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교회사와 민족사를 정론으로 담아내다
▒ 초기 발전(1965~1972)
최초 사설(社說)과 주요 보도활동
본보는 처음에 2면으로 시작하다가, 1965년 10월 11일 제33호부터 4면으로 증면했다. 그 이유는 <기독신문>이 총회신학교 캠퍼스 조성을 위한 모금 내역을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다음 호에는 다시 2면 혹은 4면으로 하다가, 1966년 4월 4일 제55호부터 본격적으로 4면으로 발행하게 됐다. 운영자로서는 초대 이사장 김윤찬 목사, 사장 김정국 장로가 시무하다가, 1966년 10월 제2대 사장으로서 곽현보 장로, 박윤성 주필, 11월 3대 사장 고성훈 장로, 1967년 제2대 이사장 양재열 장로, 채기운 주필, 1968년 제4대 사장 노진현 목사, 1971년 5대 사장 김종근 목사가 봉사했다.
창간호(제1호)에 처음 설교로서 박윤선 박사의 설교가 게재됐다면, 1965년 1월 18일 제2호에 ‘새해의 새 신문은 새마음으로!’라는 제목으로 최초의 사설(社說)이 게재됐다. 또한 ‘교회통일에 대한 칼빈의 견해’라는 제목으로 논설(論說)도 시작했다.
1965년에 신문지상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교단적 행사인 ‘목사장로기도회’(4호), ‘총회 50회, 총회는 서울에서’(21호) 등의 기사와 ‘우리의 전도 구’(2호)를 비롯해 전도 및 복음전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보도들이 계속됐다. 이후 칼빈 신학을 조명할 뿐만 아니라, 미국 연합장로교회가 채택한 ‘1967년 신앙고백’에 대한 비판과 우리의 신학적 입장을 연속 게재하기도 했다. 또한 기독교 유치원 등 차세대 및 군복음화를 고양하는 보도를 이어나갔다. 대 사회문제로서 ‘이중과세’, ‘월남파병’, ‘단군상 건립’ 등을 다루고, 홍수로 인한 피해 상황을 알리며 구호운동에도 앞장섰다.
총신대학교 사당캠퍼스 조성과 교사 신축, 끝까지 함께하다
사당캠퍼스가 조성되기까지 직장암으로 투병 중이던 명신홍 박사, 모친을 위해 집을 마련할 돈을 희사한 백남조 장로와 실업인신앙동지회, 그리고 미군 공병부대의 헌신이 컸다. 1965년 3월 22일에 기공예배를 드렸고, 총신대학교는 이들의 헌신과 전국 성도들의 기도와 헌금으로 조성됐다. 또한 <기독신문>의 공헌을 빼놓을 수 없다. 캠퍼스 조성에서 신축공사가 완성되기까지 <기독신문>의 꾸준하고 열의 있는 보도, 전국교회의 후원을 적극적으로 선도해 나갔던 눈부신 협력이 있었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였고, 공사과정이 쉽지 않았다. 전국교회의 관심과 기도, 절대적인 지지와 헌금이 절실한 때였다. 본보는 공사의 진행상황을 전국교회에 발 빠르게 알리고, 많은 관심과 후원을 독려했고, 모금 운동을 직접 전개했다. 1965년 1월 25일부터는 ‘총회신학교 특별연보 상황표’를 신문 하단에 게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 대역사(大役事)와 함께했던 <기독신문>는 1967년 4월 29일 제106호에서 ‘수(遂), 총회신학교 재단 및 설립인가’라는 큰 글자 제목으로 감격스런 교단 신학교의 인가를 자랑스럽게 알렸다.
제호 <기독신보>로 변경 그리고 정간
교단지로서 <기독신문>이란 이름으로 시작했지만, 1967년 1월 28일(제94호)부로 <기독신보>라는 제호로 바뀌었다. ‘기독신보사’가 발행을 맡았다. 이에 대해서는 1967년 1월 14일 제93호에서 관련된 사고(社告)를 올린 바 있다.
<기독신보>는 총회와 전국교회의 입과 귀의 역할을 했으며, 총회 산하의 모든 기관을 하나로 연합하여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향하도록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해왔다. 무엇보다 문서선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문 발행에 총회와 전국교회의 끊임없는 관심과 지원이 필요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본보는 1972년 3월 25일 제326호 발행을 하고는 중단하는 일이 있었다. ‘시설미비’라는 공식적인 이유를 밝혔지만, 초창기 본보 주필과 사장을 지낸바 있는 채기은 목사는 지령 1000호 특집호에서 “당시 발행인이 운영진과의 의사 대립으로…정간(停刊)이 됐다”고 말한 바 있다. 복간에 노력한 김종근 사장은 그 원인을 ‘운영난’이라고 했다.
▒ 복간, 부흥의 시대와 <기독신보>(1972 ~1990)
그 시대와 <기독신보>
1970~80년대는 경제정책을 통한 산업화 및 도시화 현상이 급속하게 이뤄졌던 시대였다. 중화학공업의 수출 증대, 정부의 과학기술 연구지원과 원자력 발전 정책이 시행됐다. 컴퓨터와 금융권 전산화가 시작됐다. 88서울올림픽이 개최되므로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이 급부상해 경제발전과 선교활동에도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그 시대 청년들과 젊은 부부들이 기회와 꿈을 찾아 도시에 몰려들었고, 교회 성도들은 쇄도하는 영혼들에게 여러 방법을 동원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교회로 인도했다. 한국교회사에서 이때만큼 교회 부흥과 성장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기독신보>는 발로 뛰며 공정하고 유익한 보도로 그 사명을 감당해야 했다.
