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선교운동과 내한 선교사들 4] 복음의 빛, 한반도를 비추다
3. 여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
남존여비로 여성 교육 전무
선교사들, 여성 교육 강조해
하나님 동일한 형상 일깨워
이화학당 등 교육기관 설립
내한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나타난 세 번째 큰 변화는 여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였다. 이는 여성 교육과 여권 신장의 결과였다.
조선에서 여성은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다. 남녀유별(男女有別)은 차이의 개념이 아니라 차별의 훈계였다.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운명으로 여기며 가정에서의 천대와 사회적 차별, 그리고 현실의 제약을 받아들이고 살아야만 했다.
여성은 남성과 동일하게 교육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실학을 체계화한 인물이자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쓴 이익(1681-1763)조차 여성(부인)은 “근(勤)과 검(儉)과 남여유별의 3계(三戒)를 알면 족하다”면서 “독서와 강의는 장부의 일이니 부인이 이를 힘쓰면 폐해(弊害)무궁하니라”고 썼을 정도였다(李瀷, 『星湖僿說』, 卷之三 上, 교광서림, 1929, 9쪽).
기독교가 소개되기까지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없었고, 이때까지 여성을 위한 교육이 있었다면 그것은 안방(內房)에서 이루어지는 유교 전통의 가정 중심의 부덕(婦德)을 강조하는 정도였다. “여성에게는 무식이 덕(德)이니라”고 여겼던 유가적 가부장적 사회구조 속에서 남존여비(男尊女卑)는 그 시대의 가치였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도 남성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며, 교육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점을 일깨워 준 것은 기독교였다. 이 점을 시위하기 위해, 선교사들은 의도적으로 여성들을 위한 학교를 열었다. 서울의 이화학당을 시작으로 여자 학교가 세워졌다.
한강 이남 첫 여성 학교는 부산 일신여학교(1895)였다. 마산에서는 1908년 남녀공학인 창신학교를 설립했으나, 경상도 정서상 남녀공학이 현실적으로 어려워 여학생를 분리해 의신여학교로 출발했다. 주기철 목사의 부인이 된 오정모 여사(1903-1947)는 의신여학교 교사였다.
서재필은 1897년 12월 31일 정동감리교회 청년회에서 강연하며 남성과 여성 간의 동등성을 말하면서 여성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가르쳤는데, 이는 그가 기독교를 통한 여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제 상주(上主, 하나님을 칭함) 사람을 내실 때에 귀천과 남녀의 등분이 없이 하셨거늘 마땅히 권리를 좇을 것이요”라고 말한 것이다(「독립신문」 5월 1호(1901. 1. 3). 기독교의 한국 전래는 안방으로 스며드는 한 줄기 소망의 빛이었다.
4. 신분 계급 타파
계급 구별 철폐에도 큰 영향
백정, 500년간 가장 천대받아
하나님 앞 평등한 존재 알려
동등한 법적 권리 선포 이끌어
한국에 기독교가 소개된 후 나타난 네 번째 변화는 신분 계급의 타파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정신과 가치가 남존여비만이 아니라 반상(班常)의 구별을 철폐하는 데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기독교의 인간관과 평등 사상이 사회 체제 변화에도 영향을 준 것이다.
그 일례가 서울과 진주에서 전개된 선교사들의 신분 철폐와 백정 해방운동이었다. 백정은 이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천대받던 신분이었다. 노비나 종보다, 창녀보다도 더 낮은 바닥 신분이었기에 백정배(白丁輩)라고 불렸다.
백정들은 기와집에서 살 수 없었고, 비단옷을 입을 수 없었으며, 가죽신을 착용할 수 없었다. 다른 이가 보는 앞에서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울 수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언제나 존댓말을 사용해야 했고, 저들의 길을 앞질러 가는 일도 금지됐다. 이들은 상투를 틀 수 없었고 망건을 두르는 일도 금지당했다. 장가를 갈 때는 말 대신 소를 타야 했고, 신부는 비녀를 꽂아 머리를 올리지 못했다.
무엇보다 상민들과 떨어져 성 밖 일정 지역이나 농촌의 외딴 곳에 집단을 이루고 살아야 했다. 이처럼 백정의 신분은 비천했고, 그 신분은 의복과 생활환경, 사회적 삶에서 구분 노출돼 있었다. 백정은 사망 시 자식들에게 인(仁), 의(義), 예(禮), 지(智) 등의 이름을 내릴 수 없었다. 이들은 5백 년 동안 한국 사회의 속죄양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기독교회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동등하게 지음받은 존재임을 가르쳤다. 그가 승동교회 목사였던 사무엘 무어(Samuel F. Moore, 1860-1906)였다. 한국 이름 모삼율(毛三栗)로 알려진 그는 현재 롯데호텔 근처 곤당골에서 시작된 곤당골교회(후일 승동교회)를 중심으로 백정해방 운동을 전개했다.
1894년 백정 박성춘를 개종시킨 일에서부터 백정과 그 자녀를 위한 선교·교육 사업을 시작해, 1895년에는 6명의 백정이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박성춘은 1895년 세례를 받았고, 1911년 12월 한국 최초로 백정 출신 장로가 됐다.
그의 아들 박서양(朴瑞陽)은 곤당골교회 부속 예수학당에서 공부하고, 후에는 제중원에서 의학교육(후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을 받아 1908년 한국인 최초 의사 중 한 사람이 된다. 그는 후일 한국인 최초로 세브란스의전 교수 요원이 된다.
