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칼럼]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과 비전 (2)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한장총 41회기 출범, “복음이 아니면 개혁할 수 없어”

▲김재성 교수(전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 ⓒ크투 DB 


2. 장로교회의 역사와 유산들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나간 역사의 성취와 교훈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 그리고 회중교회의 유산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교회의 역사와 자취를 공부하는 이유는 실패의 교훈을 통찰력 있게 꿰뚫어 보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함이다. 사울의 실패를 목격했던 다윗 왕이었지만 그도 역시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에 실패했었다. 다윗의 노년을 목격했던 솔모몬 왕도 역시 예루살렘 성전을 건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말년에 산당에서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다. 과거의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이 인생의 모순이요, 한계다. 부디 청교도 혁명의 시기에 크게 영향력을 발휘했던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고, 살아있는 교훈을 얻게 되기를 소망한다.

현대 장로교회는 너무나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 있는데, 미국의 경우에는 최대 교단이라고 하는 연합장로교회(PCUSA)가 동성애 문제로 크게 분화되고 말았다. 장로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들이라고 해서, 모두 다 성경에 충실하면서 역사적 신앙고백을 존중하고 따르는 교회라고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의 경우, 이런 현상은 1860년대 남북전쟁으로 촉발되었다. 흑인 노예를 해방하는 정치적 휴머니즘으로 온 세상에 감동을 주었으나, 미국 장로교회는 그 후로 역사적 신앙고백을 버리게 되었다.

유럽 대륙에서는 개혁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교회 체제는 장로교회와 거의 동일하다. 네델란드를 비롯하여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등 저지대 지방에서는 개혁교회가 거의 국가교회로 받아들여졌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는 신학의 뿌리를 칼빈과 정통 개혁주의 신학에 두고 있어서, 교회의 체제도 역시 당회, 노회, 총회의 체계를 동일하게 유지해 오고 있다. 그러나 네델란드의 개혁교회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시대를 거친 후에, 변질된 현대신학에 물들어서 신앙고백과 신학사상의 측면에서는 전혀 다른 교회가 되고 말았다. 네델란드 사람들이 식민지 시대에 점거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개혁교회가 큰 영향을 발휘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역시 가장 큰 교단이 자유주의 물결에 휩쓸리고 말았다.

로마 가톨릭의 지배를 벗어나서 성경적인 교회를 회복할 때에는 장로교회와 개혁교회가 모두 건전하게 하나의 순결한 교회 본질을 공유했었다. 그러나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장로교회든지 개혁교회든지 역사적 신앙고백을 벗어나서 사분오열되고 말았다.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정립된 신학적인 전통을 존중하는 교회들은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지키며 고수하고 있지만, 소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들이 변질된 것은 진보적인 신학과 세속적인 문화의 흐름에 물들었기 때문이다.

회중제도를 도입한 청교도들은 존 오웬과 같이 위대한 신학자의 영향으로 건전하게 성장했었다. 국가의 간섭을 벗어나서 보다 더 자율적이며, 자치권을 행사하는 교회를 세워나가고자 열정적으로 움직였다. 회중교회는 미국을 건설한 청교도들의 교회 체제였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바다를 건너간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토대 위에서 가장 이상적인 교회를 세우고자 노력했다. 존 코튼의 보스톤 회중교회가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1630년대부터 급증한 개척자들은 온갖 고난을 이겨내면서 성경적인 교회의 건설에 자발적으로 헌신했다. 그러나 첫 세대가 건설하고, 그 다음 두번째 세대가 지켜나가던 뉴잉글랜드 회중교회는 1690년대를 통과하면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뉴잉글랜드 최고의 설교자이자 신학자인 노쓰 햄튼의 조나단 에드워즈가 대각성 운동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으로 근대 민주주의 국가로 독립하였다. 하지만 그의 손자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회중교회는 부흥운동과 뒤섞여서,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전통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오늘날 영국이나 미국의 회중교회들은 존 오웬과 에드워즈의 회중교회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한국장로교회가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려면, 먼저 어떻게 해서 이런 교회 체제가 세워졌는가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확고해야만 한다. 16세기와 17세기 유럽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워진 장로교회는 여러 발전단계를 거쳐서 세워졌는데, 수많은 선구자들의 헌신적인 희생과 이름없는 순교자들의 기여가 담겨 있다.

1) 칼빈과 교회 자치권 확립: 장로교회의 첫 단초를 제공한 종교개혁자는 칼빈(1509-1564)이다.

