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 총회 투표 모습. (본 사진은 해당 칼럼과 관계가 없습니다.) ⓒ크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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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태복음 18:15-17)”.
인간이란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 속 많은 이해관계 집단이나 조직과 상호관계를 통하여 활동합니다. 즉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처음에는 가족이라는 하나의 작은 구성원으로 시작해 점차 활동범위를 넓혀가면서 생활하지만, 이러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주요 목적은 무엇보다 조직 구성원 상호간의 협력관계를 촉진하고 경영 질서의 유지 발전을 통해 조직의 목표 달성과 개인의 욕구충족을 이룩하는 것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본문은 교회 구성원으로 속한 어떤 형제가 범죄했을 경우, 문제 해결을 위해 따라야 할 권징의 원리(개인적 충고, 두세 증인을 통한 권면, 교회의 공식 권징)를 밝혀줍니다. 동시에 교회가 결정에 앞서 먼저 기도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요즘 교회에서는 성경 말씀을 따른 권징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몇몇 힘있는 장로, 권력을 쥔 목사나 장로들의 판단으로 권징이 이뤄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직도 지옥에 대한 깨우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목사와 장로는 당회에서 성도들을 위해 내면에서 솟아나는 깊은 기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기도는커녕 일부는 오히려 성도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렇게 변질돼선 안 됩니다. 분명 성경 말씀에 기록된 대로, 형제를 위해 교회가 앞서 기도하며 논의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요한복음 18:14)”.
마태복음 본문의 ‘범죄한 형제’가 여기 요한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소자’로 언급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자 하나를 귀중히 여기듯, 범죄한 형제 중 한 사람이라도 잃지 않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첫 단계는 은밀하게 권고하고, 다음에는 두세 사람이 같이 가서 죄를 지적하여 그로 하여금 죄를 뉘우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권면을 듣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에 회부합니다. 여기서 이방인과 세리는 교회 공동체 밖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 간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잘못했다면 단둘이 만나서 그를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 이야기하며, 그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고, 그래도 안 들으면 다른 이방인들이나 세리처럼 취급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형제를 쉽게 내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다시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권징과 징계에는 형제에 대한 깊은 사랑의 마음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 자체만 보면 오해의 소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마치 나는 아무 잘못도 없고, 상대방만 잘못한 것처럼 몰아가는 듯 합니다.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이니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이르고, 다시 몇 사람과 힘을 모아 그의 잘못을 충고하고, 그래도 안 되면 교회의 이름으로 마침내 그를 내치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구하고 살리는 수순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판단하고 내치는 수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마태복음 18장 9절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곧 바로 쉽게 풀립니다. 18장 1절에서 예수님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라”고 말씀하십니다.
8절부터는 “네 손이나 발이, 눈이 너를 죄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현 시대 교회는 지옥에 대해 너무 무관심해 지옥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물론 교리적으로는 지옥을 인정하지만, 그들의 가슴에, 믿음 속에 지옥은 없습니다. 지옥이 빠진 기독교, 지옥이 빠진 복음전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이야말로 그들을 지옥에서 건져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0절부터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과, 길 잃은 양을 되찾듯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고 형제를 업신여기지 않으며, 온 마음을 다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신 후, 오늘 본문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라”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라”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구구절절 형제를 사랑하고 그를 용서하고 더 사랑하라는 말씀 아닐까요?
사람을 내치는 수순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고 살리는 수순인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결코 일방적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누구도 다른 형제의 잘못을 쉽게 판단하고 규정짓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낮춰, 겸손한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무거운 말씀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선제적 포용이 필요한 성도들이 돼야 하겠습니다.
특히 인간관계란 상호간 깊은 신뢰가 요구됩니다.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약속은 철저히 이행해야 하며, 정직은 필수 조건입니다. 상황에 따라 말을 피하는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퇴출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정의롭고 공정한 판단으로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다면, 세상에서 성공한 인간관계 아닐까요?
우리 크리스천 인간관계의 모범 답안은 오롯이 예수님의 완전하신 사랑에 있음을 깨닫고,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행하셨던 일들을 하나하나 짚어봅니다. 제자들과의 관계, 바리새인과 세리, 서기관들과의 관계, 그리고 고통당하는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으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의 법칙을 되새깁니다.
주님을 무너뜨리기 위해 갖은 수고를 아끼지 않는 권세들 위에서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 하늘의 법과 원칙을 고수하시며 완전한 사랑으로 승리하신 주님의 인간관계를 고요히 묵상하며, 우리 믿음의 식구들도 주님의 신비스런 관계를 존경하면서 따라야 하겠습니다.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존경해야 합니다, 아무리 내 의견이 옳더라도, 상대방 의견 역시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양보심 없는 인간관계는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불문하고 속이는 아첨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상대방의 어려움과 난처함을 재빠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해결해 주려 나서며, 불행이 행복해지도록 성심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 인간관계의 지름길입니다.
당회나 노회, 총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임원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거나, 목회는 뒷전으로 한 채 오롯이 감투에만 열을 올리는 지도자라면, 성직을 버리고 세상 명예와 자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특히 각 교단과 모든 기독교 기관들은 법이 정해놓은 퇴임 후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법을 지키고 고수해야 할 지도자들의 민낯은, 그들에게도 인간관계라는 것이 작용하고 있는지 궁금하게 합니다. 지옥은 전혀 생각해 본 일이 없는지 심히 염려가 됩니다.
나보다 형편이 어려운 분이 계시다면, 그 분을 추천해 그 어려운 형편이 다소나마 해결되도록 돕는 관계가 참으로 유익할진대, 어쩌다 예수님 사랑은 구호로만 그치는 분들이 노회, 총회에서 봉사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나 노회, 총회는 성경 말씀과 모든 법규들을 제대로 이행하고, 어떤 개인적인 친분이나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서는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모든 총회와 기관들은 성도들의 믿음을 위해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병들고 고통당하고 억눌린 이들, 평화와 행복을 꿈꾸는 이들을 직접 찾아다니시며 해결해주신 모습을 생각합니다. 장차 오실 그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간관계를 더 깊이 이해하고 철저히 준행한다면, 지금 막혀 있는 복음 사역, 전도의 횃불이 또 다시 타오르지 않을까요?
인간관계의 기본은 정직과 존중입니다. 그 사람이 있을 때는 존경하고, 없을 때 칭찬해 주는 그 사람이 진정 인간관계에서 성공하는 사람 아닐까요?
▲이효준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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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