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력에서 로마에 압도당해 나라 빼앗긴 이집트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찾아서 154] 제3차 전도여행(41) 니고볼리(9)

그때 클레오파트라 함대가
도주하지 않고 중앙 쳤다면
세계 역사 많이 달라졌을 것
로마, 지중해 제해권 장악


▲악티움 해전 박물관에 전시된 악티움 해전 당시 로마 군함 모형.

▲악티움 해전 박물관에 전시된 악티움 해전 당시 로마 군함 모형.


기원전 1세기, 로마 해군은 제대로 조직돼 있었으나, 로마 제국 안에서 벌어진 내전 때문에 제국 전체의 이권을 지키는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카이사르의 심복 부하였던 안토니우스,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레피두스 3인이 제2차 삼두정치를 시작했다. 5년간의 삼두정치 도중 레피두스는 실각하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최종 권력을 잡기 위해 서로 싸웠다.

기원전 31년 9월 2일 그리스 서북부 해안에 있는 악티움(Actium) 앞바다에서 양측이 대규모 해전을 한 결과,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함으로써 로마의 내전을 종식시켰다. 그 후 로마 제국이 지중해 제해권(制海權)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로마인은 지중해를 마레노스트룸(Mare Nostrum, 우리들의 바다)이라고 불렀다.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이집트 여왕)의 연합함대를 격파했다. 양측은 각각 약 500척과 약 400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갖고 있었다.


▲악티움 해전 박물관 내 악티움 해전도. 왼편 2열은 옥타비아누스 함대, 오른편 2열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 함대.

▲악티움 해전 박물관 내 악티움 해전도. 왼편 2열은 옥타비아누스 함대, 오른편 2열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 함대.


옥타비아누스 함대 사령관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의 함대를 암브라키아만에서 폭 700m의 악티움 해협을 통해 바다로 끌어낸 후 바람의 방향을 이용하면서 측면 공격을 함으로써 대함대가 치열한 해전에 돌입했다.

서로 막상막하의 전투를 치루는 동안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 함대(60척)는 안토니우스 함대가 고전하는 상황을 보고 남쪽으로 이집트를 향해 도주했고, 이를 본 안토니우스도 전열을 빠져나와 이집트로 도주했다.

만약 그때 클레오파트라 함대가 도주하지 않고 옥타비아누스 함대의 중앙을 공격했다면,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이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 측은 2,500명을 잃었으나, 안토니우스측은 5,000명 넘는 병사를 잃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도주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다음 해인 기원전 30년에 각각 자살했다. 악티움 해전에서 결정적 승리를 함으로써 로마의 내전을 종식시킨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7년 로마 원로원이 결정한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로마 제국의 첫 황제가 되어, 로마의 공화정을 끝내고 45년간 제국을 통치했다.


▲악티움 해협 밑에 있는 해저터널 입구. 니고볼리 방향에서 촬영했다. 그리스 현지에서는 악티움을 AKTIO라고 표시한다.

▲악티움 해협 밑에 있는 해저터널 입구. 니고볼리 방향에서 촬영했다. 그리스 현지에서는 악티움을 AKTIO라고 표시한다.


악티움 해전은 고대 지중해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난 가장 큰 해전이었고, 로마의 내전이 끝나 로마가 공화정에서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으로 변하게 한 사건이었다. 이 해전 이후 로마는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이 등장할 때까지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하게 됐다.

악티움 해전 전에 이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함대는 수 개월 동안 바다와 육지에서도 대치 중이었다. 즉 옥타비아누스 부대(보병 8만 명)는 후일 니고볼리가 건설된 지역에 주둔해 있었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부대(보병 7만 명)는 아카르나니아(악티움 반도)에 주둔해 악티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양측이 대치했다.

해전에서 결정적 승리를 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사령부와 휘하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지역에 악티움 해전 승리를 기념한 도시를 만들고, 니고볼리(승리의 도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이름을 바울이 디도서 3장 12절에서 언급한 것이다.

악티움 해전이 끝난 다음해인 기원전 30년, 클레오파트라가 사망한 해에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됐고, 이 상태는 서기 642년까지 이어졌다. 악티움 해전 후 로마 해군은 지중해 전역에 펼쳐진 로마의 식민지들을 제대로 장악하도록 연결고리를 만들어 유지했다.


▲암브라키아 만에서 본 악티움 해협. 왼편이 악티움, 오른편이 프레베자(니고볼리) 방향. 이 해협 아래에 해저터널이 있다.

▲암브라키아 만에서 본 악티움 해협. 왼편이 악티움, 오른편이 프레베자(니고볼리) 방향. 이 해협 아래에 해저터널이 있다.


이렇게 자국의 해군이 지중해를 장악하자 자연히 로마 상인은 지중해 상권(商圈)을 장악하게 됐고, 새로운 시장과 교역로를 개척할 수 있었다. 기원전 1세기 이후부터는 (지중해 연안) 모든 국가가 로마의 허락을 받아야 지중해에 상선을 띄울 수 있었을 정도로 로마는 육지를 정복하는 강한 육군과 함께 지중해 해상을 관할하는 해양국가(상업국가)가 된 것이다.

참고로 서기 2세기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사이를 운행한 곡물 운반선은 약 250톤 크기로, 지중해 바다가 잔잔한 여름에 주로 운항했다. 항해 기간은 여름에는 로마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10일 정도 소요됐으나, 풍랑이 심한 겨울철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까지 50일 정도 소요됐다.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갈 때,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로 가는 배 두 척을 갈아타면서 가는 내용이 나온다(사도행전 27장 6절, 28장 11절). 바울 당시 이집트는 로마 제국 안에서 명목상 독립국 지위를 갖고 있었으나, 나일강 유역의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지어 로마에 곡물을 공급하는 로마 제국의 속주였다.

동부 지중해를 장악했던 고대 문명국이자 강국이었던 이집트는 해군력에서 로마에 압도당해, 결국 나라를 빼앗기고 속주가 돼 버렸다.

권주혁 장로

세계 145개국 방문
성지 연구가, 국제 정치학 박사
‘권박사 지구촌 TV’ 유튜브 운영
영국 왕실 대영제국 훈장(OBE) 수훈
저서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찾아서>,
<사도 베드로의 발자취를 찾아서>,
<여기가 이스라엘이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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