복간과 이후 발전
1972년 3월 25일 제326호로 <기독신보>는 정간된 지 약 7개월 만에 다시 복간됐다. 1972년 10월 7일 복간 1호를 타블로이드 배판 4면으로 발행했다. 김종근 사장은 ‘복간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으로 복간사(復刊辭)를 게재했다. 그는 전국교회의 협조가 필요하고 <기독신보>가 교회의 대변자로서 사명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본보가 종래의 행정적인 문제 취급만을 주안으로 하던 편집 태도를 지양하고 거시적인 취재, 편집, 발행의 주안을 삼을” 것이라는 것도 강조했다.
이때는 배판 4면으로 발행하다가, 1972년 10월 21일 제328호부터 타블로이드 8면으로 구성했다. 그리고 1973년 2월 10일 예전처럼 4면으로, 1986년 2월 1일 제633호(통권 952호)부터 8면으로 발행했다. 아울러 1988년 4월부터 격주간으로 12면으로 시험 발행하다가, 1989년 1월 7일 제772호(통권 1091호)부터 12면으로 계속 발행했다.
1974년 8월 13일부터 18일까지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엑스플로 74’대회에 <기독신보>는 ‘성령의 3폭발’, ‘민족복음화의 역사적 계기, 30만명의 전도요원 맹훈련’ 등 그 진행 상황을 계속 보도했다. 김종근 본보 사장도 시론을 통해 “성령의 불붙는 집회 되도록 기도해 민족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자”고 했다.
또한 1974년 11월 25일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일만교회운동’을 시작했다. <기독신보>는 그 계획과 진행과정, 경과 및 결실 등 그 상황을 비교적 발 빠르게 보도해 전국교회에 그 운동을 독려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교단활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총회회관 건립의 시작과 완공, 그리고 입당예배까지 적극적인 보도를 통해서 전국교회의 이목을 집중시켜 후원하도록 힘썼다.
통권지령 1000호 발행, 함께한 ‘88세계복음화대성회’
<기독신보>는 1987년 2월 7일, 창간한 지 32년 만에 통권지령 1000호 특집호를 발행했다. 하나님의 은혜와 전국교회의 성원에 힘입어, <기독신문>(기독신보)은 직면해야 하는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달려올 수 있었다. 당시는 편집인 및 사장 김인득 장로, 주필 한명수 목사, 허충배 편집국장 대리가 맡고 있었다. 김인득 사장은 “지령 1천호를 맞이하여” “책임을 재다짐하는 계기로”하겠다고 했다. 12면 특집호를 꾸민 <기독신보>는 이때부터 서울올림픽을 위한 기도회 소식을 알렸다.
<기독신보>는 1988년 2월 27일 제732호(통권 1052호)부터 ‘교단개선을 위한 지상 공청회’를 마련했다. 그 첫 번째는 ‘기독신보사의 개선방안’, 두 번째는 ‘총신대학 개선방안’, 세 번째는 ‘교단정치의 개선문제’라는 제목으로 열띤 토론의 장을 마련했다.
1988년 9월 17일부터 있었던 88서울올림픽 개최를 맞이해 한국교회는 ‘88올림픽’과 ‘88대성회’를 잠실 실내체육관 등지에서 모여 기도로 준비하며, 민족 및 세계복음화의 계기가 되길 소망했다. 본보는 이 역사적인 현장에서 적극적인 보도로 협력했다. 또한 1988년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충현교회당에서 88세계복음화국제선교대회가 열렸다. <기독신보>는 ‘선교의 비젼 보여준 세계인의 집회’, ‘영의 올림픽 대성회’(Soulympic Rally) 등의 제목으로 교계의 이목을 집중하게 했다.
임원진의 변화, 아픔도 있었다
점차 <기독신보>의 “발행인을 총회장으로 정하고, 사무실을 총회회관으로 옮기면서 본지는 본격적으로 총회 기관지로서의 위상”을 드러내게 됐다. 그러나 총회의 임원해임 등으로 아픔을 겪기도 했다. 제70회 총회록에 의하면, “기독신보 이사회를 해체하고 기독신보 사장단을 해임하고 새로 구성 임명한다”라고 했다. 정화총회라는 별칭이 붙은 제70회 총회에서는 총신대학교 등록 이사회와 재단이사 및 운영이사회 등도 해체했다.
1988년 제73회 총회에서 <기독신보>의 이사장 등 모든 임원을 해임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유지재단이사회는 <기독신보>의 총회회관 사용에 있어서 3년간의 임대료와 관리비를 소급해 받기로 하는 등의 결의를 했다. 이에 대해 본보의 임원은 이의를 제기한 바 있다. 이와는 별개로 1990년 9월 제75회 총회에서 기독신보사를 총회유지재단에 편입하기로 결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