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진주 구세군교회 방문기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창세기 28:15-19)”.
5월 마지막 주일이었습니다. 1년 중 가장 온화하며 봄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는, 사랑이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주일이었습니다. 필자는 작년에도 고향 교회를 잊지 못해 방문했고, 올해 역시 너무나 그리운 나머지 참을 수 없어, 전반기가 가기 전에 또 다시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주일 아침 일찍 출발해 고속버스를 타고 목적지인 진주 구세군교회로 향했습니다.
가는 봄이 아쉬운 듯 많은 차량들이 쏟아져 나와 고속도로에서 많은 시간을 지체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버스는 거침없이 질주했습니다. 지난번 다녀갈 때는 고속도로에서 차가 밀려 애를 태워 이번만큼은 넉넉한 도착을 위해 일찍 출발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예상을 깨고 너무 일찍 도착해, 이참에 걸어서 가보자 마음먹고 성경책이 든 가방을 들고 평거동에 위치한 진주 구세군교회를 찾아갔습니다.
날씨는 비교적 온화했고, 근처 눈에 들어오는 남강의 은물결은 햇살에 반짝이며 너울춤을 추며, 남강 다리는 질주하는 차량 사이로 간혹 걸어가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촉석루도 말없이 우뚝 서 있습니다. 임진왜란의 아픔을 대변하듯 무거운 모습으로 그때의 아픔을 아느냐고 물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경남 진주는 옛부터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사와 문화가 가득하며, 특히 진주성은 조선 시대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습니다. 7전 8기로 유명한 진주대첩을 비롯, 자연경관과 다양한 문화유산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매년 유등축제도 열립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예술제인 진주 개천예술제도 10월이면 열립니다. 진주는 교육 도시, 역사 도시, 문화 도시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됐으며, 시민들의 강한 의협심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주인공 야곱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삼촌인 라반이 있는 곳을 향해, 2천 리 이상의 길을 동반자도 없이 매우 혹독하고 험난한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는 직선으로 약 800km로, 지금처럼 자동차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곳까지 걸어 간다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길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고향을 떠나는 심정은, 필자가 고향 교회를 떠나야 했던 지난날의 여정과 닮은 꼴 같습니다. 타지에서 외로운 발걸음을 옮기는 야곱의 심정을 읽으며, 고향 교회를 떠나 방황했던 지난 삶을 다시 추억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지금까지 아브라함이나 이삭으로부터 전해 듣고 믿었던 그 복에 대해 다시금 약속하시고, 이를 위해 끝까지 동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첫 기록이며, 이후 그는 하나님의 현현을 여섯 번 더 경험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16절)”란 말로, 야곱은 하나님께서 어느 곳에든 계신다고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이 같이 기초적인 사실을 야곱이 몰랐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단지 영적으로 아브라함과 같은 상태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에 얽매여 항상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17절)”란 하늘의 놀라운 사실들을 직접 체험하자, 자신의 너무나 교만하고 추한 행실에 두려워 떨게 됐다는 의미입니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의지하면 두려울 것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가까이하지 않는 밤처럼 외로운 때는 없을 것이며 하나님의 임재의 사닥다리가 보이지 않는 상황처럼 깊은 절망을 안겨주는 밤도 없을 것입니다.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18절)”에서 ’기둥‘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곳을 기념하는 곳이었습니다. 야곱의 행위는 중요한 사건을 기념한다는 면에서 셈족의 관습과 일치하나, 정령 사상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둥 세우기’는 후일 금지됐는데, 가나안 족속의 신상처럼 잘못된 사상에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기름을 붓는 행위는 그곳을 거룩하게 하고, 희생을 드린다는 의미였습니다.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19절)”. ‘벧엘’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수많은 장소들 중 오직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것은 현 시대에서는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전 10시 30분, 진주 구세군교회에 도착했습니다. 교회 앞에서 담임 박은빈 사관님께서 저를 보시곤, 무척 반가운 얼굴로 맞이해 주셨습니다, 사모님께서는 문 앞 계단에서 화분을 정돈하시면서 주위를 쓸고 계셨습니다. 꼬마 아이가 교회에 나오는 것을 보시고 얼른 안아 열렬히 환영하시는 모습에 ‘정말 주님의 품안이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이 전해졌습니다.
오전 11시, 예배가 시작됩니다. 박은빈 사관 사회로 구세군 대한본영 한세종 서기장관께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설교에 앞서 ‘돕는 손’이라는 제목으로 세계 열방에 나아가 봉사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김옥영 사관께서 설명하셨고, 구세군 경남지방 강종관 사관도 예배에 참석하셨습니다.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역대상 11:4-9)’는 설교도 은혜가 넘쳤습니다.
