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문준경… 죽을 것처럼 살다, 살 것처럼 죽자 : 선교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이윤재 선교사의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안식 (6) 순교자 문준경

천사의 섬 증도, 영혼의 안식처
아프리카 선교 중에도 의지해
결혼 실패하고 목포로 이사해
이성봉 목사 만나 전도자 됐다
성도들 위해 섬 돌아갔다 순교
무덤에 손 얹고 기도하니 평안


▲이윤재 선교사가 문준경 전도사가 전도했던 신안의 섬들을 살펴보고 있다.

▲이윤재 선교사가 문준경 전도사가 전도했던 신안의 섬들을 살펴보고 있다.


문준경은 오랫동안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의 영웅적인 순교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펼쳐진 천사의 섬 증도는 내가 영적으로 고갈할 때마다 돌아가고 싶은 영혼의 안식처였다.

그러나 나는 끝내 문준경에게로 가지 못하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누군가, 선교는 순교라고 했던가? 내가 아프리카에서 선교가 순교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마다, 나는 한 알의 밀알로 자신을 드린 이 땅의 수많은 순교자들을 떠올렸다.

당연히 문준경도 그 중의 하나였다. 문준경은 아프리카에서도 내가 의지한 마음의 안식처였던 셈이다.

문준경을 방문하기 위해 성결교 동역자 장주섭 목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바쁜 금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서 나에게 문준경을 안내해주었다. 그는 문준경을 안내해줄 뿐 아니라 암태도 최장원 목사를 소개하고 나에게 여비까지 주었다.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지를 기념하는 비석.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지를 기념하는 비석.


증도로 가기 위해 나는 서해안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함평을 지나 무안으로 접어들자, 멀리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곧 증도대교를 통과했고 갯벌과 염전이 시작되었다. 도롯가 간판에는 ‘슬로 시티 증도’라는 글귀가 보였다. 바로 이곳에서 6.25 때 유명한 순교가 일어났다.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였다.

문준경은 1891년 2월 2일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3남 4녀 중 3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배움에 대한 열망이 있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글을 배우지 못한 채 17세에 정근택과 만나 결혼했다.

남편은 사업을 한다고 한번 집을 나가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아무 연락도 없는 무심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딴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문준경은 남편도 없는 시댁에서 지극정성으로 시부모를 모셨다. 며느리를 가엾게 여긴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한글 공부를 가르쳤다. 그리고 곧 세상을 떠났다. 홀로 된 문준경은 오빠가 있던 목포로 이사하여 삯바느질로 삶을 이어갔다.


▲문준경 전도사의 묘지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이윤재 선교사.

▲문준경 전도사의 묘지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이윤재 선교사.


그러던 문준경에게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다. 우연히 목포에서 전도받은 문준경은 전도자를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당시 담임 교역자였던 이성봉 목사를 통해 믿음의 세계에 눈뜨기 시작했다.

1932년 9월, 문준경은 이성봉의 권유에 따라 성결교회 신학교였던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했다. 41살의 기혼 여성이 신학생이 된 것이다. 당시 경성성서학원은 6년제였고, 그 중 매년 6개월은 전도현장에서 실습을 하는 체제였다.

그는 졸업할 때까지 6년을 순회 전도사가 되어, 섬을 다니며 전도하기 시작했디. 1933년 임자도 진리교회를 시작으로 증동리교회, 대초리교회, 방축리교회, 우전리교회, 사옥교회 등을 개척했다.

그러나 6.25 전쟁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공산당은 퇴각을 시작하면서 남은 기독교인을 색출해 죽이기 시작했다. 그가 목포로 잠시 나와 있던 날, 그는 자기 전도한 섬에 있던 많은 신자들이 죽음의 위기에 놓여 있다는 말을 들었다.


▲문준경 전도사가 세운 증동리성결교회.

▲문준경 전도사가 세운 증동리성결교회.


그는 중동리로 다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그의 스승 이성봉 목사가 만류했다. 아직 섬에는 공산군이 남아 있고, 수복되지 못했으니 안전이 확보된 후에 건너가라고 했다. 그러나 문준경은 이미 결심한 상태였다. 섬에 남아 있는 다른 교인들이 무고하게 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1950년 10월 5일 스스로 내무서를 찾아온 문준경은 공산당에게 붙잡혀, 새끼줄에 꽁꽁 묶인 채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끌려갔다. 거기에는 그가 딸같이 사랑하던 백정희 전도사와 수많은 신자들이 묶여 있었다.

