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위한 울타리 사라져… 대안은 교회 공동체뿐” : 사회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바른 인성·신앙으로 양육할 울타리 사라져
성공은 실패 가져와, 그 피해는 어린이에게
과학문명, 공동체 해체해… 노예의 삶으로
건강한 자기정체성의 대안은 교회공동체뿐





복음통일 컨퍼런스 31차

▲한 기도 모임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 어린이(위 사진은 본 기사 내용과 직접적 연관이 없음). ⓒ에스더기도운동 제공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상임대표 김영한 박사, 이하 샬롬나비)이 어린이날을 앞두고 “교회 공동체가 어린이 성장에 미치는 과학 발달과 경제 성장의 폐해, 공동체 상실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샬롬나비는 3일 어린이날 논평에서 “어린 아이 출산률이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저출산 상태에 이르렀고, 현재도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태어난 아이들도 성장하는 사회적 과학적 환경이 건강한 인격을 형성하기에는 너무나 열악한 환경이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동물은 출생 후 30분 안에 무리를 따라 다녀야 하기에 모태에서 이미 많은 것을 형성한 후에 태어나지만, 인간은 자궁 밖에서 해내야 하는 과제가 너무 많고 쉽지 않아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가정공동체를 주신 것”이라며 “그러나 인간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이 가정과 삶의 주인이 되고부터 가정공동체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바른 인성과 신앙으로 양육할 수 있는 안전한 울타리가 사라졌다”고 했다.

이어 “한국은 짧은 시간 안에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성공한 나라로서 세계적인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이 또 다른 그림자를 만들어내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수록, 갈급증을 더 심화되었고, 불안도 더욱 가중되었다. 성공이 또 다른 실패를 불러온 것이다. 이러한 후유증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대상은 우리의 어린아이들”이라고 했다.

이어 “하나님을 떠난 부모들은 아이 안에 있는 잠재력과 시간을 부모 자신들의 자본으로 생각했고 자신들은 그 자본의 경영인으로 생각했다”며 “부모에 의해서 하나님이 주신 참 자기를 억눌려 왔던 아이가 후일 서구의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무신론과 만날 때, 이들은 사회의 제도와 권위를 억압으로 해석하고 모든 상징적 체계를 거부하는 반사회적인 인간으로 전락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또 “아이들은 몸을 통해서 적절한 좌절를 경험하고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하지만 현대 과학문명은 영상을 통해서 아이들의 전능성을 쉽게 충족시켜 준다. 사랑과 희생 안에서 권위를 배우지 못한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이 들려지고 아이들은 실제적인 관계가 아닌 스크린을 매개로 모든 활동이 이루어질 때, 모든 것은 원자화되기 시작했고 공동체는 사라져 왔다”고 우려했다.

샬롬나비는 “종교적 심성은 나를 넘어서는 그 무엇, 곧 영성에서 온다. 아직 세상의 가치관이 저들을 점령하기 전에 어린아이들을 하나님에게로 데려와야 한다. 그리고 부모들이 삶으로 신앙의 모범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강한 공동체는 오직 교회 외에는 없다”고 전했다.

끝으로 “ 믿음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 외에 어린아이를 바른 인성으로 양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문명의 거대한 흐름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문명의 흐름을 대항할 수 있는 건강한 공동체는 오직 교회 외에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논평 전문.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아이들이 바른 인성과 신앙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건강한 가정을 만들어야 한다
교회공동체가 어린이 성장에 미치는 과학발달과 경제성장의 폐해, 공동체 상실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올해 102회 어린이 날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어린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갈 환경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어린이날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통치하던 1922년에 제정되었다. 식민지의 암울한 환경 속에서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어린이들을 귀하게 여기기 위하여 이 날을 제정하였다. 어린이날은 1937년까지 지켜진 후에 일제의 소년단체 해산명령으로 중단되었다. 해방이 된 후인 1946년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해 현재까지 지켜오고 있다. 일제 때는 식민지 상태에서도 어린이들이 꿈을 안고 살아가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고, 해방 후에는 해방된 조국의 미래의 꿈나무로 자라도록 격려하며 지켜왔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을 지나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성공하였고 민주화를 달성한 모범적인 선진국이 되었다. 하지만, 어린 아이 출산률이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저출산 상태에 이르렀고 현재도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태어난 아이들도 성장하는 사회적 과학적 환경이 건강한 인격을 형성하기에는 너무나 열악한 환경이 되어가고 있다. 이에 샬롬나비는 어린이들의 바른 인성과 신앙발달을 위해 다음과 같은 논평을 발표한다.

