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목사와 오늘의 대한민국 1]
지난 4월 13일 주일 오후 영락교회(담임 김운성 목사)에서 개최된 ‘한경직 목사 기념예배’에서 전한 박명수 교수님의 설교 내용을 세 차례에 걸쳐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마태복음 6:33-34
한국 근현대사에서 한경직의 위치
우리 한민족 근대사에 있어 가장 잘못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19세기 말의 쇄국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는 다 문을 열고 앞으로 나가는데, 우리는 문을 닫았습니다. 그 결과는 후퇴였고, 일본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민족이 행한 가장 잘한 일은 1948년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세운 일입니다. 1945년 해방되고, 3년간의 투쟁을 거쳐 1948년 대한민국은 탄생했습니다. 이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신앙적으로 세계사에서 우뚝 선 나라가 되었습니다. 최근 대한민국이 어려움을 격고 있지만, 이 풍랑을 잘 이겨내면 우리나라는 한층 더 도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대한민국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물론 미국의 도움도 있었고, 이승만 박사의 지도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대한민국을 만들 수 없습니다. 저는 이들을 도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가장 중요한 세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월남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에서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자유를 찾아 내려온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있어 월남 기독교인들의 역할은 엄청나게 큽니다. 이들은 군대에 들어가 나라를 지키고, 정계에 들어가 민주주의를 신장시키며, 사업을 해서 나라를 발전시키고, 학교를 세워 국민을 계몽했습니다. 이런 월남 기독교인들의 중심에 바로 한경직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을 중심으로 하는 월남 기독교인들이 대한민국 건국에 미친 공로를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방 후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신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신사참배를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어떤 분들은 올바른 신학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어떤 분들은 부흥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기독교에 기초해 대한민국을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사실 이것은 한경직 목사님이 생각해 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경직 목사님께 주신 비전입니다. 일제 말 한경직 목사님이 목회직에서 쫓겨나 보린원에서 고아들을 돌보고 계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한 가지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삼천리 강산이 보이면서 방방곡곡에 흰 돌로 세워진 교회가 가득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한 목사님에게 일제는 곧 망할 것이고, 우리나라는 독립하며, 이제 그리스도 위에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 꿈을 생각하며 지은 교회가 바로 이 영락교회 예배당이고, 이 예배당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경직 목사님에게 주신 사명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셨습니다. 1973년 1월 은퇴예배에서 가장 감사한 것은 “영락교회가 난시와 전시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거운 짐을 담당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은퇴 후에도 이 무거운 짐을 지셨습니다. 저는 영락교회가 한 목사님과 함께 이런 무거운 짐을 지신 것은 영락교회가 자랑할 가장 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경직 목사와 대한민국 건국
한경직 목사님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어떤 기여를 하셨는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한경직 목사님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데 귀한 역할을 담당하셨습니다. 해방이 되었을 때 한 목사님의 꿈은 컸습니다. 이제 얼마 있으면 미군이 진주할 것이며, 이제 기독교 정신으로 자유스러운 나라를 만들어 보고자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북한 땅에 등장한 것은 소련이었고, 소련은 북한을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려 했습니다. 결국 한 목사님은 월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목사님은 월남해서 자유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미소공위를 반대하고, 유엔을 지지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국제사회는 한반도의 미래를 미국과 소련에 맡겼고, 미국과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이 미소공동위원회를 반대했습니다. 미소공위는 소련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국은 미소공위를 포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했습니다.
한 목사님은 1947년 10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한반도 문제의 유엔 이관을 축하하는 대회에서 월남 동포를 대표해 ‘이북 동포에게 드리는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한 목사님은 소련의 극력 반대에도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었기 때문에, 머지 않아 우리는 자유 독립될 것이며, 그때까지 북한동포들은 참고 기다려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유엔은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결의했습니다. 이 결정에 소련은 반대하고, 미국은 지지했습니다. 미국은 먼저 남한에 민주정부를 세우고 그 기반 위에 남북을 통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 목사님은 미국의 입장을 지지했습니다.
또한 한 목사님은 먼저 남한에 대한민국을 세우고, 그 다음 한반도를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월남 기독교인들은 소련과 타협해 나라를 만든다는 것은 공산국가가 되는 길이라 생각하고 이것을 반대했습니다. 월남 기독교인들은 5.10 선거를 통하여 대한민국을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도 여기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대한민국이 기독교 정신 위에 세워지기를 원했습니다. 원래 미 군정이 선거일로 원래 계획한 날은 5월 9일인데, 이 날은 주일이었슺니다. 한국 기독교는 주일성수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일요일에 선거하는 것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일제시대에도 주일을 성수했고, 해방 후 북한에서도 1946년 11월 3일 주일 선거에 반대하다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영락교회는 일본의 반대도 이겼고 공산주의의 반대도 거부했는데,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주일 선거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이 주장은 이승만 박사를 통해 미 군정에 들어갔고, 미 군정은 날짜를 하루 늦춰 5월 10일 선거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영락교회 신자들의 승리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해방 3년 동안 가장 마음 아파했던 것은 기독교 세력 가운데 일부분이 좌경화되어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감리교 김창준 목사는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였는데, 사실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사회주의자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동맹을 만들어 공산주의를 지지하였습니다.
한 목사님은 이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1947년 2월 2일 영락교회에서 한국 모든 교파들이 모여서 김창준의 행동을 비판하는 동시에, 국제사회를 향해 한반도에 자유독립 국가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영락교회 청년들은 이들이 모인 시천교 강당에 가서 김창준의 추종자들에게 기독교인들도 아니면서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들의 사과를 받아내기도 하였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세우는 데 월남 기독교인들은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남한 땅 어느 누구보다 더 남한 땅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일의 중심에 바로 한경직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한경직 목사님은 이승만 박사와 더불어 건국의 아버지 가운데 한 분으로 존경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박명수 박사
서울신대 명예교수
전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