사무엘하 5장 6절에는 다윗과 그 종자들만 예루살렘으로 간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는 사무엘상 11장 1-3절 내용과 더불어, 다윗 왕가의 합법성(하나님의 뜻이 온 백성의 호응으로 확인됨)을 강조하는 역대기 기자의 특징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명실상부한 왕으로서, 먼저 시온 산을 정복한 사실이 기록됐습니다. 시온 산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좌정하시는, 이스라엘과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보좌가 있는 곳을 상징합니다. 다윗은 그 통치의 대행자로서 부름받아 세워졌던 것입니다.
설교에 앞서 장학금 전달식이 있었습니다. 지난 2024년 7월 21일에 이어 두 번째로 장학금 2백만 원을 기부했습니다. 잠시 인사말을 하면서 앉아 있는 교우님들을 바라보니 문득 눈시울이 저절로 붉어져, 애써 참고 간단하게 인사를 마쳤습니다.
어린 시절 함께했던 부교님들도 계시고, 고교 시절 돌봤던 아이가 성장해 부교로 충성을 다하는 모습이 참으로 대견해 보였습니다. 교수로 일하는 분들도 많아 오랜 세월이 흘렀음을 증명했습니다. 기쁘기도 했지만,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하지 못했던 서러움이 밀려와 마음 속에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늘 따뜻하게 대해주셨던 많은 부교님들이 계시지 않아 더욱 슬펐고, 더 일찍 고향 교회를 찾아보지 못했던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진주 구세군 교회는 1939년 창립돼 지난 85년 동안 진주 지역을 위해 사명을 감당했고, 특히 1950년 9월 5일 북한 공산군에 의해 노영수 사관께서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교인 수는 대형교회들보다 훨씬 적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두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찬양하며, 성도들 간에 사랑이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교회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 구세군 교회를 만나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그 시절 인정 넘쳤던 모습을 그려봅니다. 제 어머니 장길선 부교께서는 어려운 성도들 중 끼니마저 거르는 집에 쌀이나 보리 한 말씩을 어깨에 메고 가서 대문 앞에 놓아두고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금요일이면 구역예배를 위해 집집마다 다니면서 “오늘은 누구 부교님 댁에서 예배를 드립니다”라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소리쳤던 모습도 아련히 떠오릅니다. 김형갑 정교와 함께 새벽기도를 나갈 때나 거리를 활보할 때, 함께 찬양했던 기억도 피어오릅니다.
배고팠던 시절이지만, 그래도 구역예배를 드리면 구역 식구들 왔다고 음식을 마련하기에, 저는 늘 금요일을 기다렸습니다. 간식을 먹을 수 있는 금요일은 생일 같았습니다. 허기진 배를 채웠던 그 시절이 그리움으로 돌아옵니다.
중·고교 시절 ‘혈화 학생회’는 진주시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진주시 교회 대항 배구대회, 레크레이션 강습회, 농촌 일손 돕기, 보리 베기, 조기 청소 등 봉사활동을 참 많이 했습니다. 매년 4월 발행되는 ‘절제호’ 신문을 제가 가장 많이 팔아서 인센티브를 받았던 일도 있었습니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연극과 찬양 준비로 바빴고,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선물 교환 후 새벽송을 돌았습니다. 받은 선물들을 산타클로스 주머니에 가득 싣고 교회로 돌아와 축하예배를 마친 후, 고아원을 방문해 아이들에게 나눠주던 장면도 스쳐 지나갑니다. 그때 함께했던 친구들이 그리워집니다.
중학교 시절엔 ‘구세군 사관이 되겠다’는 서원도 했지만, 끝내 지키지 못하고 속세와 더불어 살아왔던 지난 날들이 참으로 어리석었음을 고백합니다. 남은 인생을 하나님 영광을 위해,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겠다고 또한 진심으로 고백합니다.
그 시절엔 너무나 가난했기에, 크게 성공해서 어린 시절 가난을 복수라도 하겠다며 살아온 지난날들이 너무 후회스럽습니다. 좀 더 일찍 하나님 뜻을 깨닫고 믿음 생활을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듭니다. 허송세월로 많은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습니다.
진주 구세군교회는 제게 영원히 잊지 못할 신앙의 뿌리요 믿음을 키웠던 꿈나무입니다. 그래서 저는 날마다 진주 구세군교회를 그리워하며 제 신앙을 점검하며 성찰하곤 합니다.
고향 교회를 너무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은 처음 신앙생활을 했던 고향 교회를 한 번쯤 방문하셔서 신앙을 점검하고, 하나님 사랑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하겠습니다.
부디 고향 교회를 잊지 마시고, 처음 믿었던 신앙을 다시 고백하는 귀한 시간이 되어 날마다 간증하는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