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지난번 말씀하신 그 모임, 이제 시작하면 어떨까요?”
교회 생활이 늘 일정하던 그 집사, 많지도 적지도 않게 항상 똑같이 활동하던 집사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다. 자신은 제외해 달라는 요청이 많은 시대에 이렇게 자청하는 말을 듣는 것은 참 반가운 일이다.
작은 식당 한 칸이든 직원이 많은 회사든, 사업하는 성도들의 모임을 시작하려 한 것은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하는 사역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영업을 포함해 개인 사업을 하는 성도가 늘 애처로웠다. 사업을 잘해놓고도 대금을 못 받아 고비를 맞는 것을 보면 속상하기 그지없었다. 불법의 유혹을 피하는 담대함과 위험한 사람들을 구별하는 것도 필요했다. 서로에게 지혜가 되어 줄 수 있기를 기대했다. ‘실업인들은 아무래도 벌이가 좀 나으니 어떤 후원을 기대해보자’라는 것은 아니었다.
성경은 ‘늘 때가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알려준다. 우리가 자녀들을 토닥이며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자녀들에게 포기하지도 성급하지도 말고 열심히 심고 준비하라고 말씀하신 다. 그렇게 때가 되었는지 수년간 기대했던 실업인들의 모임이 지난주에 시작되었다. 전체 모임을 준비하면서 ‘발기인 다섯 명이 세 번은 만나자’고 했다. 오직 기도만 하고 서로 비전을 나누자 했는데 이분들의 열심이 상상 밖이다. 두 번째 모임에는 열댓 명이 모였다. 이것은 계획과도 다르고 내 마음의 때와도 달랐다. 모두 자기소개를 하면서 “내가 와도 되나?”라는 마음이었다고 말했지만, 표정은 정말 오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마음을 터놓을 지체가 필요한 것 외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졌는데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몰라서 아쉬웠다고 고백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득 모으는 방식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했다. 성도가 주님을 사랑하여 무엇이든 더 헌신해주기를 바랐는데, 정말 주님을 더 사랑하는 때가 되었고 그 사랑하는 방식은 목사의 생각과 달랐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가 주님을 사랑하니 주님은 그에게 적절한 사랑의 방식을 지도하셨을 것이다.
기독신문이 새로운 모습으로 한국교회를 찾아온단다. 새롭게 쓰임 받으려는 것은 기독신문이 주님을 사랑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 글을 쓰는 것 역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방식이기를 바란다. 각자가 받은 은혜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방식이 다른 덕분에 하나님의 교회는 내 제한된 생각보다 위대하고 아름답게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