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추석 명절 보내셨나요? 박욱주 박사님께서 지난 두 차례에 이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화제작 <오펜하이머>를 분석해 주셨습니다. 이 영화에는 킬리언 머피(J.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비롯해 맷 데이먼(레슬리 그로브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루이스 스트로스), 에밀리 블란트(키티 오펜하이머), 플로렌스 퓨(진 태트록), 케네스 브래너(닐스 보어), 조쉬 하트넷, 케이시 애플렉 등이 출연해 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다룹니다. -편집자 주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이론물리학자 오펜하이머의 생애를 그려낸 영화 <오펜하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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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 바탕 둔 종말론적 세계관과 핵확산 금지의 국제질서
동양 세계관 바탕은 순환과 조화, 지구·인류 단기간 멸망 상상 않아
서양 세계관 대부분 종말 상정해, 전쟁범죄 히스테리적 거부감 품어
통제되지 않는 집단적 탐욕과 악의 전쟁 유발해 심판 초래한단 믿음
이 확고한 두려움, 종말 초래 인간 어리석음 저지하려 집단적 노력해
핵무기 등장 후 확산 막으려 보복 질서 등 노력, 가장 대표적인 사례
◈핵무기와 국제질서: 군사강국 사이의 전면전을 억지하는 핵무기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이론물리학자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가 완성되고 그 결과물이 확인되자 커다란 심리적 갈등을 겪게 된다.
프로젝트 초반만 해도 그의 마음 속에는 인류가 손댄 적 없던 막강한 힘을 통제하고 활용하려는 프로메테우스적 욕망이 가득했다. 하지만 자신과 동료들이 만들어낸 대량살상무기가 실제로 일본에서 20만 이상을 학살하게 되자,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인류에게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선사한 것은 아닌지 고뇌하게 된다.
핵실험이 처음 성공한 현장을 목격하고 오펜하이머가 한 말,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는 핵폭발의 위력 앞에서 그가 느낀 경외감과 당혹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작중에서 이 대사 속에 담긴 당혹감은 프로젝트 성공을 축하하는 동료들의 환호와 오펜하이머 개인의 성취감 때문에 묻혀버린다. 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고 수소폭탄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세상에 거대한 죽음의 위협을 가져온 데 대한 당혹감은 이내 무거운 죄책감으로 변한다.
전편에 기술한 대로 일본에 투하된 두 발의 원자폭탄은 그 자체로는 한국 기독교 해방의 결정타였고 종교의 자유를 향한 세계 역사의 진보를 확증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후의 역사를 보면 이 원폭 투하 사건은 열강들의 패권 욕망을 자극하는 기폭제로 자리매김했다. 이때 시작된 핵무기 경쟁으로 현재 9개국에 약 13,000여 기의 핵무기가 비축돼 있다. 이는 전 인류를 멸망시키기에 부족하지 않은 양으로 추산된다.
핵을 주무기로 쓰는 광기 넘치는 핵전쟁이 실제 일어난다고 가정한다면,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료들은 분명 인류 역사에 커다란 죄를 지은 것이 분명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의 러닝타임 상당 부분을 그의 매카시즘 마녀사냥에 할애했다. 이것은 어쩌면 놀란 감독이 휴머니즘 관점에서 오펜하이머가 세계에 거대한 죽음의 위협을 가져온 데 대한 나름의 형벌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했을 수 있다.
그런데 핵무기에 관한 정치적·역사적 정황은 생각처럼 그리 단순하지 않다. 대량살상무기가 인류의 상황을 절대적으로 암울하게 만들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실제 대규모 핵전쟁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는 미국과 소련 간 핵전쟁 발발이 위험 수준에 이른 적도 있다. 하지만 아직 실제로 핵전쟁이 일어난 일은 없고, 오히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핵무기의 존재는 군사대국 사이의 전면전을 억지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냉전 시대는 물론이고 신냉전 시대인 현재에도 국지적 대리전은 빈발하고 있지만, 전 세계 초강대국들이 직접 대규모 살상을 자행하는 세계대전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이는 강대국들이 평화를 사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상호 확증파괴의 두려움 때문이다.