먼저 그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과의 사이에 세우신 언약에서 발전되어 나왔다고 규정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시발점으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특별히 배려하고 돌보아주셨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란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이며, 구원을 위해서 양자 삼은 백성들이다. 칼빈은 교회란 성도들의 목자와 교사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일깨워주는 영적인 사명을 감당하며, 마치 어린아이를 양육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의 역할과 같은 기능을 감당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칼빈의 분투 노력으로 인해서 1541년부터 제네바에서는 교회가 시정부의 지배를 벗어나서, 기독교 교회의 역사상 최초로 교회의 자치권과 자율적인 치리를 재확립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황의 지시를 받는 상하조직체이며, 성공회는 영국 국왕이 머리로 지배하고 있으며, 독일 루터파 교회는 지역 군주가 소유주였다. 스위스 츠빙글리의 교회는 취리히 시 당국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칼빈은 이런 교회 체제를 거부하고, 교회의 자율적인 운영을 시 당국으로부터 얻어내는 데 분투 노력을 기울여서 마침내 교회의 영적인 권위를 확고히 세웠다.





제네바 교회의 개혁자, 칼빈.

▲제네바 교회의 개혁자, 칼빈.

칼빈의 교회론은 루터와 취리히의 츠빙글리와 불링거와는 달랐다. 칼빈은 독립적인 권위를 가진 교회가 성도들을 믿음 안에서 지켜나가고, 경건한 삶을 훈련하는 과정에서는 권징을 실시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마태복음 18장 15-17절에 따라서, 권징을 시행했는데, 첫째 회중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둘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순결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셋째로 심령이 굳어진 자들의 회개를 위해서 권징을 시행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회의 독립적인 자치권을 최초로 확보한 공로자로 칼빈의 성취를 높이 평가하지만, 해 아래 모든 것은 진공 상태에서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칼빈보다 앞서서 교회의 자치권과 독립적인 치리권을 성취하고자 노력했던 두 종교개혁자가 있었다. 칼빈은 스위스 바젤의 종교개혁자 외콜람파니디우스(1482-1531)의 제안이 시 당국에 의해서 거절당했던 사건으로부터 큰 교훈을 받았다. 초기 종교개혁자였던 외콜람파디우스는 당시에 널리 존경을 받던 성직자였는데, 로마 가톨릭의 주교체제에서 오래 유지되어 오던 바를 바꾸지는 못했다.





바젤의 종교개혁자, 외콜람파디우스.

▲바젤의 종교개혁자, 외콜람파디우스.

칼빈은 여러 차례 바젤을 방문했었고, 주요 종교개혁였던 시몬 그리네우스를 존경했기에 이런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었다. 칼빈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 또 다른 종교개혁자는 스트라스부르크의 마틴 부써였다. 그는 원래 루터의 개혁에 동조하였지만, 칼빈과 같은 신학사상을 잉글랜드 케임브리지 대학에 확산시켰다. 부써의 교회 개혁방안 중에는 교회의 독립권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나, 스트라스부르크 시 당국자들을 허용하지 않았다.





스트라스부르크 마틴 부써.

▲스트라스부르크 마틴 부써.

칼빈의 교회론은 제네바를 넘어서서 유럽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유럽 북서부 네델란드, 벨지움 등을 필두로 해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폴란드, 헝가리 등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장로교회의 조직과 제도는 단지 한 지역 도시의 교회를 능가하는 노회, 당회 체제로의 교회 구조를 더 크게 조직의 확산하였다. 프랑스에서 개신교회의 지도자들도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참된 권징을 시행했다.

2) 낙스(1514-1572)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1559년부터 모든 로마 가톨릭의 예식을 철폐하는 종교개혁을 진전시켰고,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1560)를 발표하여 전국 교회를 개혁주의 예배로 전환시켰다. 참된 교회의 세 가지 표지들: 말씀의 선포, 순수한 성례의 거행, 권징의 정당한 시행을 강조하다. 1572년까지 에든버러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서 설교로 감동과 영향력을 발휘했다. 당회, 노회, 총회의 체제로 스코틀랜드에 장로교회를 정착시키고, 로마 가톨릭의 왕권 통치에 맞서서 저항정신으로 지켜냈다.





존 낙스,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건설자.

▲존 낙스,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건설자.


3) 네델란드의 개혁교회: 서북부 유럽, 벨지움과 주변 저지대 지방에서는 귀도 드 브레(Guido de Brès, 1522-1567)가 작성한 “벨직 신앙고백서”(the Belgic Confession)의 37개 조항을 개혁교회의 원리로 정립했다. 로마 가톨릭에 반항한 죄목으로 드 브레는 순교했지만, 1568년부터 스페인 필립 2세에 저항하는 열일곱 군주들이 1648년까지 “80년 전쟁”을 치른 후 종교개혁에 성공했다. 참된 신앙의 표지로 성경 말씀의 선포, 세례와 성찬의 시행, 교회의 권징을 강조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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