   1. 어린이들이 바른 인성과 신앙으로 양육할 수 있는 안전한 울타리가 사라졌다.
‘어린이’라는 단어를 듣는 사람은 누구나, ‘순수함’이나 ‘가능성’과 같은 단어들을 연상하게 된다. ‘잠재성’을 내포하는 이러한 단어들은 동시에 성공과 실패를 암시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어린이가 의존적인 존재이고 그들의 운명이 그들을 돌보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출생 시, 거의 초인적인 모성 집중에 의해서만 생존이 가능한 ‘절대의존’의 시기를 거친 후, 욕구를 채우며, 동시에 적절한 좌절을 경험해야 하는 ‘상대의존’ 기간을 통과해야 한다. 이후, 부모의 돌봄 없이 지낼 수 있는 수단들을 조금씩 축적시키면서 자기감을 발달시키게 된다. 어린이는 이런 사랑의 힘으로 독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고 수많은 우여곡절과 시행착오도 초기의 돌봄의 힘을 바탕으로 헤쳐 나가게 된다. 이러한 독립의 과제를 수행해 내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신뢰와 안정적인 돌봄이 필수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동물은 출생 후 30분 안에 무리를 따라 다녀야 하기에 모태에서 이미 많은 것을 형성한 후에 태어나지만, 인간은 자궁 밖에서 해내야 하는 과제가 너무 많고 쉽지 않아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가정공동체를 주신 것이다. 이 공동체의 호주는 하나님이 되어야 하고, 자녀를 키우는 매뉴얼은 성경의 기록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인간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이 가정과 삶의 주인이 되고부터 가정공동체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곧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안전한 울타리가 사라진 것이다.

   2. 성공은 또 다른 실패를 가지고 왔고 그 피해는 어린이에게 돌아갔다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강한 경쟁심과 승부근성이 있다. 이것은 과거 당파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했었지만, 전 지구적 경쟁시대에서는 유리한 이점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승부근성이 한국을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만들어 주었고, 군사력 세계 5위의 강국을 만드는데 일조했다. 한국은 짧은 시간 안에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성공한 나라로서 세계적인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이 또 다른 그림자를 만들어내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수록, 갈급증을 더 심화되었고, 불안도 더욱 가중되었다. 성공은 저출산 세계 1위라는 점수로 돌아왔고 경쟁은 현실과 이상의 갭의 간극을 더욱 크게 벌려놓았다. 이 갭이 우울증의 원인이 되어 자살율 세계 1위라는 오명도 만들었다. 성공이 또 다른 실패를 불러온 것이다. 이러한 후유증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대상은 우리의 어린아이들이다. 하나님을 떠난 부모들은 아이 안에 있는 잠재력과 시간을 부모 자신들의 자본으로 생각했고 자신들은 그 자본의 경영인으로 생각했다. 우리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으로 우리는 청지기 일뿐이다. 불신앙 안에서 자녀를 경영할 수 있는 자원으로 본다면 자녀의 미래가 어떻게 망가질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 될 것이다. 아이가 우상이 되거나 역으로 부모가 못 이룬 욕망을 성취하는 도구가 된다면 하나님이 주신 아이의 생체리듬이나 잠재력이 발화될 수 없게 된다. 아이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소명을 갖고 이 땅에 보내진 것이다. 부모에 의해서 하나님이 주신 참 자기를 억눌려 왔던 아이가 후일 서구의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무신론과 만날 때, 이들은 사회의 제도와 권위를 억압으로 해석하고 모든 상징적 체계를 거부하는 반사회적인 인간으로 전락하게 된다. 혹 이러한 위험에서 무사히 빠져나온다 한들, 세상은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촘촘한 저인망 그물로 그들을 다시 낚아채고 만다. 현대문명이 부모의 질과 관계없이 아이에 대한 경영권을 빼앗아 가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의 전략은 어떤 교설이나 사상체계의 무장이 아니라, 과학문명과 결합된 알고리즘과 대중문화로 우리 아이들의 삶과 생각 속으로 파고 들어온다. 아이들은 자신의 취향과 선택으로 자신의 일을 결정한 것으로 알지만 사실 교묘한 조종을 받게 된다.

