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선교지 탐방 중보기도 사역
지난달 말부터 이달 초까지 제2차 선교지 탐방 중보기도 사역이 불가리아에서 진행되었다. 이번에는 제1차 때와는 달리 지인 목사님의 요청으로 불가리아로 정하게 되었다. 그분의 선교회가 불가리아 현지인을 대상으로 소도시에서 전도자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필자는 그 프로젝트에 합류하기에 앞서, 수일 동안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서 본연의 임무인 중보기도사역을 진행했다.
필자가 불가리아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북한학자로서의 강한 끌림에서다. 불가리아는 1980년대 말까지 구소련의 16번째 위성국으로 불릴 만큼 많은 비호를 받으며 사회 전반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은 나라다. 1990년 민주화 열풍으로 인해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에서 ‘불가리아 공화국’으로 바뀐 것이다. 이 나라의 민주화 과정과 그 이후의 변화상을 꼭 보고 싶었다. 북한의 미래를 앞당겨 본다는 심정으로…….
수도 소피아, 무질서 속의 질서
영국을 경유하여 10월 31일 새벽녘에 소피아 공항에 도착했다. 몇 시간 대기하다 이른 아침에 버스를 타고 소피아 시내로 들어왔다. 투박한 이름인 불가리아와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도시다. 불가리아 인구의 20%(130만여 명)가 거주하는 대도시로 유럽에서 아테네와 로마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소피아 이전 고대 이름은 ‘세르디카’로, 기원전 7세기 비잔틴 시대 인도유럽계 트라키안 족인 세르디가 정착하면서부터 불렸다고 한다. 14세기 이후부터 불린 소피아는 그리스어로 ‘지혜’를 뜻한다.
발칸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불가리아는 서기 681년 트라키아 유목민과 슬라브족이 합세하여 동로마(비잔티움)제국을 물리치고 이곳에 불가리아 제1국을 건설했다고 한다. 또한 불가리아의 시몬1세가 키릴문자의 원형을 만들었는데, 이는 동로마제국의 키릴로스 형제가 슬라브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만든 ‘글라골 문자’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현재 러시아 및 동유럽 국가들에서 이 문자를 사용하고 있어 불가리아인들의 긍지와 자부심은 대단했다.
불가리아의 인구는 점점 감소해서 2020년도에 700만 아래로 떨어졌고, 현재는 650만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나라에 버금가는 인구절벽의 위기를 맞고 있는 나라다. 게다가 3년 전에 초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2021년 기준 노인인구 비율 21.3%). 총면적은 남한의 1/2 수준(110,993㎡)인데, 수도인 소피아를 비롯해 몇몇 대도시에 사람들이 몰려 외곽지역들의 공동화 현상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나가 보니 소피아는 활기찼다. 거리마다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소피아의 교통수단들이었다. 도로 양쪽으로 철로가 깔려 있었고, 자동차 버스와 더불어 철로 위를 트램(2량짜리 전차) 버스들이 쉴 새 없이 다니고 있었다. 심지어는 위에 설치된 전선에 연결돼 바퀴가 달린 버스들도 다녔다. 현지인들은 그것을 ‘트롤리 버스’라고 부른다. 최신식 차량도 있었지만, 사회주의 시기에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매우 낡은 것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재미난 사실은 트램버스의 기사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알아 보니 운전하기가 용이한 측면도 있지만, 아내들이 남편들을 먹여 살리고 가족을 부양하는 풍조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여러 교통수단들이 쌍방향으로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면서 무질서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트램버스를 타고 내릴 때는 사람들이 신호와는 무관하게 도로를 가로질러 다니는 것을 보면서 교통사고가 빈번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인교회 목회를 하시는 분께 알아 보니, 외부인들이 볼 때는 그렇게 보이지만 나름대로 그들 안에 질서가 있다면서 교통사고는 거의 나지 않는단다. ‘무질서 안의 질서’라고 해야 할까. 현지인들의 느긋한 기질과 성향도 나름 질서유지에 한 몫을 한다고 했다.
소피아의 종교, 평등 속의 불평등
소피아는 세계인이 많이 찾는 유명 관광도시다. 불가리아가 동서양을 잇는 관문이기에, 불가리아를 많이 경유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소피아도 찾게 되고 도시의 매력에 흠뻑 빠진다고 한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시내 중심 세르디카 전철역에서 만나게 되는 고대 로마시대 유적지다.
