌 영어단어들로 빽빽했다.
“제가 원래 낯선 곳에 새로 적응하는 것을 좋아해요. 재미있잖아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안다. 아마도 한국에 다시 돌아올 생각은 들지 않을 것 같다고 가람은 말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휘둘렸던 과거를 모두 갈아엎는 새출발을 그는 갈망하고 있었다.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지만 귀신은 무서워했던 아이, 가출을 일삼다가도 밤늦게 귀가할 땐 깜깜한 시골길이 무서워 한 가로등에서 ‘흐읍’ 심호흡한 뒤 다음 가로등까지 숨을 참고 달려야 했던 아이, 언제나 온전한 사랑을 원했던 아이가 세상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은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가람은 신망원에서 배우 강동원을 만난 기억을 떠올렸다. 베이비박스(부모가 아이를 두고 갈 수 있도록 만든 상자)를 다룬 영화 ‘브로커’에서 그는 심성이 따뜻한 보육원 출신 청년을 연기했다. 연기를 앞두고 가람에게 조언을 구하러 온 강동원은 “내가 이번 영화에서 연기할 때 어떤 마음으로 임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가람은 잠시 고민하다가 짧게 답했다.
“그냥, 이 아이들이 마냥 사회의 악(惡)으로 비치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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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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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기자 suwoong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