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칼럼] 예수가 받은 십자가형, 가장 잔인하고 치욕스러운 형벌(VI)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역사적 예수 논구 시리즈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불교에서 성불(成佛), 즉 붓다가 된다는 것은 곧 집단을 위한 희생양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정일권, 『붓다와 희생양: 르네 지라르와 불교문화의 기원』, 서울:SFC 출판부, 2013. 203-204.). 붓다는 은폐된 희생양이다. 붓다가 되는 것은 공동체를 위하여 언제든지 자기 자신의 몸을 보시(普施)하여 마치 양초가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것처럼 소신(燒身)공양(供養)을 하며 희생양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곧 공동체의 우상들이다. 예수의 부활 새벽은 역사 이래 우상의 황혼과 각종 종교들의 신들의 황혼을 가져왔다. 지라르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는 전통 종교의 희생제의적 질서를 폭로하고 전복(顚覆)하는 묵시록적인 요소가 있다.

지라르가 해석하는 것처럼 “예수의 죽음은 희생제사가 아니라 모든 희생제의적 희생양 매커니즘 뒤에 존재하는 기만과 폭력을 폭로하는 수단”이요, 십자가의 승리는 폭력의 희생양 순환에 대항한 사랑의 승리다. 예수의 죽음은 희생양 메커니즘과 희생제사의 사회적 사이클을 파괴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가시적 희생양으로서 희생제사를 종식시켰다. “히브리서가 말하듯이, 그리스도는 희생제사를 종식시키기 위한 희생제물이며, 그는 단번에 죽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상적인 희생제의적 시스템으로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공중의 권세들이 계시되었고 죽음의 권세들이 파괴되었다.

고대 종교와 문화는 희생의 논리 위에 세워졌다. 고대사회는 질서 유지를 위하여 과도하게 희생적 축제에 의존했다. 희생에 대한 비판의식이 싹터야 정의와 권리에 대한 의식(意識)이 동트는 것이다. 유대 기독교가 정의의 종교라면 힌두교와 불교는 희생의 종교다. 힌두교와 불교는 신화적으로 희생을 극대로 강조했기에, 이 두 종교를 국가종교로 삼은 국가에서는 권리와 이권에 기초한 민주주의 의식이 크게 발전되지 못했다.

독일의 비판사회학자 하버마스가 지적하듯이 참된 계몽은 희생양으로서의 붓다들의 깨달음이 우상화되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기사도(騎士道)와 신사도(紳士道)를 존중하는 기독교 전통의 유럽 도덕의 계보(系譜)에는 유대교의 정의의 윤리와 기독교의 사랑의 윤리가 있다. 정의의 윤리는 희생제사에 대한 비판적 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정의와 사랑이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공동체는 은폐된 방식으로 희생양 메카니즘에 의해 안정화를 추구하는 세상 인간 공동체에 대한 진정한 대안공동체가 된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문화마르크시즘에 의하여 가정의 성스러움, 결혼의 성스러움, 성(性)의 신성함, 정의와 사랑과 평등의 개념이 왜곡되고 있다. 오늘날 문화마르크시즘이 만든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이란 사회적 이념으로 진정한 정의와 사랑과 평등 개념이 문화적 편가름으로 왜곡되고 있다. 정의란 옳고 그름이나 도덕성을 떠난 사회적 문화적 약자에 대한 무조건적 편듦이요 옹호이다. 인종과 남녀, 노소, 가진 자와 덜 가진자, 배운자와 덜 배운자 등의 관계에 있어서 흑인, 약자 우위로 무차별적으로 적용된다. 실례로, 미국에서는 백인이 흑인에 의하여 구타당하는 것은 허용되나 흑인이 백인에 의하여 구타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은 엄청난 사회적 부정의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는 인종차별 금지는 “정치적 올바름”(PC)이라고 사회적 이념으로 시행되는 것이다.

PC는 DEI(Diversity, Equality, Inclusiveness),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이란 본래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문화마르크주의자들에 의하여 왜곡됐다. 실례로, 2022년 펜실베이니아 학생 리아 토마스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후에 전미대학체욱육회(NCAA)에서 1위를 차지했다(조선일보 뉴욕 윤주헌 특파원 기사, 반이스라엘 시위, 성전환 운동선수… 트럼프, ‘PC주의’ 온상 지목“, 조선일보, 2025. 4.16. 2면). 대학측에서는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감싸지만 “여성선수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비판이 거세졌다. 사랑이란 옳고 그름을 떠나 도덕성을 떠나 맹목적인 덮어줌이나 받아줌으로 혼외 정사, 자유로운 남녀 교제, 동성 간의 관계로 사용되고 있으며, 평등이란 개념도 능력과 노력의 절차적 성과를 인정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등화라는 결과적 평등으로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마르크시즘이 주장하는 정의와 사랑의 윤리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가르쳐온 전통적인 인류사회의 기본적인 인간성의 도리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현대사회는 성해방에서 시작하여 전통적인 사회규범과 권위 부정으로 나아가면서 서구사회가 내면에서 붕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늘날도 예수가 가르치신 정의와 사랑의 윤리는 여전히 타당하다. 그가 가르치신 정의는 모든 인간이 계층과 이념을 떠나 하나님의 자녀요 전통적인 인간 사회의 관계(가정, 국가, 율법의 정신, 종교, 사회 제도 등)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가 가르치신 사랑은 모든 사람이 인종과 계층과 출신과 빈부, 성 차별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서로 받아들이고, 심지어는 원수까지 용서하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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