2010년부터 시작된 지하철역 공사 중, 지하에 묻혀 있던 세르디카 유적지가 발견됐다. 상당히 보존가치가 높은 유적지지만 불가리아 정부는 과거와 현재의 조화를 추구하며 시민들 생활공간의 일부가 되게 했다. 우리나라와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유적지 노출로 인한 훼손의 위험성보다는 융합의 시너지를 먼저 내다본 결과로 보인다. 그 결과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차고 넘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반가운 지하교회 건물도 이 유적지 안에서 발견되었다. 이 성 페트카(Petka) 지하교회(반지하 형식)는 오스만제국의 지배 초기인 14세기 때 숨어서 예배를 드렸던 장소라고 한다. 신앙의 숨결과 순교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귀한 장소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반대편 세르디카 유적지가 끝나는 지상 위에 어느 정도 크기의 모스크가 위치해 있었다. 기둥이 하나 세워진 것을 볼 때, 지방 부호가 건축한 것으로 추정된다(기둥 4개는 왕, 3개는 왕족, 2개는 귀족이 건축). 바나바시 모스크(1576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사원)에서는 정해진 시간에 기도소리를 밖으로 내보냈고, 그 소리는 도심 속 깊이 파고들었다. 제1차 선교지였던 튀르키에의 셀주크에 와 있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과거 소피아 도심에 70여 개 정도의 모스크가 있었다고 한다.
불가리아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적잖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슬람교는 과거 오스만제국이 500년 가까이(1396-1878) 이 땅을 지배하면서 퍼트린 종교이기 때문이다. 불가리아인들에게는 굴욕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하는 종교임에도, 그들은 이마저도 수용해 버렸다. 그래서 현재 무슬림의 비율이 약 12%를 넘어서고 있다. 물론 튀르키에 이주민들의 수가 상당수 비율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가까이 가 보니, 모스크를 드나들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그만큼 포교도 열심히 할 것이다.
사실 불가리아는 동방정교(불가리아정교회)를 국교(864년에 채택)로 하는 나라로, 비율이 83%에 다다르고 있다. 문제는 마음으로만 믿는다는 데 있다. 실제로 예배생활을 하는 숫자는 극히 적다고 한다(10% 내로 보고 있음). 다른 종교에 관대함을 보이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수도 소피아에서는 이런 양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여러 종교들을 대표하는 건물들이 대통령궁,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해서 정방형으로의 지근거리에 위치해 있다. 서쪽으로는 가톨릭 성당이 자리잡고 있고, 북쪽으로는 모스크가, 동쪽과 남쪽에는 대표적인 동방정교교회들과 러시아 정교회 교회가 위치해있다. 마치 모든 종교에 관대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개신교 교회는 없다. 중심지역은 고사하고 외곽에조차 그럴듯한 교회 건물이 없다. 알아 보니 개신교인이 1%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수도 소피아에 1만 3천여 명밖에 없다는 의미다. 다른 종교에 비해 뒤늦게 들어간(19세기) 것도 있지만, 마음으로 기독교 일종인 동방정교를 믿고 있는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매우 난감한 측면이 있다. 이미 자신들은 믿고 있다면서,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개신교인들을 이단시한다고 한다. 유일하게 핍박과 통제를 받는 종교가 개신교라고 한다.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교회 건물을 대통령궁과 다른 건물들이 빙 둘러 막고 있어서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게 했다. 이 건물은 성 게오르기 교회로, 4세기 콘스탄티누스 1세 때 지어져 소피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9세기부터 성 게오르기(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박해를 받아 순교) 교회로 불린 건물이다. 소피아 역사를 대표하는 교회임에도 가려져있다. 평등 속의 불평등이다.
동방정교회들을 둘러보니, 가톨릭보다 성인숭배 사상이 더 강해 보였다. 건물 내부가 너무나 화려한 나머지 어지럽기까지 했다. 러시아정교회가 오히려 차분하게 느껴질 정도다. 소피아에서 동방정교회를 대표하며, 이 도시의 랜드마크로 유명한 네프스키(Nevsky) 교회의 외관은 웅장했다.
내부는 너무나 화려했고 셀 수 없이 많은 성인들의 입상뿐만 아니라 오색 컬러의 벽화들이 벽과 기둥, 천장을 온통 둘러싸고 있다. 천장 중앙벽화를 보고 필자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부처상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쳐다봐도 꼭 그랬다. 동방정교회가 이런 건가 생각이 들며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후에 알아 보니, 아기 예수를 저런 방식으로 그린다는 것이다. 며칠 후에 그리스 빌립보를 가게 되어 루디아 기념교회를 방문했는데, 거기서도 예수님을 저런 식으로 그리고 있었다. 한편 이곳 현지인들은 우리나라에 와서 놀란다고 한다. 불교 사찰에서 그들이 알고 있는 형상의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이다.
첫날은 이 나라의 민족성, 국민성(시민의식), 종교성을 파악하며 소피아 이곳저곳을 다니며 땅밟기 중보기도를 했다. 아침에 묵상한 요나서의 요나 선지자를 부러워하면서……. 요나는 어쩔 수 없이 사명의 자리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마음을 쏟아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지 않았다. 3일 걸릴 일을 하루 만에 끝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도성에 엄청나게 놀라운 회개 역사가 일어났다.
“주여! 소피아 성에도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마음으로 부르짖고 입 밖으로 내뱉으며 돌고 또 도는 내 모습이 썩 멋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순종의 자리에 서 있다는 감사의 마음으로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