현재의 국제질서는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하는 정권에 반드시 그에 준하는 보복을 가하도록 정해두고 있다. 이런 강력한 보복 방침이 없다면, 오펜하이머가 두려워한 것처럼 실제 핵무기 사용이 일상화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상호확증 파괴의 두려움을 바탕으로 핵전쟁 방지에 성공했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오른쪽)이 소련 공산당 흐루쇼프 서기장과 회담하던 모습.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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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와 요한계시록: 핵무기 통제로 인류의 멸절을 막는 종말론적 세계관
핵무기를 사용한 정권은 반드시 심판을 받으며, 해당 국가 역시 파탄에 이르게 된다. 핵보유국 기득권자들은 핵무기 사용이 그들이 가진 정치권력과 경제력, 그리고 그들의 목숨 전부를 앗아갈 것임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 핵무기는 기본적으로 전쟁 억지를 위해 비축돼 있을 뿐, 실제 사용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오펜하이머가 느꼈던 우려와 죄책감이 전혀 납득하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핵무기 개발이 무조건 인류에 해악만 끼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게다가 국제정치와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본다면, 핵무기 개발의 책임을 오펜하이머라는 개인 혹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들에게만 돌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20세기 초 이론물리학의 화려한 발흥, 파시즘-공산주의 물결, 그리고 제1·2차 세계대전이라는 기술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핵무기 개발은 이미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굳이 오펜하이머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다른 이가 반드시 핵무기 개발을 이뤄냈을 것이다.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은 무수한 인간 군상의 죄성을 따라 탐욕과 증오, 악의가 가득한 채로 흘러왔다. 상대를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압박하고 죽이는 데 주안점을 둔 무기체계 발전은 인류 과학기술 발전에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처럼 악의와 탐욕, 무절제가 지배하는 인류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도 세계가 그나마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서구의 종말론적 세계관 덕분이다.
동양의 세계관과 윤리란 대개 겉으로 조화와 인간애를 강조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권위적 지배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궁극적인 목표를 두고 있다. 이는 오늘날 중국과 북한 등 서구 기독교 윤리와 박애의 정신을 거부하는 국가들이 보이는 외교 행태를 통해 명백하게 입증된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패권국들 또한 지배욕과 물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서구 패권국들이 추구하는 국제질서는 최소한 전 인류가 공존 가능한 세계를 유지해 나가려는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이는 서구 세계관이 지난 1,900여 년 동안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종말의 날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바탕으로 확립되어 왔기 때문이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종말의 전조, 네 명의 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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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세계관은 전반적으로 순환과 조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자연 만물이 항상 순리를 따라 운행된다는 동양적 세계관 속에서는 지구와 인류가 단기간에 멸망에 이르는 때를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성경 계시를 근간으로 삼는 전통적인 서구 세계관 속에서 지구와 인류는 항상 종말을 마주하고 서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종말에 대한 이 확고한 믿음은 특히 대규모 전쟁범죄에 대해 히스테리에 가까운 거부감을 갖게 만든다.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는(계 6:4)” 붉은 말을 탄 두 번째 기수에 대한 예언은 서구에서 대규모 전쟁을 예견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언급되곤 했다.
이는 통제되지 않는 집단적인 탐욕과 악의가 반드시 전쟁을 유발하여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게 된다는 믿음이 서구 역사관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예고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대한 이 확고한 두려움은 종말을 초래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어떻게든 저지해 보려는 집단적 노력으로 구체화되곤 했다.
특히 핵무기가 등장하고 미국 외에 여러 군사강국들도 함께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서, 핵무기 사용과 확산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강력한 보복의 질서가 형성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유대인 출신이지만 무신론자였던 오펜하이머도 기독교의 종말적 세계관 및 역사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살아온 미국의 문화적 기반 전체가 기독교적이었기 때문이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가 ‘세상의 파괴자’를 자처한 것은 인간의 삶이 수많은 환생의 한 과정으로서 죽음을 통해 자연스럽게 순환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오펜하이머가 되뇌인 바가바드 기타의 문구에는 원래 전쟁과 대량학살에 대한 회한은 전혀 없고, 오로지 세상의 정상적 순환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한다는 책임감만 묻어난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여기에 기독교적 종말의 감흥을 밀어넣으며 핵무기를 통해 대량학살의 길을 열어놓은 자신의 죄악의 무게감을 절감한다. 이 죄책감과 두려움에 기반을 둔 최소한의 양심이 오늘날 핵무기 확산과 사용을 저지하는 국제질서 확립의 근본 동기로 작동하고 있다.
성경 계시에 기반을 둔 세계관과 역사관이 그나마 인류를 멸절시킬 전면적 핵전쟁으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최후의 사상적이고 제도적인 보루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오펜하이머가 느낀 핵무기 개발의 죄책감은 서구적 세계관과 역사관을 지배하는 종말론적 감흥에 바탕을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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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욱주 박사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