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북뉴스 서평] 고통, 수난,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앙상블
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
로널드 롤하이저 | 이선정 역 | 생활성서사 | 232쪽 | 14,000원
성경은 우리에게 깊은 영성의 사람이 아니면 길어낼 수 없는, 진리의 우물 속 깊은 곳에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헨리 나우웬 이후 대표적 영성 작가로 주목받고 있는 로널드 롤하이저가 그런 사람이다.
이 책은 현대 성경신학 연구에 획을 그은 구약성경 학자로서 깊은 영성에 예리한 지성과 풍부한 문학성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월터 브루그만에 의해 “부활의 힘에 대한 강렬한 증언을 이 책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추천을 받을 만큼 강렬하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많은 고통과 시련을 당한다. 그 때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처럼 하늘을 우러러보며 구조의 손길을 보내주시길 기도한다. 하지만 뜻밖에도 예수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자신을 십자가에서 구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승리의 찬가가 아니라, 버림받았음을 고백하는 자조섞인 신음소리였다. 왜 그럴까? 여기에 십자가의 신비가 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수동성과 비활동성의 깊은 의미 속으로 끌어간다. 예수님의 수난의 의미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겟세마네의 외로움과 험한 십자가로 더 깊이 더 깊이 들어간다.
독자는 이 책에서 예수님의 수난을 수동성과 비활동성으로 풀어내는 한땀 한땀 심혈을 기울인 스토리에 깊이 빠져들게 될 것이며, 신음하듯 예수님의 수난과 내가 이생에서 겪고 있는 시련의 동질감을 토로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무언가를 자신의 의지로 행하기보다 모든 일을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순순히 수동성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수난의 입구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공생애 대부분을 적극적 활동가로 사셨다. 통솔하고 가르치고 치유하고 기적을 행하시고 조언해주고 죄인들과 식사하고 토론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시면서 사람들을 복음의 삶으로 초청하셨다. 예수님은 정말 바쁜 삶을 사셨다.
하지만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시작하신 순간부터, 이러한 모든 활동은 중단됐다. 이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그저 맡겨진 분이 되었다. 이렇게 어떤 일을 적극적이고 활동적이고 능동적으로 행하시던 시간이 멈추고, 모든 것이 수동적으로 흐르는 시간으로 들어가셨다. 이것이 바로 수난의 의미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신 그 모든 활동보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고통이 더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다른 이들을 위해 많은 일을 능동적으로 행하던 시기보다, 오히려 무력하고 주도권을 갖지 못한 시기에 더욱 심오한 방식으로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나눠주셨다.
나에게 주도권이 없는 상황에서, 굴욕과 고통을 당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힘겨운 상황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도 고통을 겪는다.
우리 고통을 말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해 보자. 동산에서 예수님이 느끼신 고통은 무엇보다 인간 존재의 가장 어두운 심연, 즉 오해, 외로움, 고독함, 굴욕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의 심연으로 홀로 들어가는 고통이었다.
동산에서의 고통은 냉담함으로 짓밟힌 섬세한 마음, 증오에 짓밟힌 사랑, 오해에 짓밟힌 선함, 잘못된 판단으로 짓밟힌 무고함, 살인으로 짓밟힌 용서, 지옥에 의해 짓밟힌 천국이었다. 이 외로움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고통받은 이는 살려 달라고 외칠 정도로 큰 고통을 받았다. 이런 자리에 예수님이 먼저 가셨다.
이 자리는 바로 죽기 전에 죽는 법을 배우는 자리다. 다가오는 무섭고도 두려운 죽음의 순간에, 암흑과 기세에 눌려 모든 것을 자괴감에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려면 우리도 죽기 전에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고통과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항상 진실함과 성실함, 올바름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죽기 전에 죽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누군가에게 목숨을 빼앗길까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도를 통한 변화가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는 예수님처럼 누군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사랑의 요구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믿음이자 순명을 따르는 길이다.
하나님은 강제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누구를 감명시키지도, 제압하지도 못하는 무력한 바로 그 순간, 우리가 하나님의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처절한 메시지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고통을 면제해 주시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의 고통을 면제해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인 예수님을 굴욕과 고통, 죽음에서 구해주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굴욕과 고통을 당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는 힘든 순간, 군중은 조롱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해 주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렇게 굴욕과 고통 속에서 돌아가셨다. 우리 하나님은 구조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십자가 안에 숨겨진 핵심적인 계시다.
하나님은 굴욕과 고통, 죽음에서 우리를 구해 주고자 개입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일이 벌어진 후 굴욕과 고통,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구원받는다.
우리는 종종 신앙의 근거나 설교의 근거를 구조하시는 하나님, 진실한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특별한 면제를 약속하시는 하나님께 두고 있다. 진실로 예수님을 믿으면 굴욕과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진실하게 예수님을 믿으면 번영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지만, 실제로 예수님은 모든 위험에서 고통을 면제해 주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으셨다.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이고, 우리가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있는 계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셨다. 예수님에게서 물과 피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수치와 부끄러움과 죄가 쏟아져나오고, 깨끗해지고, 자신들 안에 더 깊고 풍성한 생명이 흘러넘치며, 새로운 영적인 에너지로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예수님의 죽음에서 무언가 흘러나와 제자들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고 죄의식을 덜어주었으며, 삶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갖게 해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피와 물로 씻겨 정화되었고, 새로운 힘을 얻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셨을 때, 마침내 부활의 아침이 밝았다. 예수님의 몸이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났을 때, 우주의 물리적 구조까지 재배열됐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구조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입증하셨다. 부활을 믿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믿음 속에 살게 되며 고통 속에서 괴로운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 더 심오하고 영원한 힘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이렇게 부활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느끼는 모든 공포는 결국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부활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힘이 우리를 매순간 떠받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우리는 십자가 없는 신앙, 고통 없는 성공의 길을 약속하는 얄팍하고 허황된 말잔치 뿐인 헛된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은 나를 구하시지는 않지만, 끝끝내 나를 구원하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종수
크리스찬북뉴스 편집고문
의정부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