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일의 설교] 함께 울고 웃는 공동체(마 11:16~19) < 이 주일의 설교 < 설교 < 기사본문



예수는 사람과 어울리며 기쁨회복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6~17)


고동훈 목사(성문교회)
고동훈 목사(성문교회)


현대 가정과 교회의 문제는 함께 놀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노벨 수상자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쓴 <파코>라는 소설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가정의 문제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스페인에 사는 어느 아버지는 불화로 인해 집을 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 파코에 대해 뒤늦게 양심에 가책을 느끼며 아들과 화해하기로 다짐합니다. 아버지는 신문에 이런 광고를 냅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버지로부터.” 파코라는 이름은 스페인에서 흔한 우리나라로 치면 철수 같은 이름입니다. 아버지가 호텔에 도착하니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나 와서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소설은 현대인들의 고독과 사랑받기 원하는 근본적 마음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오늘날의 가정이 이렇고, 오늘날의 교회도 이렇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우리 성도들은 누군가 보고 싶다고 하고, 같이 만나자고 하고, 용서했다는 말을 듣고 싶은데, 그 말이 없어서 밖으로 돌고 외톨이와 같이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당시 시대상 또한 다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고 시간을 보낸 것을 비난하는 사람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행위가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마 11:19)


이것은 함께 어울리고 감싸 안고 어울릴 줄 아는 예수님의 모습,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달리 당시의 세대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함께 어울릴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함께 놀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공감하지 못하는 세대라는 말입니다.


교회와 믿음의 가정이 함께 울고 웃는 공동체가 돼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함께 어울리고 공감하고 놀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사실 우리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즐거움을 전달하신 분이셨고,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어울리면 기쁨이 회복되는 축복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셨고 이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과 축복을 전달하는 것인가를 잘 말씀해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논다고 하는 표현이 유치한 것 같고 어린 시절에나 쓸 단어지만, 가장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용어여서 이 단어를 쓰려고 합니다. 누군가가 내 옆에서 같이 있어 준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함께 맞장구도 쳐주고 함께 놀자는 소리에 응답해주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어린 시절 제일 듣기 좋았던 소리가 무엇입니까? “누구야 놀자” 아닙니까?


그런데 이 세대는 더 이상 함께 놀자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저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축복은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현실의 가정, 현실의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가정, 교회, 사회가 됐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외면하고 스스로 괜찮은 척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외로움에 떨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놀아주고, 교회에서 놀아주고, 사회에서 놀아줄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함께 울고 웃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셨습니까? 예수님의 방법은 같이 어울려 먹고 놀아준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대로 죄인들과 세리들,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정에서 버림받고 심지어는 당시의 성전에서도 따돌림을 당하던 사람들과 예수님은 같이 먹고 함께 함으로 그들을 회복시키십니다. 가정의 회복은 부모와 자녀들이 같이 놀 때 일어납니다. 교회의 성도 간의 영적 가족관계 회복은 성도들이 서로 어울리고 함께 놀 때 일어납니다. 사회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외롭게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같이 있어 주고 함께 놀아줄 때, 진정으로 따뜻한 위로와 말, 따뜻한 식사의 배려로 함께 있어 줄 때 변화는 일어나게 됩니다.


마이클 야코넬리는 <하나님과 함께 놀다>라는 그의 책에서 한 예화를 들고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 있었던 일입니다. 늘 우수한 성적을 받던 아들이 17살이 되면서 귀를 뚫고 찢어진 바지를 입고, 변한 것입니다. 가정은 전쟁터가 됐습니다. 긴장이 고조되고 결국 부모는 상담을 받았습니다. 해결책은 간단했습니다. 어느 날 부모는 아이의 방문을 걷어차고 “할 말이 있으니 방으로 와!” 놀란 아이가 오자 말했습니다. “네가 술래다. 백을 세고 우리를 찾아.” 그리고는 숨바꼭질을 했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들은 친구들에게 즐거운 듯 말했습니다. “어젯밤 놀랄 일이 생겼어. 부모님과 새벽 3시까지 숨바꼭질을 했어. 근데 아직도 못 찾았어.” 술래잡기 놀이로 아들과의 긴장과 갈등이 허물어졌습니다. 부모와 숨바꼭질을 하면서 관계가 치유됐던 것입니다.


교회 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만 드리고 쏙 가는 것을 주님을 원치 않습니다. 주님은 함께 잔치에 참여하고 서로 먹고 놀아주기를 원하십니다. 초대 교회는 주님의 이런 공동체를 실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함께함으로 축복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는 부모와 자녀, 성도 간 함께 어울린 시간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같이 먹고 마시는 것을 즐겨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이 됐고, 슬픔과 고통과 아픔과 고난을 잊게 만드는 시간이 됐습니다. 바로 이렇게 함께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축복의 전달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잘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기도할 줄도 아셨지만 놀 줄도 아셨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예수님의 축복의 방법을 활용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와 믿음의 가정들이 세상을 얻는 복음 전략으로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엄격하고 딱딱하고 정죄하는 교회가 아니라 함께 놀아주고 함께 울 줄 아는 교회와 가정과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세상 가운데 예수님이 꿈꾸시는 축복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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