   3. 과학문명은 공동체를 해체시켰다. 그 피해 역시 어린이에게 돌아갔다.
아이들은 몸을 통해서 적절한 좌절를 경험하고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하지만 현대 과학문명은 영상을 통해서 아이들의 전능성을 쉽게 충족시켜 준다. 결과 아이들은 분노조절 장애를 갖게 되고 이것이 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아직 사이버 세계를 자신의 삶에 창조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이 주어지는 것은 극약을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 과학의 첨단 기계문명은 하나님이 주신 가족공동체를 원자화시켰다. 또한 이 문명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성직(聖職)을 없애버린다. 의사라는 성직, 법조인이라는 성직, 교사라는 성직, 부모라는 성직 등. 환자도, 학생도, 학생도, 자녀도 모두가 다 욕망의 도구일 뿐이다. 모두가 자신의 권리만을 외치며 서로의 전능성이 부딪치는 혼탁한 사회에서 모두가 신음하고 있다. 그 원인은 공동체 해체에 있다. 과거에 모든 좋은 것들은 공동체에서 찾았고 이러한 관습의 기반 위에서 건강한 권위가 자연스럽게 습득되었다. 당시에는 가족이나 공동체의 기반이 없이 아이를 혼자 키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애를 하나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했다. 인간은 공동체에서 위계와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가족보다 더 큰 상징체계인 사회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학은 가족을 해체하고 모든 공동체의 기반을 무너트렸다. 사랑과 희생 안에서 권위를 배우지 못한 아이들에게 스마트 폰이 들려지고 아이들은 실제적인 관계가 아닌 스크린을 매개로 모든 활동이 이루어질 때, 모든 것은 원자화되기 시작했고 공동체는 사라져 왔다. 동시에 모든 권위도 사라졌다. 기계론적 유물론 안에서는 어떤 가치나 의미도 발견될 수 없다. 자유를 원했던 우리의 아이들의 미래는 컨베어벨트 위에서 기계의 일부가 되어 자율성이 어거되는 노예의 삶이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4. 어린이의 건강한 자기 정체성 형성을 위한 유일한 대안은 교회공동체에 있다.
건강한 자기 정체성을 갖기 위해, 우리의 어린이들은 자연의 세계에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져야 한다. 또한 기계와 접촉하는 시간보다 대인관계를 갖는 시간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출산률 0.65이고 아이에게 싸울 대상이 없다. 싸우면서 자신의 공격성을 실험도 해보고, 공격성을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 상대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도덕성의 능력도 키울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공동체에서 몸의 실전을 통해서 배우는 것들이다. ‘나’라는 인식은 생각으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고, 느끼고, 듣는 몸의 접촉을 통해 들어온다. 달려봐야 어느 정도 뛸 수 있는지, 싸워보아야 어느 정도의 싸움의 능력이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콘크리트 건물 속에서 하늘도‘ 별도’ 곡식이 자라나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탈신비화하는 아이들에게 무슨 인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건물 속에서 전자기계를 만지는 아이들에게 어떤 창조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올바른 ‘자기감’을 위해 너무 이른 사이버 세계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물론 막기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대체물이 필요하다. 어디에서 그 대체물을 찾을 것인가? 문명 안으로 이미 깊숙이 들어와 버린 아이들이 신앙을 갖게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콘크리트(Concrete)는 ‘구체적인’ 이라는 의미이다. 이미 모든 것이 포화된(saturated)것은 창조성의 기회가 막혀 있음을 말한다. 기계적 유물론적 세상에서 인성은 망가지게 되어 있다. 삶의 생생함을 느끼고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각(look at)이 아니라 통각(look into)의 능력이다. 종교적 심성은 나를 넘어서는 그 무엇, 곧 영성에서 온다. 아직 세상의 가치관이 저들을 점령하기 전에 어린아이들을 하나님에게로 데려와야 한다. 그리고 부모들이 삶으로 신앙의 모범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강한 공동체는 오직 교회 외에는 없다.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배우느냐에 따라 그의 인성과 심성이 결정된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의 거짓이 없는 믿음을 외조모 로이스와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었던 것이 디모데의 내면으로 유전되어 진 것으로 설명한다. (딤후1:5) 아이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아는 곳은 교회 외에는 없다. 우리의 자녀를 어디에 맡길 것인가? 교회 외에는 맡길 곳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5. 어린이 인성 교육은 가정과 교회가 신앙교육으로 해야 한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5-17)
사도바울의 이 서신서의 말씀은 오늘날 더 절실히 필요하다 할 수 있다. 믿음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 외에 어린아이를 바른 인성으로 양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문명의 거대한 흐름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문명의 흐름을 대항할 수 있는 건강한 공동체는 오직 교회 외에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다.

2024년 5월 3일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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