선교사들은 이런 일들을 통해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게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시위했다. 무어와 동료들의 협조로 신분의 자유를 누리게 되자, 다른 직종으로 이직하는 백정 수가 급증했다. 그래서 1900년 당시 40만 명으로 추정되던 백정의 수는 1920년대 3만 3천 명으로 감소했다.
무어 선교사는 1894년 갑오경장 당시 동료 선교사 에비슨(O. R. Avison)과 함께 구한말 정부에 백정들의 신분 제한 철폐와 일반인들과의 동등한 공민권 보장을 탄원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조정에서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백정에 대한 복장 제한 철폐와 동등한 법적 권리를 선포했다.
무어는 사재를 털어 포고문을 인쇄해 전국에 배부하고, 백정들 스스로 자기의 권리를 찾아가도록 계몽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14년간 신분 철폐를 위해 일했던 무어는 1906년 12월 22일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혔다.
묘비에는 모삼율(毛三栗)로 기재돼 있으나, 본인은 소(牛)가 운다는 의미의 모(牟)씨 성, 모삼열(牟三悅)을 더 즐겨 썼다고 한다. 사람들을 그를 인목(仁牧)이라고 불렀고, 그의 집을 인의예지가(仁義禮智家)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르타 헌틀리(M. Huntly)는 기독교회의 백정 해방운동을 “세상을 뒤집어 놓은 사건(turning the world upside down)”이라고 평가했다.
5. 문맹 퇴치, 한글의 재발견
종교, 언어나 문학 발달 영향
한자 선호 당대 분위기 속에서
천시받던 한글 우수성 깨닫고
처음부터 한글만 사용 보급해
기독교가 한국에 준 다섯 번째 변화는 문맹 퇴치와 한글의 재발견이었다. 기독교가 한글 보급에도 영향을 줬다는 점은 이광수, 최남선, 최현배, 이응호, 김윤경, 조윤제, 조연현 등도 인정해 왔다.
종교가 언어나 문학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이미 역사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루터가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1522) 출판한(1523. 9) 일은 독일어 보급과 일상화에 영향을 주었고, 1611년 흠정역 성경(King James Version) 출판이 영어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비록 한글은 세종(1397-1450)에 의해 1443년 창제됐고, 3년의 시험 기간을 거쳐 1446년 “배우기 싶고 일상생활에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28글자의 훈민정음”으로 반포됐으나, 그것은 제한된 범위에서만 사용되었다. 현대 언어학자들의 주장처럼 과학적 언어로 창시되고 일상화될 수 있는 언어였으나 절대 다수의 서적은 여전히 한문으로 저술됐고, 한글은 천시되고 있었다.
한글은 창제된 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불렸으나, 후에는 언문(諺文)으로 불렸다. 중국 글은 한문(漢文), 진서(眞書)라고 부르면서 우리 글을 ‘상스런 말을 적은 글’이라는 의미로 언문(諺文)·언서(諺書)·언자(諺字)라고 불렀다. 갑오경장 이후에는 국어(國語)·국문(國文)으로, 경술국치(1910) 후에는 ‘조선어’로, 후에는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부르게 된 것이다.
갑오경장(1894) 이후 칙령을 발표해 한글을 국가의 공식문자로, 한글을 국문으로 인정했으나, 여전히 한문을 선호했다. 이처럼 한글은 천시받던 언어였으나,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널리 사용됐다.
만주에서 번역된 최초의 신약 단권성경은 순한글로 역간됐다. 천주교는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했으나, 개신교는 처음부터 한글만 사용했다. 만주에서 첫 성경 번역본인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1882년 각 3천 부씩 인쇄된 후 단권 신약성경은 3천 부에서 1만 부씩 발간됐고, 1883-1886년 어간에 단권 성경 번역본 1만 6천 권이 보급됐다.
최초의 신약성경본인 1887년 『예수셩교젼셔』 초판본은 5천 부가 발간됐고, 계속 중간(重刊)됐다. 선교사 내한 이후 국내에서도 성경번역이 착수돼, 1887년부터 1900년까지 출판된 성경은 24만 1,250권에 달했다.
한글 찬송가는 1892년 발간되기 시작해, 1908년 장로교·감리교 합동 『찬숑가』 초판본 6만 부가 발행됐다. 『찬숑가』는 1910년까지만 22만 5천 권이 발행되었다. 이때까지도 한문 혹은 국한문 혼용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나, 한국교회는 한글 전용 성경과 찬송가 보급을 통해 문맹 퇴치와 한글 보급에 기여했다.
후에 대한성서공회는 독자들의 기호를 고려해 국한문 혼용성경을 출판하기도 했으나, 순한글 성경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1895년부터 1836년까지 1천 8백 8만 권의 한글 성경을 보급했다.
그 외에도 각종 기독교 문서, 교회학교 교재, 기독교 신문, 잡지 등은 한글 보급의 통로였다. 그래서 이광수는 ‘야소교(耶蘇敎)의 조선에 준 은혜’ 가운데 한글 보급을 중시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회는 문맹 퇴치뿐 아니라 한글 보급에도 영향을 줘, 포괄적으로 한국 문화 형성에 기여했다.
이상규 박사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