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박스] 황해노회의 또 다른 훈장, ‘수난과 항거’


황해노회가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총신대 양지캠퍼스에 세운 기념비
황해노회가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총신대 양지캠퍼스에 세운 기념비

‘최초’라는 타이틀 못지않게 황해노회가 자랑스러워 하는 유산은 수난과 항거의 역사이다. 역시 <황해노회 110년사>에 새겨진 그 기록은 자신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뚜렷이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기를 지나며 조국 교회들이 겪은 박해들은 대부분 공통적이었지만 황해노회 교회들이 겪은 고통은 조금 더 유난했다. 출발 단계에서부터 민족교회로서 정체성이 뚜렷했고, 어떤 불의에 대해서든 과감히 맞서 항거하는 지역적 분위기도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가 황해도의 기독인들이 주도해 ‘면학회’를 조직하고 교육을 통해 국권회복을 추구하다 일제의 탄압을 당한 ‘해서교육총회 사건’과, 연달아 발생한 ‘105인 사건’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어 고초를 당하고, 교회들은 혹독한 핍박을 면치 못했다.

황해도 일대 복음화에 앞장선 미국북장로교 재령선교부 소속 선교사들.
황해도 일대 복음화에 앞장선 미국북장로교 재령선교부 소속 선교사들.

하지만 황해노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들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3·1운동이 발발했을 때는 안악을 비롯해 사리원 재령 등 곳곳에서 봉기에 앞장섰다. 특히 안악지역 만세운동에서 교회들의 활약은 눈부셨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교회지도자와 성도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황해노회의 이 전통은 일제 패망 직전에 벌어진 신사참배 거부와 정방산 사건으로까지 이어진다.

해방 직후 좌우이념 대립에서부터 6·25로 이어지는 조국 분단 과정에서 이북의 교회들은 또 한 번의 치열한 격랑에 휩싸였고, 황해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산세력이 기세를 떨치는 분위기 가운데도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당당히 선언하고,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주일선거를 강행할 때도 이를 저지하는 데 앞장섰다.

환난을 피할 길은 없었다. 목회자들을 집중 탄압한 ‘황해도 48인 사건’에 이어 ‘초도 애국청년단 의거’ ‘풍천 해서동지회 사건’ ‘은율읍교회 비밀결사 신록회 사건’ ‘황주읍교회 등사판 사건’ 등이 잇달아 터져 나왔다. 또다시 수많은 목회자들은 물론 남녀 성도들과 어린 학생들까지 목숨을 잃거나 체포되었다.

6·25 전쟁기에 남한에서 처음으로 열린 황해노회 제73회 정기회 참석자들.
6·25 전쟁기에 남한에서 처음으로 열린 황해노회 제73회 정기회 참석자들.

결국 전쟁은 발발했고 황해노회 출신으로 교단 총회장을 지낸 김익두 목사가 새벽예배 도중 침입한 인민군들의 총검에 목숨을 잃은 사건이 벌어졌다. 1·4후퇴 시기까지 순교한 황해노회 소속 교역자와 장로들의 숫자는 26명에 이르렀다. 결국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피난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1952년 4월 16일 부산 북성교회에는 황해도 출신 목회자와 성도 100여 명이 모였다. 1949년 제72회 정기회 이후 끊길 뻔한 황해노회의 명맥이 남한에서 다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월남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이북의 교회들이 재건되거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되면서, 황해노회는 꾸준히 교세를 확장하고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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