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일의 설교] 전심의 사람(삼상 14:1~7) < 이 주일의 설교 < 설교 < 기사본문



전심의 사람은 믿음으로 행동하고 나아갑니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


예동열 목사(우정교회)
예동열 목사(우정교회)


임권택 감독이 유명한 배우의 신인 시절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 무서운 사람이야. 다른 사람한테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무서운 사람이야. 너 스스로에게 무서워야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는 거야. 알았지? 사랑한다.” 그 배우는 이 대화가 자신의 평생을 바꾸어 놓은 마음의 기둥이 됐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이 일화를 통해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먼저는 제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성도들에게 평생 기둥이 돼, 잘 박힌 못처럼 가슴 깊이 자리잡는 말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고, 둘째로 나 자신에게 무서운 사람이 바로 ‘전심의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전심의 사람’은 히스기야, 다윗, 사무엘처럼 온전하고 완전한 마음과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한 마음, 하나님과 화목된(화평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불순물도 개입하지 않고 주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이 전심의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유언을 합니다. 백성의 요구에 사울이라는 왕이 너희 앞에 있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백성이 그토록 원해서 세운 사울왕은 블레셋이 쳐들어오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러만 있습니다.(삼상 14:2) 왕만 그렇습니까? 사울 옆에 에봇을 입고 있는, 명문가 엘리의 증손인 아히야라는 제사장 역시 나무그늘 아래에 머물러 있습니다.(삼상 14:3) 백성의 지도자인 이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병거와 마병은 최신의 첨단 무기였습니다. 블레셋에는 병거가 3만, 마병이 6000, 백성은 해변의 모래처럼 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사울 곁에는 겨우 600명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블레셋은 철기로 된 무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에서 제대로 된 칼과 창을 가진 사람은 사울과 요나단뿐이었습니다. 정리하면, 사울은 눈에 보이는 병거와 마병, 사람 수 때문에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나무그늘 아래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 요나단은 어떻습니까? 요나단은 ‘믿음의 사람’, ‘전심의 사람’이었습니다. 전심의 사람은 믿음으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롬 1:17)고 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지만’(창 1:2)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운행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로 변화됐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와 허물로 죽었었고,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였지만 하나님의 영이 믿음이라는 통로로 들어오시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영혼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주인을 바꾸는 것’이고, 구원은 ‘변화’인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믿음이 들어오게 되면 그 믿음이 가만히, 잠자코 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자라서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으로 변화합니다.


요나단은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는 전심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단 둘뿐이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이다, 건너가자’는 행동을 낳게 했습니다. 믿음은 사람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고, 전심의 사람은 그 믿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둘째, 전심의 사람은 믿음의 말에 ‘아멘’으로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14장에 ‘무기든 자’ 또는 ‘무기든 소년’이라는 단어가 무려 아홉 번이나 등장합니다. 본문 4절에 보세스, 세네라는 바위의 이름도 나오는데 요나단의 무기든 자는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홉 번이나 그 사람에 대해 언급하며 주목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그 소년의 고백 때문입니다. “무기를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리이다”(삼상 14:7) 무기든 사람은 요나단의 종이고 수하이기에 왕자의 명령을 거절하기는 힘들겠지만 억지로 할 필요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요나단의 믿음의 말에 즉시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믿음으로 선포하면 성령님이 함께하십니다. 그 성령의 감동을 소멸치 않고 나도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내가 아닌 누구라도 믿음의 말을 한다면, 기쁨으로 그 말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돼, 무기든 소년처럼 교회를 섬기는 저와 모든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전심의 사람은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사인을 구하고, 구한대로 사인이 왔다고 하더라도 용기 내어 순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심의 사람은 다 알고, 다 보고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앞으로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지 ‘보여 준 땅으로 가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보지 못한 것을 마치 보는 것처럼 가는 것입니다.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며 큰 빗소리를 듣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소년들이 움직이는 믿음으로 마음을 하나로 묶어서 하나님의 사인을 전심으로 취하며 나아갈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요나단과 그 무기 든 자가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처음으로 쳐죽인 자가 이십 명 가량이라”(삼상 14:14) 큰 바위가 두 개나 있는 천연요새 지역이기에 그곳을 지키는 사람이 얼마 없었을 것입니다. 그 좁은 지역에서 20명을 쳐 죽였습니다. 겨우 20명이라고 생각하실 줄 모르겠지만 다음 절이 더 중요합니다.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삼상 14:15) 큰 떨림, 하나님이 떨리게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구약 곳곳에 전쟁이 있을 때마다 등장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요나단과 무기든 자, 이들은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했지만 사울왕의 자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다음세대가 일어나서 믿음에 반응해 움직이기 시작하고, 손바닥만한 응답을 하나님의 사인인 줄 알고 도전하는 믿음, 올라가는 믿음, 이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이 친히 우리 가운데서 일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본문 4절에 특이하게 바위 이름이 두 개 나옵니다. 보세스(빛나는)와 세네(가시덤불). 오늘 요나단과 무기든 자처럼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나가면 보세스 같은 빛나는 인생이 되고, 사울과 제사장 아히야처럼 현실과 환경만 바라보고 머물러 있으면 가시덤불 같은 인생으로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 선택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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