이때 문준경은 자신은 죽이더라도 백정희 전도사와 다른 성도를 죽이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때 공산당이 크게 소리쳤다. “이 반동 간나 씨암탉을 죽이라.”


▲문준경 전도사가 세운 증동리성결교회.

▲문준경 전도사가 세운 증동리성결교회.


공산당들은 문준경을 죽창으로 찔러, 순식간에 그의 몸은 피범벅이 되었다. 마지막 남은 숨을 끊으려고 총을 쏘려는 순간, 그가 크게 기도했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이 계집종의 영혼을 받으소서!”

그날 죽은 사람은 문준경만이 아니었다. 임자도 이판일 장로 가족과 성도 48명이 함께 순교했다. 그때가 1950년 10월 5일, 그의 나이 59세였다.

최 목사와 함께 문준경이 순교한 바닷가로 갔다. 바다는 마침 물이 빠져 검은 갯벌이었다. 그 갯벌 옆에 문준경 기념비와 무덤이 놓여 있었다. 그 무덤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어머니같은 평안이 밀려 왔다.

이어서 문준경 순교기념관에 들렀다. 그가 남긴 고무신, 성경, 그리고 그가 걸어다니며 전도한 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문준경은 손수 11개 교회와 기도처를 섬마다 세웠는데, 그 교회들이 후에 천사의 섬 신안군에 192개 교회가 세워지는 디딤돌이 되었다. 그의 영향으로 증도 주민의 90%가 기독교인이 되고(한국에서 복음화율이 가장 높다), 159명의 목회자와 81명 장로가 배출됐다.


▲문준경 전도사가 세운 교회.

▲문준경 전도사가 세운 교회.


말라리아에서 거의 죽었었다
죽음, 존재의 사멸 아닌 연속
그 속에서 황홀한 세계 경험
우린 다시 살기 위해 죽는다
단절 아닌 새로운 세계 과정
죽음, 절대 두려워하지 말자

뿐만 아니라 문준경의 죽음은 그 후 수많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낳았다. CCC의 김준곤, 중앙성결교회 이만신, 치유신학자 정태기, 사업가 박성철, 목회자이며 시인인 고훈, 한신대 총장 고재식, 신학자 서남동, 성결교 목회자 이봉성, 통합 총회장 채영남, 그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문준경이 보여준 순교의 삶을 증언했다.

그렇다. 산 사람은 살아 있을 때만 말하지만, 죽은 사람은 죽은 뒤에도 말한다. 설교가 브룩스가 말한대로 목회자는 두 가지 가죽이 닳아야 한다. 가죽 성경이 닳고, 가죽 구두가 닳아야 한다. 그러나 닳야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우리 목숨이다. 독재자는 힘으로 말하고 설교자는 말로 말하지만, 순교자는 죽음으로 말한다. 죽어야 살고, 죽어야 살린다.


▲문준경 전도사가 세운 교회.

▲문준경 전도사가 세운 교회.


내가 죽음을 겁없이 말하는 이유는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로 거의 죽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체험된 죽음은 존재의 희미한 사멸이 아니라 존재의 분명한 연속이었으며, 죽음 때문에 슬픈 것은 내가 아니라 내 가족과 지인이었다.

죽음 직전에 퍼뜩 깨서 현실로 돌아왔을 때, 나는 기뻤다기보다 오히려 실망스러웠다. 그 이유는 죽음 그 속에서 경험한 황홀한 세계 때문이었다.

우리는 사라지기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기 위해 죽는다. 죽음은 새로운 세계로 가는 과정일 뿐, 결코 생명의 단절이 아니다. 신앙적 죽음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순교적인 죽음이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죽을만큼 살다가, 죽으면 다시 살자.
죽을 것처럼 살다가, 살 것처럼 죽자.
죽음을 절대 두려워하지 말자.

두려워할 것은 의미없이 사는 나의 헛된 삶이다.
죽음조차 두렵지 않다면, 우리가 무엇이 두렵겠는가?
문준경이 증도에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깨우쳐준 것이 바로 이것이다.


▲문준경 전도사가 세운 교회.

▲문준경 전도사가 세운 교회.


이윤재 선교사

우간다 쿠미대학 신학부 학장
Grace Mission International 디렉터
분당 한신교회 전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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