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칼럼] ‘스스로 구원하라’는 말의 의미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투 DB

‘구원’에 관한 한 성경은 언제나 ‘피동형(passive, 被動形)’을 써서 ‘구원을 받는다(be saved)’고 표현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Believe in the Lord Jesus, and you will be saved–you and your household).”

그러나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Deliver yourself, 잠 6:5)”, “나의 백성아 너희는 그 중에서 나와 각기 나 여호와의 진노에서 스스로 구원하라(save yourselves From the fierce anger of the LORD, 렘 51:45)”는 말씀들처럼 ‘능동적(active, 能動的)’인 표현들도 있다.

‘구원’을 은혜의존적 ‘피동형(passive, 被動形)’으로 이해하는 정통 기독교인들에겐 이런 어법이 당혹스럽다. 이와 달리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를 모토로 삼는 자연종교가들(naturalreligioner)이나 ‘신인협동(Synergism)’을 부르짖는 알미니안들(arminians)에게 그것은 그들 주장의 논거가 된다.

물론 이 말씀들은 문맥대로라면, 전자(잠 6:5)는 ‘자신을 파멸에 빠트리는 보증은 서지 말라. 혹 부지중에 보증을 섰다면,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듯,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듯 신속히 빠져나오라’는 뜻이다.

후자(렘 51:45)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파멸할 세상 바벨론과 벗됨으로(약 4:4) 심판 때 그들이 받을 화(禍)에 참여하지 말라’는 뜻이다. 세상과의 구별된 삶을 요청하는 ‘성화에의 요청(고후 6:15-18)’이다.

그럼에도 구태여 이 구절들을 ‘기독교 구원론’과 연관지어 설명하려는 것은, 공격자들이 그것을 자신들이 주장하는 ‘신인협동(神人協同) 구원론’의 근간으로 삼아 기독교 구원관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으라

왜곡자들은 ‘스스로 구원하라’를 자신들의 ‘신인협동 구원’의 근거 구절로 오용(誤用)하지만, 사실 그 말씀은 ‘구원을 받으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를 뒷받침해 줄 예증 구절 중 하나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너희 스스로를 구원하라(Save yourselves from this corrupt generation, 행 2:24)”이다. 거두절미한 채 이 구절 자체만 해석하면, ‘너희 스스로의 힘으로 이 패역한 세대에서 건짐을 받으라’이다.

그러나 전후 문맥과 연결지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죄 사함을 얻어 이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뜻이 된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38-41).”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 구원하라’가 ‘자력 구원에의 명령’이 아닌 전적 무능한 죄인들을 향해 ‘내가 주는 구원을 받으라’는 하나님의 자비에의 초대임을 알게 된다.

◈구원을 택하라

‘스스로 구원하라’는‘구원을 선택하라’는 뜻이다. ‘인간의 전적 무능(Total Depravity)’을 믿는 ‘개혁주의 신학’에선 자의적(arbitrary, 恣意的)이고 자결적(self-determinative, 自決的)인 냄새를 풍기는 ‘선택’이라는 용어를 쓰길 좋아하지 않으나(대신 ‘그리스도 안에 약속된 구원을 받아들인다’ 같은 말을 쓰길 좋아한다), 반대자들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부득불 그것을 차용한다.

‘스스로 구원하라’가 ‘구원을 택하라’와 동일시된 내용 중 하나가 다음 구절이 아닌가 한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 30:19).”

‘생명과 복을 선택하느냐, 사망과 저주를 선택하느냐’는 ‘자신을 구원하느냐 자신을 파멸시키느냐’는 문제이고, 그 중 ‘생명과 복을 선택함’은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우상’ 둘 중 하나를 택하도록 요구한 것 역시 ‘구원과 저주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말이고, 하나님을 택하는 것은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임을 말씀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20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수 24:15, 20).”

◈그리스도께로 피하여 심판을 면하라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것’ 역시 ‘스스로 구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피난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감으로서 된다.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시 34:22).”

신약적으론 구속자(救贖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이며, 그것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이다. “내게…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반면 죄인이 ‘심판을 받는 것’은 피난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가지 않은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전 2:1).”

또한 ‘정죄의 율법’에서 떠나는 것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다. 무지한 죄인들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 율법아래 있기를 원하나 사실 그것은 ‘소가 스스로 푸줏간으로 들어가듯’,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갈 3:10).

이는 ‘율법의 기능’이 구원이 아닌 심판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달리신 것은 우리를 그 저주스런 율법에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함이었다(갈 3:13).

그런데 어리석게도 죄인들은 ‘그리스도’가 아닌 ‘율법’ 아래 들어감으로서 자신들을 저주에 빠뜨리고 “그의 거룩한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다(히 10:29).”

지금까지의 내용에서 보았듯, ‘스스로 구원하라’는 말씀에는 인간의 능력을 신뢰하게 하는 ‘자력 구원’이나 ‘신인협동 구원’의 여지가 일체 없다. 그것은 한 마디로 전적무능한 죄인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말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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